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
제국을 멸망시킨 ‘붉은악마’ 비르델이 눈을 감았다·
‘이 정도로는 닿을 수 없겠지·’
그녀가 자세를 잡고 몸을 낮췄다·
스아아-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
바람 소리만이 간간이 그녀를 찾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스아아-
작은 무덤 앞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터에 소녀 비르델이 검을 쥔 채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하체는 묘하게 이질적인 검붉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채였고 상의는 평범한 셔츠를 입은 소녀였다·
소녀는 왼손으로 검집을 잡고 오른손으로 검을 잡은 채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이 튀어나올 듯했다·
한 치의 움직임도 없건만 어찌나 생생한지 소녀의 앞을 향해 떨어지던 낙엽이 칼에 잘린 듯 반으로 쪼개지며 흩어졌다·
마나도 오러의 낌새도 전혀 느끼지 못했건만·
해가 뜨고 중천에 걸렸다가 다시 해가 지는 동안에도 소녀는 석상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해가 달을 피해 서산 밑으로 숨어든 순간·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가 눈을 떴다·
“하아···· 결국 베지 못했어·”
자조 어린 목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쳤다·
돌아서는 그녀의 뒤로는 허공이 물결치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 정도로는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지 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씁쓸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며칠 전을 떠올렸다·
[관리자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아··· 히드라로는 어림도 없겠다· 애초에 전투 슈트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방법이 없을까요?”
[관리자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글쎄··· 뭐··· 네가 차원을 벨 정도가 되면 가능하려나?ㅎㅎ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관리자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응? 아ㅋㅋ 너무 신경 쓰지 마·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지금도 연구하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칼슈타인은 위로차 반쯤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반드시 차원을 벤다·’
그녀는 얼른 그를 만나고 싶었다·
진공참을 넘어 차원참을 성공해 보이리라·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이번에 주딱의 부름에 선출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분한 그녀였다·
다음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
케이샤는 영혼이 빨린 얼굴을 하고 안마의자에 털썩 몸을 눕혔다·
“으윽!”
안마의자로도 심신이 안정되질 않았다·
“황태자··· 이 개자식! 내 반드시 이 치욕을···!”
그녀는 그날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데브라인을 암살(?)한 후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그녀를 보며 형용 못할 표정을 짓던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도? 동경? 두려움? 안쓰러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황태자를 보며 그녀 스스로의 행동을 돌이켜봤다·
‘둘도 없는 미친년···!’
이상한 복장을 하고 말도 안 되는 이적을 선보이고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였다·
더는 안 된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해명하려고 했다·
그간 정신병자로 보일까 싶어 말하지 않았던 [차원 통합 커뮤니티]마저 털어놓으려 했다·
그러면 이 괴상한 옷차림과 요술봉에 대한 해명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관리자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응? 마법소녀는 비밀이 국룰이라구~!
“뭣?”
지금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관리자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비밀을 들킬 시 영구 차단ㅎㅎ
“···이 익!”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여자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이불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찢어발겼을 흑역사였다·
그에 황태자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신화시대의 부활을 널리 알려라! 7천년 만에 성녀가 탄생했다!!”
황태자가 그녀만 보이게끔 눈을 찡긋거리며 희대의 개소리를 시전했다·
“두 눈으로 보아라!! 간악한 외계종을 물리치며 보인 이적을!”
황궁 깊숙한 지하에서부터 하늘까지 뻥 뚫린 거대한 구멍은 황태자의 말에 신빙성을 아주 약간이나마 보태주었다·
사실 이 자리로 몰려온 고위직과 마법사들은 조금 전 하늘을 꿰뚫던 섬광이 심상치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설의 9서클이라면 가능할까?
그녀가 뒤늦게 들은 황태자의 말에 따르면 그 녀석의 죽음으로 생겨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라고·
‘분명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이참에 마나 오염이 해결되면 그 공을 돌릴 영웅 하나가 필요하기도 했다고·
그녀가 듣기엔 영 헛소리만 지껄인 황태자였다·
하필 또 그때 누군가 데브라인의 죽음에 미쳐 날뛴 것이 그녀에게는 불행이었다·
“다음 차례는 내 수명을 늘려주기로 했단 말이다!!”
