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
# 172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남작령을 찾은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제국에서 마법사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 존재다·
마법사에게 손을 댔다간 반드시 보복을 당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귀족들에게 대접을 받지 평민들은 마법사에게 설설 기지·
괜히 오만한 마법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다·
심지어 괴팍할수록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 때문에 무례한 짓을 일삼는 마법사도 버젓이 돌아다닐 정도다·
마법사들은 설마 누군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남작을 만난 뒤로는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사가 살해당한 이상 여기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어·”
이안이 말하자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미친 짓을 하고 다닐 수 있는 이유는 귀족과 기사들이 마법사를 존중해주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괴팍한 짓을 해도 목이 달아나지 않을 걸 아니까 더더욱 괴팍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상대는 마법사를 그냥 푹찍 죽여 버렸다·
평소처럼 배째라고 돌아다니면 진짜로 배가 찢어질 것이다·
“헤르타는 풍차 근처에 있을 거야·”
“그럼 이안· 네가 헤르타 선배님한테 가· 나는 안톤 선배한테 가볼게·”
“그래요· 벨렌카· 네가 크리서스 선배 좀 도와줘·”
“알겠다·”
이안은 인원을 분배 흩어진 마법사들을 찾으러 이동했다·
다행이도 헤르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헤르타 누나!”
“어머 이안?”
헤르타는 풍차 근처에서 대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안은 동굴 지하에서 경험한 일들을 요약해서 들려줬다·
“뭐라고요?! 빅터? 그 냉기술사 빅터가 당했단 말이에요?!”
“안타깝지만··· 네·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헤르타는 빅터를 알고 있었다·
과거에 마법사 모임에서 몇 번 만나본 마법사이기도 했다·
유쾌하고 농담을 좋아하는 냉기술사였는데···
“그 바보가!”
헤르타는 허탈하고 갑갑한 마음에 그만 나쁜 말을 내뱉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락이 어려운 시대다· 누가 어딜 갔는지 미리 전해듣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마법사들은 방랑과 탐구를 좋아한다· 여행이 위험한 시대에 객사(客死)는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만약 빅터가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마법사 일행과 합류했겠지만···
그는 정체불명의 살인자에게 당해버리고 말았다·
“헤르타 누나· 여기 계속 머무르는 건 저희한테도 위험해요·”
“이해했어요· 세상에··· 마법사 살해라니···”
헤르타 역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정말로 잉리언이 미끼였다면···
마법사들은 사냥꾼이 숨어 있는 숲으로 걸어 들어온 것과 다름없었다·
“그냥 마법으로 잉리언 교수를 구출하고 싶은데요·”
“물론이죠· 가서 잉리언 교수님을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죠·”
헤르타는 이안의 의견에 즉각 찬성했다·
귀족에게 마법을 휘두르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 마법사들은 남의 사정을 봐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남작 대리의 자업자득이다·
진작 잉리언을 내놓던가· 아니면 영지 관리를 잘 좀 하던가·
이안은 헤르타와 함께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크리서스와 동료들은 있었지만 안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배· 안톤은요?”
“그게···”
크리서스는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잘 찾아봤는데 없었어· 혹시 몰라서 강을 따라서 쭉 내려갔는데···”
“그래도 없었군요·”
크리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안톤은 수기술사다·
이안과 크리서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만한 마법을 준비하고 싶었을 텐데· 그렇다면 당연히 강에서 발견됐어야 했다·
하지만 안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조금 더 찾아보죠· 저 밑에 호수까지는 둘러봐요·”
마을에서 상당히 벗어나게 되지만 이안은 강 하류까지 내려가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유효했다·
“이안!”
먼저 정찰을 나간 벨렌카가 소리쳤다·
“마법사를 찾았다!”
이안 일행은 서둘러 호수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안톤이 있었다·
“세상에· 안톤!”
창백하게 질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안톤·
헤르타가 가장 먼저 뛰쳐나가서 안톤의 뺨을 두드렸다·
안톤의 의식은 깨어났다 잠들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안톤! 안톤! 괜찮아요? 눈 좀 떠보세요! 안톤!”
“··· 헤르타?”
안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안은 재빨리 질문했다·
“안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 악마·”
“악마?”
의외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안톤은 거칠게 기침했다· 시뻘건 피가 섞인 기침이었다·
“악마가··· 날 공격했다· 곧바로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쿨럭· 다 틀린 것 같군·”
안톤이 더듬더듬 설명했다·
마법을 준비하던 안톤은 어떤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고·
그 괴한의 정체가 악마라는 것이었다·
“틀리긴요! 안톤! 포기하면 안 돼요!”
