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하늘 위 태양을 뚫을 듯 높게 솟아 있는 백색의 탑·
구름으로 뒤덮인 백색의 탑 아래에는 새하얀 깃털 날개가 등에 달린 3m 장신의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저마다 달랐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 일렁이는 탐욕만큼은 모두가 같았다·
그중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인이 목소리를 높여 기쁨을 표했다·
“주신 크리엘라께서 저희 천족을 어여삐 여기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하하하·”
중년인이 웃음에 따라 등에 달린 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기쁨을 알렸다· 그의 곁에 선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참으로 기묘한 생물입니다· 이성도 없는 미물에 불과하다고 하나 이토록 경이로운 생명체는 처음 봅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대천사들께서 모이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어찌나 질기고 튼튼하던지 보는 제가 긴장되더군요·”
“하하· 위대한 대천사님들께서 자리해 계시는데 긴장하다니요· 농담도 심하십니다·”
그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중앙엔 2m가 되지 않는 인간 형태의 괴생명체가 쓰러져 있었다· 인간 형태라고는 하지만 팔다리가 제대로 달리지 않았고 이목구비가 뒤섞여 있어 결코 인간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생명체가 진작 나타났더라면 굳이 중간계의 인류를 제물로 바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제 제물로 바칠 인간도 남지 않았는데 주신께서도 저희를 안타까이 여겨 제물로 쓸 선물을 내려보내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주신의 뜻입니다·”
“여기 있는 한 마리만으로도 저희 모두의 수명 10년 정도는 늘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대해봄 직합니다· 인간 놈들은 너무 허약해 빠져 효율이 영 안 나왔어요· 차라리 마족 놈들이 있을 때가 나았습니다·”
“맞아요· 인간 따위는 시끄럽기만 하지 그냥 멸절시키는 게 훨씬 나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좋은 일도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최근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군요· 상계의 통로라는 ‘천국의 계단’에 대한 단서도 얻고 이런 선물도 떨어지고요·”
그들은 최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주신이 계신 천상의 문과 연결되었다고 알려진 천국의 계단·
상계로 향하는 통로라고 예측되는 곳을 향해 천족 전체가 힘을 모아 신성 주문을 쏘아 보냈다·
효과가 있긴 했는지 하늘에서 균열이 일며 생명체 하나가 떨어졌고 그 생명체는 막대한 기운을 갖고 있었다·
‘정말··· 언젠가는··· 신을 제물로 삼아 영생도 가능하지 않을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모두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면 확실했다·
천족의 제단·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높은 백색의 탑 아래에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천족의 제단은 제물에 따라 천족 전체의 힘과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성유물이다·
천족은 이 제단 덕분에 결국 세계의 모든 종족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종족을 제물로 바쳐 이제는 이성도 없는 짐승들밖에 남지 않아 더는 바칠 제물도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 주신의 인도 아래 새로운 제물이 손에 떨어졌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필 왜 마지막 그놈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천국의 계단’의 단서를 찾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도 어떤 대천사께서 죄수 놈을 직접 구경하러 갔다가 운 좋게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주신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야·’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천상계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유물인 천족의 제단만 있다면 그 무엇이든 무섭지 않다· 천상계라 불리는 상계 또한 그들의 발밑에 무릎을 꿇으리라!
그것이 신이든 무엇이든·
어쩌면 주신마저도 그들의 위세에 겁을 집어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백색 첨탑의 꼭대기·
하얀빛의 신성력이 문자를 이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방 안·
중앙에는 산발머리에 처참한 몰골을 한 사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양팔이 들려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쇠사슬은 그의 심장과 사지에 연결되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사내의 등과 어깻죽지에 솜털처럼 짧은 깃털이 몇 개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천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허나 천족의 피가 옅어 하늘 아래 지상으로 추방된 죄수·
그리고 천족을 상대로 끝까지 항전했던 인류 최후의 용사·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인 그는 시력마저 잃어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인간보다는 조금 더 묵직한 발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인간의 특성은 참으로 귀찮기 그지없군· 이런 유기물 따위를 먹어야 살 수 있는 하찮은 종족이라니·”
목소리와 함께 간수인 하급 천족이 방으로 들어섰다·
퍽-
“크흡! 컥! 읍!”
하급 천족은 그릇째로 그의 얼굴에 처박아 입으로 음식물을 강제로 먹였다· 그의 얼굴에서 꾸덕꾸덕하고 퀴퀴한 죽이 얼굴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음식이라고 해봤자 짐승을 통째로 넣고 대충 끓인 죽이었다· 그것마저도 귀찮다고 이것저것 넣어 대충 한 번 끓여두고 한 달을 먹여댔다·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으려 저항했지만 하급 천사의 신성력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우우웅-
꿀럭- 꿀럭-
“끄윽····”
“하···· 귀찮게 저항하지 마라· 어차피 넌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걸 알잖나?”
방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신성력의 문자들이 아무런 힘도 남지 않은 그의 생명을 억지로 늘리고 있었다·
그의 피에 옅게 남은 천족의 피로 신성력이 강제로 주입되었다· 제단에서 내려온 힘과 함께 그의 목숨줄을 붙들고 있는 신성 주문이었다·
천족은 축복이니 뭐니 떠들어댔지만 그에게는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저주에 불과했다·
아··· 신이시여·
정녕 이들의 악행을 두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나이까?
