EP·331
“아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청이 손을 툭툭 털었다·
그러나 지방끼 가득한 살점들의 잔해가 오히려 양손에 엉겨 붙어 더럽혀진다·
청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니 이 새끼들은 왜 하나같이 상의를 홀라당 벗고 다니는데?
아쉬운 대로 좀 온전하니 피가 안 묻은 바지를 찾아 부욱 뜯어 손을 닦아내는데 급조 수건이 땀인지 무엇인지로 푹 절어 축축하기 그지없다·
일단은 손에 진득한 피와 기름 투성이라 닦아내기는 하지만 과연 이게 깨끗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유 찝찝해·
청이 대충 널브러진 시체들을 발로 투욱툭 밀다가 이내 화색을 띄니 물주머니 찬 허리 아랫부분을 발견한 덕분이다·
그래 이거지·
청이 답지않은 깔끔을 떠느라고 주머니 마개를 따고 손에 쏟아붓는데 아뿔싸·
푹 삭은 술 냄새가 시큼하니 코를 찌른다·
음· 이걸 나름 소독이라고 할 수 있나?
한 모금 했으면 좋겠는데 주인이 주인이라 영 찝찝하다·
청이 그렇게 술방울 남은 손을 바지춤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월광검을 챙겨다 검집에 밀어넣었다·
다 좋은데 검이 길다 보니 납검이 굉장히 불편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더라고·
그리고 나니 아직도 끄으윽 신음을 흘리고 있는 부대주가 눈에 들어온다·
“자· 반성의 시간은 끝· 이럴 줄 알았으면 착하게 살 걸 그랬죠?”
“대체 대체 녹림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렇게 지독하게 구는 것이냐!?”
“엥· 뭔 소리예요? 가만히 있는데 그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요· 구경값 달라길래 적당히 낼 의향도 있었는데· 봐봐 얼마나 예뻐요· 돈 낼 만한 구경이긴 해·”
“무슨 소리냐! 여기까지 쳐들어와선!”
“쳐들어오긴 누가 쳐들어와요? 중원에 모든 산이 다 녹림 꺼다 뭐 이딴 소리 해요? 지나가는데 너네가 시비 걸었잖아요·”
부대주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다가 문득 설마하니 스치는 생각이 하나·
“네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발을 들였단 말이냐?”
“음? 장가계?”
장가계는 저기 기암괴석들을 지나 천문산 넘어 천자산 능선 두 개나 넘어야 나오는 소도시의 이름이 아닌가·
그에 부대주가 곧장 깨달았다·
씨발· 녹림에 쳐들어온 게 아니라 진짜 모르고 지나가는 길이었던 거냐·
청의 말대로 진짜 괜히 건드렸다가 개박살이 난 꼴이었다·
“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으면 유언 정도는 멋지게 해 봐요·”
“···살려억!”
목숨을 구걸하려던 부대주가 날아든 발등에 머리를 차이며 구차한 비명을 내질렀다·
코가 내려앉은 부대주가 억울한 소리로 다급히 되묻는다·
“왜 왜···?”
“유언을 해 보라고 했지 들어준다고는 안 했잖아요·”
“그게 지금 할 소리냐!”
“아저씨는요? 지금까지 산적질 하면서 죽인 사람들 유언을 단 한번이라도 들어준 적이 있어요? 듣고 비웃은 거 제외하고· 내 있으면 목숨은 살려 준다·”
“그건·”
일순 부대주의 말문이 탁 막혔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들은 바나 마찬가지였다·
“이 있다!”
“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순간 검을 뽑으며 위로 그리고 아래로 내리처 삭삭 두번의 검격·
부대주의 양쪽 어깨가 깔끔하게 잘려 팔 두개가 좌우로 툭 떨어진다·
“목숨은 살려 줬어요· 절정쯤 되는 것 같은데 지혈 정도는 할 줄 알 거 아냐· 이제 죽으면 그쪽 책임인 거 알죠?”
“무슨 말도 안 되는 살려 살려 줘!”
