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8
캐넌 킹은 뛰어난 진행자이다·
게스트들이 입 밖으로 내보낸 말들을 조합하여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나메가 열심히 팬들과 소통할 동안 슬슬 1부의 끝을 매듭지어야만 했다·
그는 커튼 뒤에 조용히 지켜보던 천교수를 무대 위로 불렀다·
“아버님 만약 따님이 남자친구 혹은 썸남을 데려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녀의 교제를 허락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만약을 가정하는 것임에도 천교수의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이마에 있던 주름이 한층 깊어지며 그는 부정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런 끔찍한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겠죠·”
딸을 키우는 아버지라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다·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몰라도 팬들은 모두 박수로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하하하하! 그럼 이번엔 나메님에게 물어볼게요· 나메님의 꿈은 분명 세계최강이라 되는 거라고 하셨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버님과 맞서 싸워야 하는 날이 온다면 이길 자신이 있나요?”
천교수와 나메의 팬들은 모두 귀를 기울여 그녀의 대답에 주목했다·
“굳이 사랑 때문이 아니더라도 몇 년 안에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나메는 핵심을 피해가는 대답을 하였다·
“크흠·”
하지만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은 천교수는 기침소리를 내고 목을 가다듬었다·
부녀지간에 미묘한 스파크가 튀었다·
“나메님은 정말 터무니없는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계시죠· 몇 달 전에는 아카데미 선배들도 모두 무찔렀고요·”
“그 정도는 쉬운 편이니까요·”
“하지만 아버님도 한국에서 정말 뛰어난 마도사였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승리까지 몇 년 예상하시나요?”
몇 살부터 싸워서 이길 것 같으냐·
나메는 천장을 보고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대로 폈다·
“길어봤자 4년?”
“4년! 아버님 오늘 일을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노나메님의 사춘기는 4년 뒤에 시작일 테니까요· 저도 아이들을 키워봐서 알지만 사춘기 정말 장난 아니에요···!”
마지막 말은 속삭이며 말했지만 마이크에 그대로 전달되어 울려퍼졌다·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4년 간은 부디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저희는 2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뭐가 좋아 하나도 좋은 게 없는데ㅋㅋㅋㅋㅋ
-나메의 사춘기는 초6부터 ㄷㄷ
-진지하게 고민하는 노나메 너무 귀엽다ㅎㅎ
* * *
캐넌 킹이 사회자를 맡다보니 팬미팅의 컨텐츠가 토크쇼처럼 되어버린 면이 있었다·
물 흐르듯 진행되는 분위기라서 시간이 훅훅 지나갔다·
이보름이 중간중간 요상한 아이템들을 가져와서 나에게 장착해주곤 했는데 하나같이 괴상한 물건들이었다·
예컨대 토끼귀 머리띠라든지 분홍색 요술봉이라든지·
“이거 한번 휘둘러주면 안 돼?”
“어떻게?”
“으음··· 완드 쓰듯이?”
“너무 포괄적인 주문인데· 일단 알겠어·”
마법소녀 요술봉을 치켜들고 대충 라이트 회로술식의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찰칵찰칵-
그랬더니 돌아온 건 팬들의 끊이지 않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였다·
“으읏 내 눈!”
마나를 불어넣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빛이 튀어나오다니· 진짜 요술봉이 따로없네·
곧 있을 사인회를 준비하며 목을 축이기 위해 500밀리 생수병을 집었다·
“잠깐만 나메야 여기 빨대 준비했어!”
“나 혼자 마시는 거라서 빨대 안 필요해·”
“아냐 원래 팬미팅 때 물은 빨대로 마셔야한댔어!”
“왜?”
“그건 나도 몰라!”
무언가 심오한 이유가 있을 텐데 관습처럼 굳어진 경우인가?
친절하게도 이보름은 펀치드링크로 뚜껑에 구멍을 뚫어주기까지 했다·
“자·”
“고마워·”
날 너무 아기처럼 대해주네· 5살한테도 이렇게 오냐오냐 키우지는 않겠다·
그리고 방금 막 빨대로 마시는 이유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대충 입술 화장이 번지면 안 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나한테는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으니 빨대를 입으로 앙 물었다·
쬬옵-
“···?”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풉· 콜록!”
