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
***
“은색 불꽃이라····”
칼슈타인은 마침 보고 있던 신종 괴수 보고서를 내려다봤다·
“흐음····”
보고서에는 막시엔이 신종 괴수를 확인 후 퇴치했다는 보고와 함께 거대화가 가능하다던가 외양에 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막시엔에게서 도주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네자릿수 넘버링을 부여받은 놈이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넘버링 개체로 등록된 이유는 그 위험성 때문도 있었다· 장벽 인근에서 출몰했으며 기습과 도주가 용이해 보이는 괴수·
‘괴수가 맞나?’
현재 녀석의 은빛 혈액을 다각도로 연구 중이다· 에테르와 유사한 성질을 띠고 있으며 아스트랄 차원과의 반응성이 극히 높은 소재·
다만 괴수의 체액과는 성질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 의아하던 참이다· 아직 연구가 부족한지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진 것 같기도 했고·
‘분명 차원 이동의 핵심 소재가 될 것 같은데····’
보조재로만 사용해도 다양한 활용이 될 것 같았고·
“은빛이라····”
칼슈타인의 눈이 탐욕으로 일렁거렸다·
비르델이 말한 은색 불꽃과 막시엔이 놓쳤다는 괴수의 혈액과 무언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일단 비르델의 강화 슈트 히드라로 분석한 데이터는 이미 받아 놨다· 기본이 슈트이기 때문에 분석에 한계는 있을지언정 도움이 될 터·
나머지는 부하들이 알아낼 일이다·
그래도····
“그런 놈들··· 더 없나? 표본이 좀 많았으면 좋겠는데·”
칼슈타인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
《위대한 세피로트》의 《뿌리》의 심처 어딘가·
은색의 나무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옥좌 위에 반쯤 기대어 누운 여인이 하품했다·
“잔뿌리 이것들 요새 제대로 일을 안 하는 것 같아·”
여인의 외모는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웠으며 하얀 머리카락에서는 은은한 은빛이 감돌고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나른한 눈동자가 이내 신경질을 머금더니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해 보니 열받네? 성혈을 받아 갔으면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거 아냐?”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를 내뿜자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천장에서 얇은 나무줄기가 스르륵 내려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의 눈에서 거짓말같이 짜증이 사라졌다· 평온함과 미안함이 가득한 그녀의 손길이 나무줄기를 어루만졌다·
“아아 어머니· 미안해요· 괜히 흥분했어요· 요새 아이들의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그랬어요·”
나무줄기 끝에서 진득한 은빛 수액 한 방울이 맺혔다·
“뭐···· 그것도 잠시겠죠· 요새 들려오는 전선 상황이 바쁘게 돌아간다니까 쓸 만한 아이들이 전선으로 내몰리기도 했고요·”
여인은 수액 한 방울을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그보다 《혼돈》진영의 웬 미친놈 하나가 전선을 휘젓는다면서요? 위쪽은 도대체 무얼 하는지···· 얼른 처리해서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려야 할 텐데·”
나무줄기는 부드럽게 여인을 쓸더니 말려 올라갔다·
“하아· 그래도 체벌은 해야겠죠· 할당량을 채우지도 못한 녀석들은····”
그녀의 손에 은빛 불꽃이 휘감기더니 그녀가 휘두르자 불꽃 속에서 몇몇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차원째 터뜨리기 전에 거짓 없이 고해야 할지어다·”
그녀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진 인영들에게로 향했다·
인간을 닮았지만 독특한 외양의 그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무언가 먹고 있었던 사내도 야릇한 무언가를 하고 있던 듯한 여인도·
모두가 그 즉시 머리를 땅에 박으며 덜덜 떨었다·
옥좌의 여인은 《위대한 세피로트》의 가호를 받는 《뿌리》 중 하나·
진짜 ‘뿌리’의 그들에게서 은총의 찌꺼기를 하사받는 그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갑자기 불려진 그들은 뿌리의 자비에 호소해 관리할 영역을 대여받는 세입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을 ‘잔뿌리’라 일컬었다·
옥좌의 여인에게서 목소리만으로도 중압감이 느껴지는 질책이 이어졌다·
“최근 잔뿌리 하나가 영역을 이탈했다· 영역을 망쳐놓은 채로 말이지·”
순식간에 소환된 그들은 온몸을 떨며 그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뿌리를 거역할 간 큰 놈이 있다고?
그러고 보니 최근에 할당량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놈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너희에게 기회를 줄 테니 전말을 알아내거라·”
문제를 일으킨 녀석과 자신들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따지고 물을 수도 있건만·
감히 옥좌의 여인을 거스를 생각을 못 하는 그들이었다·
“그럼 사라지도록·”
옥좌의 여인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엎드려 있던 인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환되기 전의 그곳으로 돌아갔으리라·
옥좌의 여인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설마하니 다른 쪽에 붙어먹은 건 아니겠지?”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쓰자 옥좌가 있는 대전에 묵직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차원을 다스리는 위대한 어머니를 감히 배반해?”