눈이 뒤집힌 대신 중 하나가 기습적인 마법을 날렸다· 6서클의 마법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연구원인지라 마법 경지가 한참이나 낮았다· 더욱이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방비할 틈이 없었다·
허나·
퍼엉-
그녀의 주위로 둥근 막이 펼쳐지며 6서클의 마법을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동시에 그녀의 의상에서 번쩍 빛이 반짝이더니 휘황찬란한 이펙트를 뿌려댔다·
‘아····’
그렇게 어영부영 상황을 수습하고 두문불출하길 며칠·
갑작스레 등장한 황태자가 선물이라며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황궁 앞에 떡하니 전시된 동상을 보고는 기함하는 줄 알았다·
털썩-
샤랄라 의상을 입은 그녀가 입에서 브레스를 뿜고 있는 석상이었다·
이미 재가 되어 사라진 마법봉을 본 사람은 황태자와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황태자의 표정을 보곤 확신할 수 있었다·
‘이 X끼 나를 놀리려고···!’
만약 그녀에게 마법봉의 횟수가 하나만 더 남아있었어도 반드시 저 자식을 향해 사용했으리라!
그렇게 그녀가 이를 갈며 주딱과 황태자를 곱씹으며 대륙을 안정화시키던 중·
어느 날 대륙 모든 사람들의 눈으로 같은 화면이 동시에 송출되었다·
“!!”
그녀는 직감적으로 데브라의 짓임을 알아차렸다·
“벌써?! 하필 지금···!”
현재 주딱은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거라고 말해둔 상황·
치치직- 삐빅-
네모난 화면 속엔 군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푸른 피부의 데브라인이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등하고 열등한 미개인들이여· 현 시간부로 ‘소각’을 시작하겠다·
장교 데브라인의 얼굴에는 이전에 죽였던 데브라인 이상의 우월감이 담겨 있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은 종족을 불문하고 알아차릴 정도·
-어리석은 너희의 죄를 심판하러 왔노라· 감히 선량한 데브라인을 건드린 죄·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지어다· 그러니 얌전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담담히 통보하는 장교의 낯빛에선 한 치의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하는 듯·
케이샤는 이를 악물며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
데브라인의 장교는 영상을 송출하면서도 내심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일반 탐사병이라 하나 탐사선과 기본적인 장비가 지급된다· 이런 미개한 곳에서 죽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미 목표 행성을 전반적으로 정찰한 뒤다· 탐사병을 위협할 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적합 행성에서 소각을 진행하며 데이터를 수집했던 만큼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고작 탐사병 하나일 뿐이다·
‘어차피 족치다 보면 알아서 기어 나올 테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이미 본대의 승인까지 받아뒀다·
이제 어리석은 미개인들에게 정화의 포격을 하사할 차례·
그때·
“함대장님· 고등급 에너지원이 검출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미 탐색은 완료하지 않았나?”
“그 그게···!”
“탐사병이 모아둔 에타르 외엔 딱히 없을 텐데? 보고가 잘못된 건지····”
정찰 함대를 맡은 함대장은 부관이 건넨 데이터를 건네받았다·
“고순도 에타르? 아니··· 이건··· 에타르가 아니야· 에타르도 이 정도까지는 되지 못해· 에타르보다도 월등한····”
“추정치만 해도 중대 단위 전함 부대를 모두 합친 것 이상입니다! 게다가···!”
함대장은 부관이 전해준 자료를 보며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정말인가? ”
“예·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밀집된 고에너지 반응입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안정될 수 있단 말인가?”
“저희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함대장은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부관! 총사령관님께 통신을 넣게·”
“예! 알겠습니다·”
“하하! 어쩌면 에타르보다도 우수한 에너지원일지도 몰라!”
“그 그렇다면···!”
“위대한 발견이네! 반드시 확보해야 해! 본대에 연락을 넣게!”
함대장은 기쁨에 겨운 비명을 지르려다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삐빅-
“총사령관님· 정찰 함대를 맡고 있는····”
이어지는 함대장의 보고에 총사령관의 표정도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
총사령관에게 보고가 올라가기 얼마 전 그 시각·
케이샤는 개인 연구실 가까이에 있는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무언가를 찾았다·
그녀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하얀색 금속 케이스가 방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딱이 자신이 부재중일 땐 이걸 사용해 버티고 있으라고 준비해둔 안배·
그녀는 망설이다 결국 케이스를 작동시켰다·
철컥- 철컥- 스르륵- 철컥-
이윽고 눈부신 하얀 무언가가 건물을 꿰뚫고 높이 솟아올랐다·
마법소녀 기갑 모드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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