부담스러운 카메라 셔터음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너무 한번에 많이 찍으시는 거 아니에요?”
“나메가 귀여우니까!”
“물 마시는 것도 귀여워!”
주접성 멘트들을 실제로 들을 줄이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이크를 들고 팬싸인회의 시작을 알렸다·
“한 분씩 앞으로 나와주시면 됩니다·”
112명을 두 시간 안에 모두 만나보려면 한 명당 1분 밖에 시간을 쏟지 못한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싸인해주는 시간조차 아깝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싸인을 도장처럼 찍어내자니 성의가 없어보인다·
그래서 내세운 대책이 이거였다·
“안녕하세요·”
“제가 첫빠따네요! 아 저 여기 종이에 싸인 부탁드립니다!”
[시전: 좌표 동기화]
먼저 마커펜의 촉과 마법진의 좌표를 동기화시킨다·
내가 손가락으로 마법진을 조절해 종이 위에 마나를 흩뿌리면 검은 잉크가 마나로 이루어진 실을 타고 그대로 종이에 흡수된다·
손은 눈보다 빠르지만 뇌보다 빠를 수는 없으니까·
마법진을 작성하는 속도 단 1초만에 고양이 싸인이 완성되었다·
“헐 이거 뭐예요? 마법이에요? 나메님 싸인 너무 귀여워요!”
“네 좌표 동기화 마법을 조금 고쳐서 써봤어요·”
“너무 다재다능하다! 아 맞아 저 이거 나메님 드리려고 선물 사 왔어요· 짜잔 홍삼 세트!”
“홍삼?”
“방송 많이 하려면 일단 건강해져야 하니까요!”
“너무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선물 공세는 그 뒤로도 끊이지 않았다·
“이건 명품 아닌가요? 몇 년 뒤에는 작아서 못 입을 텐데···”
“네? 나메님은 영원히 안 자랄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악담을···?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이런 명품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아요! 백만원 도네라고 생각하고 받아줘요 네?”
커다란 명품 로고가 박혀있는 티셔츠를 선물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분들 선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받아주시면 좋겠어요···!”
“언니가 직접 뜨개질로 만드신 거예요? 와 너무 멋져요· 겨울마다 잘 쓸게요·”
“네! 아 그리고··· 그··· 한번 안아봐도··· 폴링 가이즈 때···”
“저격러?”
“네흫·”
“뭐 약속이니까· 자 안아요·”
따뜻한 모닥불을 연상하는 색감의 털장갑도 받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팬은 마지막 순번으로 온 사람이었다·
천교수보다도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오셨다·
살짝 굽은 등과 손에 쥔 지팡이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정중하게 그녀를 모시고 의자를 꺼내주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따로 가져오신 거 없으시면 저희가 준비한 종이에 싸인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아유 싹싹하기도 해라· 고마워요 나메 양·”
[시전: 좌표 동기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 말구·”
“예?”
“우리 손자 주려고 왔어요· 권준우· 울 준우가 나메 양 방송을 참 좋아해·”
“아 대신 오신 거였구나· 그 분한테도 제 방송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주세요· 싸인은 여기 있습니다·”
잠깐 침묵에 빠진 할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이를 쓰다듬었다·
“우리 준우가 어릴 때부터 조금 몸이 아팠거든요·”
“그래요? 어디가 아팠어요?”
