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
[외장 에테르 순환 시스템 가동 중]
[급속 자가 회복 시스템 – 신체 손상률 12·32% 회복 완료까지 2시간 43분 28초]
[비상 복구 시스템 – 강화 슈트 손상률 32·05% 복구 완료까지 7시간 15분 21초]
[잔여 동력 3·2%]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아파 본 것이 언제였더라? 최근 몇개월은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떠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몸을 움직일 순 있지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은 떴지만 시야가 흐릿하고 귀는 웅웅거렸다·
극심한 탈력감· 딱 그 짝이었다·
“으윽·”
너무 서두른 탓일까?
차원참을 수련하던 중 체내의 은색 불꽃에서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기묘한 감각을 신경 쓰며 수련한 끝에 은색 불꽃이 전신으로 퍼져 뜨겁게 달구는 느낌이 들면서 허공의 참격이 단단한 무언가를 베었다·
허공의 갈라진 틈새에서 흡입력이 바람과 함께 전신을 끌어당겼다·
그때 그녀는 선택해야 했다· 이 흐름에 몸을 맡기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
그녀 스스로도 알았다· 방금의 일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온전히 그녀의 실력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니었다·
허나 그녀가 고민했던 이유는 이 흐름에 몸을 던져 넣으면 차원참의 실마리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간 차원참을 수련하며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진전이 없어 답답한 참이었다·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베어내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틈새가 닫히고 있었다· 얼른 선택을 내려야 했다·
그러다 그녀는 체내에서 은색 불꽃이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기회가 쉽게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그녀는 과감히 몸을 집어넣었다·
“!!”
거대한 격류가 그녀를 덮쳐들었다· 마치 강철의 파도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격류의 흐름 질감 강도 속도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몸에 새길 뿐·
체내의 은색 불꽃은 사라졌지만 차원이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이 흘러 98%에 이르던 동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그녀는 위기를 느끼고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아·”
허나 심력을 너무 소모한 탓일까?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눈이 다시 감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
“성화에서 사람이 나타나다니요? 그것도 성화대전 중에?”
“그야말로 신녀가 강림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맞소·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고수들의 눈을 속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소?”
“쉿! 조심하시오· 지금 그 문제로 말이 많은 것을 아시지 않소?”
비르델이 정신을 차리기 전 천마신교의 장로들이 나눈 대화였다·
“그런데 갑옷의 외양을 보면 여인 아니오? 어째서 교주께서 저리 신경 쓰시는 거요? 어차피 신녀원은 제례 외에는 본 교에 관여할 수 없을진대·”
“그야 초대 천마의 전설 때문이지 않소?”
“초대 천마? 아····”
“왜 그 있잖소? 초대 천마께서 검붉은 아수라 갑주를 입고서 천마검으로 세상을 호령했다는 전설 말이오·”
“아아··· 그리고 십만대산으로 와 성화를 남기고 교를 세우셨다지요·”
“오래전이긴 합니다만·”
현재 교주가 원로원과 신녀원의 대표들과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로 몇몇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참· 교주의 위상도 많이 변했구려·”
“하긴 현 교주는 적통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다녔으니····”
“그나마 최근엔 중원 침공으로 결집을 이루어냈으나··· 무형신검인지 뭔지 하는 놈이 나타나 불발됐으니· 쯧쯧·”
전대만 하더라도 저렇게 교주의 말에 대놓고 반발하는 모습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천마신교의 32대 교주 천유강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올라선 교주가 아니었다· 온갖 음험한 계략으로 교주에 등극한 인물· 교에서 반발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교주에 오른 뒤로는 이전의 영민했던 모습을 던져버리고 탐욕과 아집만 가득한 교주가 되었으니· 저렇게 반발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 교의 중신 중에서도 현재의 상황에 답답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어쨌든 제단에 올리기로 결단이 났으니 어서 움직입시다·”
“그러지요·”
그렇게 비르델은 성화의 제단에 올려지게 되었다·
***
“···불쾌하군·”
그녀는 고개를 내려 주변 상황을 인지했다·
거대한 지하공동에는 드문드문 횃불이 걸려 어두운 광장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제단 위에 눕혀져 있었고 근처에는 거대한 화로에서 푸른 화염이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주위에는 처음 보는 복장의 사람들이 빙 둘러싸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 같달까?
그녀의 심기가 급격히 나빠졌다·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트라우마처럼 인간을 혐오하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아····’
과거 언제나처럼 군중이 그녀를 올려다볼 때면 온갖 욕설과 돌 경멸과 증오의 눈빛이 날아들었다· 돌을 던지며 원수를 대하듯 고함을 쳤던 그들도 그녀가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음을 알 테지만·
군중의 광기에 이성의 흔적은 없었다· 그저 욕하고 물어뜯고 미워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
그녀도 이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를 향했고 그녀는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욕설도 돌멩이도 타인의 시선도 아닌 스스로의 감정·
피폐해진 그녀의 마음엔 군중의 광기 못지않은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언젠가부터는 과거의 선택을 내렸던 그녀 자신이 또 그녀가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부족민들이 미워졌다· 끝내는 부족장인 조부와 어머니마저도 불쑥 원망하는 마음이 들려고 했다·
그런 자신이 너무 끔찍해 감정을 묻고 생각을 끊어버렸다·
아마 마지막 어머니와의 재회가 아니었다면 영영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인간 혐오· 더해서 관리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호기심이랄까? 과연 그를 만났을 땐 이 지독한 인간 혐오가 사라질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녀가 눈을 떠 제단 아래를 내려다보자 각기 다른 욕망을 품은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지끈-
누군가는 경계의 눈빛을 누군가는 탐욕을 누군가는 그녀를 이용할 생각만 가득했으며 누군가는 불쾌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
어쩐지 그들의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화르륵-
“하늘이 나를 돕기 위해 사자(使者)를 내려보냈노라· 정신을 차렸으면 얼른 본인을 소개해 보아라·”
“성화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실로 무엄합니다· 일단 투구부터 벗기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까 갑옷이 벗겨지지 않던데 그 속이 궁금하군·”
“여인이라면 마침 교주님의 새로운 부인 자리가 남아있으니····”
저마다 말을 쏟아내며 그녀를 향해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몇몇은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올려두고 경계했고 몇몇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덜컹- 화르륵!
지하동굴이 일순 흔들리며 거대한 화로 속 성화(聖火)가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를 보고 있던 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심지어 천마신교의 32대 교주 천유강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어 어째서 성화가···!”
“이건 무슨 뜻인지?”
“천마재림 만마앙복!”
“허허·”
“천마재림 만마앙복!”
“어어?”
순식간에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지하공동의 교인 전원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며 이미 몇몇은 머리를 바닥에 찧고 천마재림 만마앙복을 외쳐댔고 또 다른 몇몇은 아예 검을 뽑아 들기도 하였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성화를 등진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답하라·”
그녀의 서슬 퍼런 시선이 제단 아래를 훑었다·
과연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제국을 정리했던가?
별것 없었다·
그녀라고 모든 걸 죽이고 파괴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관리자도 그에 대해선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듯했고·
허나 그녀가 느끼기에 관리자와 통한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면·
‘거슬리는 것은 모조리 쳐죽인다·’
스스로 악마를 자처한 그녀는 거리낄 게 없었다·
단 하나·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은 내버려 둔다·
허나 탐욕을 부리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들은·
모조리 제거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제국은 공중분해 되었다지만·
그래 어쩌면 그녀는 일부러 인간을 죽일 이유를 일부러 찾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너희의 죄는 무엇이지?”
그녀의 말에 교인들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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