사내의 초점 잃은 두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그의 어머니 또한 천족이었기에 종족 자체를 미워할 수 없음이라·
공존과 화합을 죽을 때까지 외쳤던 어머니의 뜻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저 천족이 행한 과오를 안타까히 여길 뿐·
오히려 그들의 악행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에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신의 사도라 불리는 천족·
인류는 그간 천족을 숭배하며 충성을 아끼지 않았다· 마족을 무찌르고 마족의 하수인이라는 이종족들을 학살하던 인류는 천족의 선봉이자 창이었다·
이종족의 무의미한 학살을 막기 위해 인류에 대항해 검을 든 그였지만 인류의 용사라 불리게 된 이유도 존재했다·
이종족이 패배 후 천족이 늘 입에 담았던 구원의 날이 다가오고 천족이 인류를 배반해 칼끝을 돌렸을 때·
그는 살아남은 인류와 몇 남지 않은 이종족을 위해 검을 고쳐 쥐었다·
생명은 존재만으로도 옳다·
생명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는 검을 들어 천족을 겨눴다·
허나 이종족과 인류 태반을 집어 먹고 강해진 천족을 혼자서는 대적할 수 없었다·
깊은 후회가 담긴 회상을 하던 그가 하급 천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혹시 그때 일을 기억하나? 그땐 시끄러운 너의 입도 조용했었는데 말이지·”
“회개··· 하라· 구원은··· 사사로이 너희를 가리지··· 않으리라····”
히죽-
하급 천족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며 소름끼치는 미소를 만들어냈다·
“····”
그 미소에 최후의 용사이자 천족과 인간의 혼혈인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문을 위해 그의 지인을 하나씩 데려와 그의 앞에서 고문 후 잔인하게 죽인 녀석이었다·
-여보 나는 괜찮아· 내세에는 우리 같이····
-꺄아아아악!
인류에 대적할 때도 천족에 대항할 때도 변치 않고 곁에 남아줬던 그의 아내가·
-힘··· 내라· 무너지지··· 말고·
-끄아아악!
인간에 의해 부모를 잃은 수인이었지만 화합과 평화라는 그의 신념에 함께 했던 전우가·
-크하악!
-너는 저따위 놈들과는 달라! 그러니 자책하지···
-쿨럭·
조금이라도 연이 있던 모두가 그의 눈앞에서 숨을 거뒀다·
아직도 그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고마워하거라· 귀찮음을 감수하고 우리가 너를 살려주는 이유는 ‘천국의 계단’ 때문이니·”
역시··· 그런가·
용사는 천족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눈앞에 글자가 떠오르며 무언가와 연결되었고 그로 인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에 감사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처지가 ‘생포’이자 ‘실험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첨탑에 갇혀 모종의 실험을 당하며 끝내 목숨을 끊지 못했다· 끊을 수가 없었다· 천족의 축복이라는 저주 때문에·
천족의 실험과 고문에 의해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는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는지 되돌아보고 있었다·
천추의 한이자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그의 고민이었다·
그렇다면 최소 이러한 꼴은 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악마보다도 더욱 악마 같은 천족의 추악함을 모른 채 눈을 감았을지언데·
죽음마저도 모독하는 그들의 행태가 실로 비탄스러웠다·
“그래도 네놈 덕분에 상계에 대한 단서를 찾게 되었으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주지·”
평소엔 강제로 식사를 당한 뒤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당하곤 했었다·
“신··· 이시여·”
신을 입에 올리지만 더는 가슴이 울리지 않았다· 이제는 그도 알고 있는 탓이다·
이 세계에 구원 따위는 없음을·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용광로 같은 어둡고 질척한 감정이 용솟음쳤다·
구원?
무엇이 구원일까·
목숨?
필요 없다·
타락한 천족 외에 모두가 죽어버린 이 세상에 살아남을 이유 따위가 어디 있는가? 지킬 것이 없는 세상에 홀로 남아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이미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아니야· 차라리····
그는 자신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느꼈다·
오랜 기간의 고된 고문과 실험에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였다·
가슴 깊숙한 곳에선 저들의 날개를 뜯어버리고 사지를 찢어줄 존재를 진심으로 바랄지도 몰랐다·
천족만이 남은 이따위 세상·
차라리····
그도 모르게 염원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그의 시야로 무언가가 비쳤다·
흐릿한 시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구름의 색깔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구체? 아니 폭발?
태양이 폭발하면 저러할까?
그가 있는 백탑의 첨탑 꼭대기에서부터 시작된 강렬한 빛이 지평선 끝까지 뻗어나가 하늘을 뒤덮었다· 붉게 물든 하늘이 일렁거리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아···!
이윽고 빛무리로 가득 메운 하늘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며 ‘그것’이 시작되었다·
그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회개하라·
구원은 사사로이 너희를 가리지 않으리라·
그때에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다면 진정한 구원이 내려오리라·
만일 스스로의 부정과 우매함을 깨닫지 아니한다면 진리에 말미암아 추악을 비추는 심판의 불꽃이 찾아오리라·
그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천족들의 끔찍한 단말마가 울려 퍼진다· 공포에 질린 절규와 경악 가득한 비명이 찬송가처럼 울려 퍼진다·
세계가 부서져 간다·
그리고 그 무렵·
어떤 거대한 존재가 천족에 변고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분노를 토해내 하늘을 진동시켰고
차원 통합 커뮤니티에는 주딱의 공지사항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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