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6
깨달음의 본질은 망각과 내재화의 반복이다·
일순간 깨달음의 섬광이 번뜩여 머릿속 전구에 불빛이 들어오는 게 아니다·
‘procrastination’이라는 단어는 당장 내일 까먹을 수 있어도 ‘apple’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단어가 내포하는 순수형상이 뇌에 뚜렷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선종 불교에서는 아예 ‘돈오점수’라고 명칭까지 붙여 일시적 깨우침과 반복적인 실천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선조들의 덕목을 귀담아듣고 한 달 동안 스파르타 훈련을 인내한 카츠하타 에미카에게도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어··· 언제부터?”
에미카의 검끝에서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
오랜 겨울을 인고하여 틔워낸 분홍빛 잎사귀·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에미카는 아주 조심스럽게 검을 앞으로 가져왔다·
일렁이는 오러를 관찰하는 눈동자가 벚꽃모양으로 반짝였다·
“괜찮아· 그렇게 쉽게 안 없어져·”
나는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이게 정말로 내 오러야?”
에미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전부터 조짐은 보였어· 그걸 자각한 게 오늘이었을 뿐이지·”
깨달음이 연속선상의 과정이듯 외적발현도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만 보일 수도 있고 타인의 눈에만 보일 수도 있으며 보이지는 않아도 느낄 수는 있는 오러도 얼마든지 구현이 가능했다·
하지만 시각적인 정보는 언제나 인간에게 강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법이었다·
“드디어 해냈네 축하해·”
“으으···! 아아아아! 나메야 나 성공했어!”
에미카가 나를 부둥켜 안고 이리저리 마구 흔들었다·
“알겠으니까 내려주고-”
“우아아아아! 오러! 오러라구! 오러야! 오러를 꺼낼 수 있게 됐어! 스승님 당주님! 제가 해냈다고요!”
“으으윽·”
멀미할 것 같아·
평소에 무뚝뚝하던 에미카도 오늘만큼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보였다·
그녀는 카츠하타 유파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맨발로 뛰쳐나갔다·
“아얏아얏!”
발바닥 지압길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나 좋을까·
“그게 정말이야? 외적발현을 해냈어?”
“나메 거랑 착각한 게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을 비롯하여 하얀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대련장으로 모였다·
“네! 확실하게 제 오러였어요! 분홍색··· 분홍색 벚꽃잎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에미카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당주는 업무 때문에 부재 중이었고 스승인 고이즈미 요시히로가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저번처럼 거짓말로 고했다가는 크게 혼이 날 줄을 알아라·”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스승님···!”
에미카가 내 수업을 받기 싫어서 꾀병을 부린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적당한 바위 위에 올라가 에미카의 시연을 찬찬히 감상하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에미카가 눈을 감고 검무를 추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인간 그리고 도검·
그녀는 검을 높이 태양에 닿을 듯 아주 높이 치켜들었다·
오러하트에서 가느다란 실들이 빠져나와 주변으로 넘실넘실 퍼졌다·
하늘에서는 자연의 정기를 땅에서는 생명의 양분을 얻어 비로소 개화한 에미카의 오러·
“오오오!”
“이건 벚꽃?”
선명한 분홍빛 오러 꽃잎들이 차가운 금속에 닿아 녹아내린다·
은백색의 검날이 점점 봄의 색깔로 물들었다·
“마치 신선이 된 것 같구나!”
카츠하타 유파의 모든 무학은 도가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스승의 입에서 최고의 극찬이 나왔다는 사실에 에미카도 방긋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어라 아가씨의 검이···?”
백화난만(百花爛漫)·
꽃잎들은 정도를 모르고 만개하여 휘날린다·
검은 점점 선홍빛으로 변하다가 이제는 새빨간 장미의 색으로 변했다·
나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관조했다·
에미카의 심상세계에서 꽃잎이 떨어지면 거름이 되지 않는다·
‘대신 열에너지로 변하는 모양이야·’
우우웅-
화염꽃이 폭발하듯 피어오르다가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그리하여 탄생한 건 경계층을 알 수 없는 붉은 광선검이었다·
오러의 잔여물이 불씨의 형태로 타닥타닥 튀자 바닥에 심어놓은 푸른 잔디가 검게 변했다·
끔찍한 자연파괴적인 행태에 고이즈미 요시히로가 고함을 질렀다·
“에미카 이게 대체 뭐란 말이더냐!”