지혈도 남는 손이 있어야 혈자리를 잡건 상처를 싸매건 한다·
하지만 청이 거기까지 신경써 줄 필요는 없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해야지· 발로 하건 뭐 입으로 하건·
“음·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
재미 다 본 청이 미련없이 몸을 날렸다·
아까 무슨 신호탄 같은 게 사방에서 날아오르던데 여기 있다가 우르르 몰려오면 또 곤란하단 말이지· 하고·
스스로의 경공이 매우매우 뛰어남을 아는 청이고 이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청이 이제 도망쳐야겠다 하고·
육락봉 정상에서 산길은 동서로 뻗는다·
서쪽 용산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천자산으로 쭉 뻗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청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길 없어도 남쪽으로만 가면 되지 않나·
남쪽으로·
산을 타고 죽 내려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청이 알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청의 고향 한민족들은 산 알기를 만만히 보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산은 실제로 만만하기 때문이다·
일단 산세 자체가 험준하지 않아 협곡으로 구성된 미로 같은 어지러운 지형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심지어 암반이 길을 막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면서도 수목이 높지 않고 밀도가 낮아 안쪽으로 볕이 들어 환하고 시야가 딱히 크게 제한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 인류에게 산은 공포다·
깊은 산이란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로 대낮에도 깜깜하여 어둡고 해가 지면 아예 암흑천지 눈을 감으나 뜨나 아무것도 전혀 보이지 않게 변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위아래로 변화무쌍하니 급경사가 사람을 가로막고 한두 장 높이 정도의 절벽은 절벽 축에도 못 낀다·
그러니 중원인에게 산은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사지 겸 금지이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경공을 쓸 수 없는 지형이기도 했다·
청이 익힌 천리비행술은 빠르고 오래 달리는 데에 특화가 되어있다·
최고 속도에서 한 발짝 떼어 삼 장 이상씩 뛰어넘는 신묘한 절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길 없는 산세에 들어선 지금 청의 반경 삼 장은 커녕 이 장 내에도 탁 트여 도약할 공간이 없다·
나무가 막거나 푹 꺼져 너머가 낭떠러지인지 비탈인지 알 수가 없거나 암반이나 절벽이 가로막으니 몸을 날려봐야 아까 그 대주란 놈이 했듯이 인간과 자연의 대결 혹은 간다! 서문청 몸통박치기! 하는 의미 없는 자연물 공격이 되고 만다·
거기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 따위에 지면 파악도 안 된다·
함부로 발을 디뎌 빠지는지 미끄러지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천하에 숙련된 땅꾼 약초꾼 석청사냥꾼 등등 산사람이라고 해도 감히 산속에서 뛰어다니지는 못하는 이유다·
그래서 청이 경공 대신 빠른 걸음으로 슥슥 험한 산세를 가로지른다·
다만 신체 능력이 이미 인간을 진작에 초월해버린 청이다·
놀라울 정도로 기민한 경괘한 움직임에도 청이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별로 안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경공은 못 쓰지만 이 정도면?
이대로 남쪽으로 쭉쭉 뻗으면 되겠다·
뭐어· 산 타는 거 별거 아니네·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까마득한 절벽이 길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기분이 좋던 청이었다·
내가 가는 방향이 곧 길이다 내가 길을 만들었다 하고 의기양양 위풍당당 기세 좋게 산세를 헤쳐 나가다는 중이었다·
문득 시야가 훤히 트이며 수백 장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와· 진짜 멋있네·
저 아래 몽글몽글 손톱만한 녹색들이 죄다 한 그루 거대한 수목들이 아닌가·
그러나 절경 구경도 잠시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내려가?
청이 절벽 끝을 몇 번 밟아 단단한 암반임을 확인하고는 조심조심 초절정씩이나 된 무인 주제에 꼴사납게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절벽 끝으로 머리를 불쑥 내민다·
“허억·”
깜짝 놀란 청이 급히 샤샤샥 뒤로 기어 물러났다·
울타리 하나 없는 쌩 절벽 끝이다·
일백장 높이가 훨씬 넘는 것 같은데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보니 심장이 덜컥 내려않고 무릎 뒤편이 시리며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아무리 신체의 단단함이 인간 초월이며 호신강기 둘러내도 사람이 일백장 넘게 추락하여 살아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암반을 타고 내려가려면 못 내려갈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무리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내가 초절정이지 초절벽타기 전문가는 아니잖아·
심지어 반대편 남쪽에도 거대한 절벽이 길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절벽 타고 내려가더라도 반대편 절벽을 타고 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어째 우회해야지·
청이 좌우를 살피다 일단 서쪽으로·
그리고 이 각 정도 절벽에 거리 두고 쭉 따라가다가 점점 각이 바뀌어 아예 서쪽을 가로막은 절벽을 맞이했다·
이대로 절벽을 따라가면 도로 아까 산적이랑 싸운 그 자리로 돌아가는 셈이다·
청이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그렇게 반 시진쯤 똑바로 동쪽으로 향해 또다시 시야가 확 트이는데 장가계의 최고 절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적당히 안개가 깔려 구름 위에 섬이 떠다니는 듯한 몽환적인 풍경 마치 선계에 온 듯한 광경이라 하여 무릉도원이라 하는 그!