오롯이 지배한다고는 할 수 없다지만 《혼돈》과 《삼천》도 그들의 일족만큼 차원을 다루진 못한다· 이는 명백한 사실·
그녀의 분위기가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겠어····”
으득-
***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정말 알려줄 생각이 없소?”
“허허· 이 모든 게 강호의 기치를 지키기 위해서거늘 욕심 때문에 대의를 저버리는 것 아닌가?”
무형신검이라 불린 남궁진이 입술을 짓씹었다·
욕심은 무슨·
오히려 욕심을 부리는 건 당신들이 아니냐고 강하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남궁진은 조용히 입술만 깨물었다·
무당파의 혈사에서 살아남은 장로 하나와 무림맹에서 나온 개방의 노인이 그를 보며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날의 일은 우리 무당파의 본산인 무당산에서 벌어진 일 아닌가? 당연히 나는 알 권리가 있다고 보오만·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건가?”
무당파 장로의 표독한 눈빛이 남궁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미 멸문을 겪어 더는 뒤를 생각할 필요 없는 사람다운 눈빛이었다·
“끌끌· 우리 무림맹에서는 자네를 누구보다 열심히 보조했네· 우리 십만 개방도를 풀어 자네의 뜻을 널리 알리고 남궁세가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지· 그런데 이런 식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좀 그렇지 않은가?”
남궁진은 남궁세가라는 말에 울컥거리는 감정이 솟았지만 억지로 참고 견뎌냈다·
그들이 그의 선전포고를 널리 알려준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남궁세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무림맹의 협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까·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세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력뿐 아니라 많은 것이 필요했다·
인망과 명예 역사를 새로 쌓아 올려야 한다· 전통 없는 가문은 그저 힘 있는 무뢰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림맹의 조력 없이는 남궁세가를 다시 재건하려면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릴 테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가 가진 힘의 본질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가주께서는 이런 승냥이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워온 거겠지·’
사람 모인 곳에 정치가 없을 수 있을까? 이는 고고한 창천의 남궁세가라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아무리 그래도 그날의 전투를 지켜보고도 겁이 없는가? 무림맹이 원하는 대로 천마검도 양도했잖은가?
남궁진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
솔직히 지금 그가 마음먹고 이들을 처리하려고 들면 불가능하지 않았다· 아니 길가의 꽃을 꺾는 것마냥 너무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남궁진도 가문의 재건만 아니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허나·
이들을 베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사술이니 마도니 떠들기 시작하며 무림공적으로 낙인찍겠지· 안 그래도 그의 신위에 잔뜩 경계의 날을 세우고 있는 무림맹이다·
그리고 나서는?
그래· 물론 그가 무림맹과 싸워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불가능하진 않겠지·
그러면 그다음은? 또 반발하는 모두를 쳐 죽이며 남궁의 이름을 부르짖을 텐가? 또 관에서 개입하면 그때는? 그리고 그가 죽고 나면은?
만약··· 그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면 마인과 다른 점은 뭔가?
아마 이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리 나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생각이 복잡해짐에 따라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들도 무작정 생떼만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신위의 원천을 토해내라는 개소리는 아닐 터였다·
허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림맹의 통제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라는 것·
쉽게 말해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것이다· 대신 남궁세가의 재건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남궁진의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어렸다·
그래 이들이 시키는 대로 칼 몇 번 휘두를 수 있겠지·
이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그 힘을 옳은 방향으로 써라 이거다· 그게 아니라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허나 이들이 원하는 것은 도를 넘어섰다·
마교의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협조한 마을부터 시작해 십만대산에 조용히 밭을 일구는 마교와 관계된 모든 이들의 몰살을 원하는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의 정치적 약점을 담보 잡음과 동시에 관을 향한 견제도 포함된 것 같았다· 그 이상까지는 아직 남궁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라면 해선 안 될 ‘선’이 있는 것이다· 그건 카르마 포인트에 눈이 돌아간 남궁진이라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그 ‘선’을 넘으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진짜 이 답답한 노인들을 카르마 포인트로 교환해버려야 만족할 수 있을까?
복잡한 심정에 따라 남궁진의 눈빛이 휙휙 뒤바뀌었다·
“····”
결국 그의 눈빛에 결심이 어렸다· 언제까지 질질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남궁진이 있는 대륙에 누군가 공간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에 대해 깊은 환멸을 느끼고 있는 그녀가·
검붉은 전신 갑주를 착용한 여인 하나가 천마신교의 본산 십만대산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갑주는 군데군데 파손되었고 헤졌지만 그녀의 전신 갑주에서는 옅은 은빛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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