“네? 왜 그러시는 우아앗 이거 뭐야!”
눈을 뜬 에미카는 작열하는 광선검을 목격하고는 검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오러로 만들어낸 검이라 불이 옮겨붙지는 않았지만 광선검은 모양 그대로 잿빛의 그을음을 만들어냈다·
“그래 이상하다 했어· 광선검이 나와야 하는데 뜬금없이 웬 꽃잎이 나오나 했네·”
그 뒤로 에미카는 몇 번이나 외적발현을 시전해보았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매번 벚꽃은 점화원이 되어 장렬하게 산화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에미카를 불렀다·
“에미카 손바닥에서 오러검을 뽑아내봐· 이미지는 대충 손에 쥐고 있는 밀가루 반죽을 길게 뽑아내는 느낌으로 잡으면 돼·”
에미카는 비어있는 다른 손으로 붉은 오러를 뽑아냈다·
실오라기 따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제대로 형태가 잡혀있는 검이었다·
“사술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게 오러란 말이더냐!”
“이 기회에 아데라도 한번 써볼래? 아 마왕의 뿔은 내가 대신 써줄게·”
“지금? 여기서?”
“다같이 모여있을 때 보여줘야지· 뭘 위해서 언니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했는데·”
[간이시전: 마왕의 뿔]
에미카의 가지런한 머리 사이로 한 쌍의 뭉툭한 남청색 뿔을 달아주었다·
“저기 나메야 이렇게까지 하니까 조금···”
에미카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새하얀 도복 양손에는 붉은 광선검 머리에는 오니의 뿔까지·
그녀는 당장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에미카는 곧바로 마법진을 그렸다·
수치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회로술식을 그리는 손길이 무척이나 성급했다·
[시전: 아데라]
그녀는 허수아비를 향해 톱니바퀴를 날려 목표물을 고정시켰다·
우웅-!
붉은 광선검이 회전하는 마법진을 꿰뚫는다·
치명적인 칼날이 마법진에 차례차례 각인된다·
마립자끼리 공명하며 마법진까지 덩달아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고유마도 – アデラ]
[10연(連)]
[파(破)]
쿠과광-!
고유마도 아데라는 물리적 충격을 중첩하여 전달한다·
하지만 물리적 충격이 마립자로부터 비롯된 거라면?
클레멘즈 정리에 따르면 마립자의 파장은 마나와 오러의 합성곱으로 표현될 수 있고 오러의 초기 특성값 또한 그대로 유지된다·
만약 오러가 폭발하면 고유마도 또한 같이 폭발할 것이며 오러가 극저온의 속성을 띄고 있으면 고유마도 또한 상대를 꽁꽁 얼릴 것이다·
“허어! 말도 안 되는 위력이야·”
등가온도 5000도에 달하는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방마나 처리된 허수아비는 형체도 알아보지 못 할만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허억··· 헉···”
에미카가 숨을 헐떡였다·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다·
“위력에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고유마도를 시전한 후 광선검은 곧바로 사라졌다·
외적발현을 오래 유지하는 것도 아직은 어렵겠지·
에미카가 주르륵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소감을 밝혔다·
“검과 함께라면 검술이고 검술과 함께라면 검이라· 나메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었는지 이제 이해한 것 같아·”
“그래? 무슨 뜻인 것 같은데?”
“이런 게 검이 아니면 너무 아깝고 이런 게 검술이 아니면 너무 아쉽잖아· 아니야?”