그러니까 막다른 절벽이라는 뜻이다·
그제야 청이 남쪽으로 길이 없었던 이유를 깨닫고야 말았다·
아씨 남쪽이 온통 절벽으로 막혀서 갈 수가 없으니까 당연히 길이 없지·
그러나 이번에는 청을 멍청하다고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청의 뿌리 한민족들이란 방위를 보고 길을 찾는 사람들이라서다·
숲이나 산도 막힘이 없지만 심지어 도시 역시 마찬가지라 동서남북 지리만 잡고 있으면 어떻게든 목적지에 닿는 나라라서·
그러나 이는 구획 도시의 특징이고 오래된 도시에서는 그런 식으로 동서남북 방위만 잡고 가다기는 막다른 길에 딱 막혀버리고 만다·
하지만 본래 한 문화권의 상식이란 해당 문화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서·
다행히 북으로 좀 따라가다보니 가파르지만 절벽은 아닌 비탈이 모습을 드러낸다·
음 너무 가파른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하지만 여기서 더 가면 아까 거기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체해서 음 천라지망은 싫어·
이미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에 추적이라면 딱 질색인 청이었다·
청이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청의 뛰어난 행동력은 망설이지 않는다·
물론 그 뛰어난 행동력 때문에 거의 한 시진 가까이 육락봉 남쪽의 절벽만 훑다가 이 꼴이었지만·
그냥 길 타고 내려갔으면 한 번에 하산 끝이었을 일을 이렇게 굳이 여러 번 굳이 훨씬 힘들고 험난하며 심지어 시간도 수십 배나 걸려서 하게 되는 것이다·
청이 조심스레 비탈에 발을 디딘다·
아예 뒤로 눕듯이 등과 손으로 지면을 딱 붙들고 조심스레 타고 내린다·
그러니 속도가 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미끄러지면 아무리 청이라 해도 큰 부상을 면치 못할 터다·
그러나 뭐 어쩔 수 있나·
청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타고 내려갈 수밖에는·
—-
육락봉 정상의 긴급 지원 요청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들은 바로 양산박대다·
양산박은 녹림에게 있어서 최고의 우상이자 본받아야 할 위인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딴 전투부대라고 하면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듯이 녹림 총본산을 거점으로 머무는 녹림의 최정예 전투 부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양산박대의 대원들이 육락봉 정상의 참극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의 신체 부위가 따로 떨어져 너저분하게 널려있었으니 죽은 자 중에 사지가 멀쩡히 붙은 자가 없다·
그나마 가장 나은 꼴이 머리만 분리가 된 상태였으니 오죽할까·
죽은 자 중에는 그랬다·
산 자 중에는 사지가 붙은 자도 있었다·
“헉 도 도련님!”
“건들지 마! 목이 부러지셨다 흔들리면 진짜 돌아가시는 수가 있어!”
최정예 부대라면 응당 의무 당번도 끼고 있는 법이라서 양산박대의 의무 당번이 조심스레 의식을 잃은 도련님을 살폈다·
“도련님은 어떠시지?”
“목도 목이지만 머리에 피가 고였습니다· 몇 각만 늦었어도 이미 돌아가셨을 겁니다· 처치를 해야 합니다만 위험성이 좀 커서···”
“당장 돌아가시는 것보단 낫지· 잘못되면 이미 돌아가셨던 걸로 칠 테니 서둘러·”
“예·”
그동안 대원들이 주변을 살폈다·
시체들의 신원에 대해서는 굳이 상세히 살필 필요가 없었다·
둘째 도련님이 이끄는 부대는 맹호대고 부대주도 양팔 잃은 채로 죽어있지 않는가·
“맹호대 인원이 몇이었지?”
“마흔일곱일 겁니다·”
“그런데 시체는 스물 넷뿐이로군?”
대주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하기야 현장이 이리도 참혹한데·
등돌리고 도망치는 꼴이 눈에 선하다·
아무나 막 받아주다 보니 진짜 개나 소나 녹림의 협사들이랍시고 설치지만 진짜로 목숨을 거는 이가 개중 몇이나 되겠는가·
“생존자는?”
“없습니다·”
“나머지는 도망쳤군· 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원한이 사무친 손속인데·”
양산박대 대주 도우삼이 중얼거렸다·
양산박대 대주 도우삼이 추리 비슷한 흉내를 내 보았다·
그리고 결론은 결국 모르겠다고·
녹림에 원한 가진 이가 한둘이랴·
원한의 크기만큼 힘을 가지게 된다면 이 세상에 녹림이란 세력은 진작에 사라지고 말았을 테니까·
“도련님은 어떠시지?”
“일단 생명의 지장은 없겠습니다만·”
목뼈가 부러진 채로 방치가 된 탓에 목 아래로는 완전 마비 솜털 하나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목 위가 멀쩡할 가능성도 낮다·
아주 천운이 따라야 멀쩡하고 벙어리나 저능아 귀머거리 등등 머리에 문제가 생긴 바보 천치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도우삼이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바보 천치가 되는 편이 낫겠군· 멀쩡히 살아서 전신 마비라니· 혹시 내가 그런 꼴이 되거들랑 차라리 숨통을 끊어 주게· 그런데 지독한 손속이군· 누가 이런····”
도우삼의 의문은 얼마 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용산채의 산적들이 꽁꽁 묶어 질질 끌고 오는 맹호대의 탈주자가 있었으니까·
“저는 도망친 게 아니라 지원 요청을 컥 아악 아악!!”
필사적으로 변명을 주워삼키던 탈주자가 거친 발길질에 채여 나동그라지고 이후에 손목을 지그시 밟는 무게감에 비명을 내지른다·
“도망친 새끼가 말이 많군· 살고 싶으면 아는 바가 많아야 할 것이다· 누가 이랬지? 어떤 놈들이야?”
그러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비명 같은 답변을 빽 내지르는 것이다·
“서문청! 서문청 그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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