“의사가 백혈병이래·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
“아아···”
할머니는 손자의 정확한 병명을 읊으셨다·
의사에게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한 토씨도 안 틀리고 또박또박 말씀하실까·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 병에 대해서만큼은 해박해진다는 게 참으로 슬픈 사실이었다·
“고놈의 재발 때문에 준우가 작년에 또 입원을 해야만 했어요· 애 부모는 밤늦게까지 돈 벌어오랴 준우 동생들 챙기랴 바쁘니까 나라도 옆에 있어줘야지· 중학교 하나 제대로 못 다녀보고 졸업한 게 참 안타까워·”
“할머니도 손자분도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런데 작년에 애가 나메 양 방송을 보고 기운을 많이 차렸어요· 별 감정도 없던 애가 방송 보더니 막 어느 날은 펑펑 울고 어느 날은 깔깔 웃어대고 미친놈처럼 침대를 구르더라니까? 나중에 나메 양을 만나는 게 자기 버킷 리스트래요·”
“팬미팅을 언제 한번 크게 열어드릴게요· 모두 참여할 수 있게·”
“말도 참 이뻐라··· 울 손자가 그러는데 나메 양이 잘 됐으면 좋겠대· 아팠던 만큼 행복해져야 하는 게 하늘의 이치라고 나메 양이 평생 행복해져서 그걸 증명했으면 했다네· 아무튼 우리 준우 힘이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이 말만 하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길게 말했지?”
“아녜요· 저야 말로 고맙죠···”
나는 그 위에 내 손을 포개어 잡아주었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가 될 것 같은 순간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이 아직 낯설기만 하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쉬고 할머니가 가시기 전에 말했다·
“이따가 팬미팅 끝나고 손자분이랑 영상통화해도 괜찮을까요?”
* * *
영롱한 석양빛이 눈으로 뒤덮인 도로를 붉게 적셨다·
병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동화처럼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저 석양이 사그라드는 성냥개비처럼 보여 울적해지기도 했다·
똑· 똑-
중간에 끊어지는 노크소리는 할머니의 것이다·
권준우는 침대 등받이를 조절해 일어났다·
“다녀오셨어요 할머니!”
“준우 넌 언제 나을래· 할미가 이 나이 먹을 때까지 고생이나 시키고 말이야·”
“싸인 받아오셨어요? 나메가 뭐래요? 제가 옛날에 병원에서 나메 봤다는 거 이야기 하셨어요?”
“응? 준우 네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냐?”
“할머니 제가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참!”
“그건 잘 모르겠고· 옛다 애가 참 이쁘고 싹싹하더라·”
“나메는 천재예요 천재· 나중에 이런 싸인 하나하나가 몇백만 원 몇천만 원이 될지 누가 알아요? 물론 난 죽어도 안 팔 거지만·”
“할미는 그만 가보련다· 전화 오면 꼭 잘 받고·”
“헿 싸인이당 헤헿· 네? 무슨 전화요?”
오늘따라 무심한 듯 보이는 할머니의 태도에 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인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한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을까 고민한다·
어느덧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홀로 남겨진 병실 안에서
♪♫♪♬~
을씨년스러운 시간대에 뜬금없이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010-XXXX-XXXX]
“스팸은 아닌데? 뭐지?”
그것도 영상통화로·
영상통화까지 할 만큼 친한 친구가 없던 권준우다·
그의 엄지는 방향을 잃은 채 한참동안 헤매다가 할머니가 한 말씀을 떠올리고 수락 버튼을 눌렀다·
“허억!”
준우는 화면에 비친 인물을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폰을 떨어뜨렸다·
‘신종 보이스피싱? 그럴 리가 없잖아!’
새하얀 이불 위에 엎어진 폰을 슬며시 들어올려보았다·
준우가 본 건 틀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권준우님·]
살짝 나른한 목소리 고양이처럼 똘망거리는 눈 무엇보다 팬미팅에서 입었던 것과 동일한 의상까지·
“아니··· 어떻게···?”
영상통화를 건넨 사람은 놀랍게도 본인이 그토록 숭배해 마지않던 우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트위시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 노네임 본명은 노나메라고 합니다·]
“아아···”
밤과 새벽이 오는 이유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함이리라·
지금 이 순간 권준우의 마음 속에서는 또 하나의 태양이 높이 떠올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익명의 후원자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항상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저야말로 너무 감사드립니다!! 환절기에 건강 잘 챙기시고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알빠노혹등고래님 1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3주까지 도장쾅!! 꾸준하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권준우는 ‘에피소드 165 – 소문을 낚는 어부’에서 짤막하게 등장했답니다··!!
채팅창 댓글에서 보이는 활자들도 모두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며 이 또한 하나의 소중한 인연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에피소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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