되묻는 에미카에게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정답이야 카츠하타 에미카·”
* * *
[한국 전지훈련 마친 카츠하타 유파 귀국 | 카츠하타 에미카 국가교류전 대표단 합류]
[고금제일의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환생했나· 카츠하타 에미카 전지훈련서 오러의 외적발현 성공해·]
[포토뉴스) 팬들의 마음을 훔친 오니족 미소녀(+21)]
일본 국민들은 에미카에게 주목했다·
일본 열도 제일의 귀재라고 평가받던 소녀는 세계무대에서 큰 좌절을 겪었다·
몇몇 악플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에미카가 소년만화 클리셰처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이후에 배로 갚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째서 한국인가· 카츠하타 유파는 자존심마저 버리기로 한 건가?’
그러나 에미카가 오른 경지는 숱한 논란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오니의 뿔이 달린 예쁜 미소녀가 하얀 도복을 휘날리며 스X워즈에 나오는 광선검을 휘두르는 걸 다음 달 도쿄 스타디움에서 볼 수 있다고?’
욕이 나오려다가도 도로 들어가지는 대목이다·
국가교류전이 한 달 남은 시점 카츠하타 유파는 모든 훈련을 끝마치고 공개석상에 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입니다· 우승 말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국가교류전에서 왜 일본이 세계제일인지 가감 없이 보여드리고 오겠습니다·”
에미카의 발언은 세계로부터 조롱을 받았던 일본인들의 자존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누구와 가장 겨뤄보고 싶냐는 질문에 에미카는 작게 웃었다·
“올해는 잘 모르겠고 내년 프랑스 파리교류전에서 노나메와 만나서 겨뤄볼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눈부시게 빛나는 재능을 한번이라도 본 자들은 모두 저와 한마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미카의 돌발적인 샤라웃에 전 세계에서 수천건의 기사가 작성되었다·
가장 신나서 날 뛴 건 한국의 네티즌들이었다·
* * *
[10살이 되면 만나자! 일본 천재검성의 화제 인터뷰!]
“얘 좀 봐라· 아직은 지가 나이 차이로 날 찍어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지?”
나는 시큰둥하게 뉴스를 보면서 방금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델라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그녀는 삶은 계란을 반으로 가르지도 않고 통째로 입에 넣었다·
“음냠냠· 이게 다 언니한테 대가리가 안 깨져봐서 그래· 저렇게 말해놓고 내년에 안 나오는 거 아니야?”
“아 꼬리 좀 치워봐· 굳이 오러까지 쓰면서 방해할래 계속?”
“난 이게 편하다구요! 일평생을 꼬리를 달고 살았는데 없는 게 이상하지!”
“일평생이라고 해봤자 기억은 몇 달치밖에 없었으면서·”
“나한테는 그게 평생이야! 그리고 외적발현 그게 뭐가 대수라고 참· 이렇게 쉬운 걸·”
아델라는 대뜸 꼬리로 저글링을 하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그래 세상이 이렇게나 불공평한데 뭐 어쩌겠어·
“자 이제 가자·”
“근데 그 재벌 매니저 정상인 사람은 맞지?”
“아 지하주차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네· 차 보내준대·”
“막 고양이 귀를 보면 흥분한다던가 꼬리를 맛보려는 그런 이상한 페티쉬는 없는 거 정말 확실하지?”
“그건 왜?”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래· 그 인간 닉네임도 좀 아니 많이 이상하잖아!”
나는 아델라를 직접 만나게 해주겠다는 매니저 이보름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왕이면 가는 김에 빚도 한 5천만원 정도 깎아주었으면 좋겠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익명의 후원자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예수가 엄청 강했던 건 맞지만 조직의 마피아는 아니었답니다!!
랩노예3841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131동에서 연구하시는 분이 봐주고 계셨다니 영광입니다!! 작가는 아직 배움이 짧은 학부생일뿐더러 이쪽 관련 전공자도 아닌지라 사실 저도 나메가 장황하게 말할 때 모르는 내용이 꽤 많습니다!!
인터넷혼령님 7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나메 크레페 엄청나게 많이많이 사다주겠습니다!! 나메 볼따구가 빵빵해질 때까지!!
드디어 ‘고양이교미가제일좋아’와 아델라의 만남 성사!!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