헤르타는 안톤의 손을 꼭 붙잡으며 소리쳤다·
응급처치에 능숙한 벨렌카가 안톤의 상의를 찢고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았다·
하지만 붕대는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안톤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악마는 마법으로 쓰러뜨리기 어려운 상대다··· 쿨럭! 그러니 최대한 빨리 여길 떠라·”
“안톤!”
“하아··· 개 같군· 설마 내가 이딴 시골 촌구석에서 죽게 될 줄이야···”
안톤은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헤르타가 곧바로 안톤의 손을 잡아줬다·
“헤르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안톤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으며 말했다·
“사실 널 좋아했어·”
“···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 목소리가· 말투가·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
아니 잠깐만요· 안톤! 갑자기 그게 무슨···
쿨럭 쿨럭!
안톤이 거칠게 기침했다·
나 지금 숨 넘어가기 직전이니까 말 끊지 말라는 뜻이었다·
헤르타는 죽어가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그걸 까먹을 정도로 황당했다·
아니 무슨 놈의 고백을 죽기 직전에 한대?!
하지만 피를 흘려 창백해진 안톤을 보니 도저히 나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톤은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지금껏 담아왔던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널 사랑한다고· 숨기고 있었지만··· 이제 마지막이니까· 상관없겠지·”
“···”
진짜로 인생 마지막인 사람만 가능한 막장 고백이었다···
안톤은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웃었다·
헤르타는 진심으로 안톤을 쥐어 패고 싶었다·
지금 저게 죽어가는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지금!
“그딴 말은 멀쩡할 때 하라고요!”
“··· 미안· 용기가 없어서···”
단언컨대 최악의 고백튀였다·
게다가 도망치는 장소가 ‘하늘나라’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악질이었다!
거기로 튀면 어떻게 연락하라고!
“지금 그런 소릴 하면··· 저더러 어쩌라고요·”
안톤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닿았다·
헤르타가 흘린 눈물이었다·
죽어가면서도 안톤은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헤르타가 안톤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헤르타는 평생 안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좋아·’
그녀가 자신을 영원토록 기억해준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안톤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제 하늘님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
···
“안톤!”
그때였다·
편안함에 몸을 맡기려던 안톤은 어떤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이안 에레디스?’
그렇다· 에레디스의 제자 이안이었다·
이안은 죽어가는 안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진심으로 그랬다·
죽기 직전에 진심을 고백하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자···
이거 완전 순애 아닌가?!
“헤르타를 좋아한다면서요! 그런데 이대로 죽어버리면 너무 비겁하잖아요!”
이안은 NTR를 극혐하고 순애를 사랑하는 지극히 건전한 청년이다·
‘개쩌는 스토리의 NTR보다 억지 전개의 순애가 낫다···!’
이대로 안톤이 죽어버리는 전개는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안은 어떻게든 헤르타-안톤 커플링을 돕고 싶었다·
눈앞에 순애가 아른거리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을까!
“이안?! 뭘 하려고!”
“신성술이요! 하늘님한테 탄원할 거예요! 안톤을 구해달라고요!”
‘안 돼! 하지 마!’
안톤은 기겁했다·
지금 막 최후의 고백을 남기고 숨을 거두려던 참이다·
그런데 되살아나버리면···
고백튀가 아니게 되잖아!
어째서 안톤이 고백튀를 선택했나?
이유는 단순했다·
헤르타가 안톤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렇듯 헤르타와 안톤은 서로 아는 사이다·
하지만 딱 얼굴만 아는 사이·
마법사 회의 때 몇 번 마주친 것 말고는 깊은 접점이 없었다·
헤르타는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이라 처음 보는 남자한테도 친절하게 대해줬고·
까칠한 성격인 안톤은 그런 헤르타의 부드러운 성격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 고백튀를 감행한 건데···
이안이 안톤을 되살리고·
헤르타가 안톤의 고백을 까버린다면?
‘절대 안 돼!’
진심으로 안톤은 두 번 죽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
“가 가능하겠어요? 이안? 신성술을··· 쓸 줄 아는 건가요!”
“네! 자랑은 아니지만 하늘님이 절 좀 좋아합니다! 어떻게든 부탁을 해볼게요!”
“그럼 부탁할게요! 안톤을 꼭 살려주세요!”
‘헤르타···’
안톤은 헤르타의 목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렇게 필사적인 목소리라니···
어쩌면 헤르타 역시···
안톤을 좋아하고 있던 건 아닐까?!
‘나처럼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을 수도 있어!’
이거··· 가능성이 있을지도?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안톤은 조금이라도 빨리 되살아나고 싶어졌다·
‘부탁한다! 이안!’
“[우아하고 기품 있고 신성하며 아름다운 이 세계의 지배자님!]”
“???”
‘???’
마로니우스 어를 알고 있는 마법사들은 모두 동시에 당황했다·
분명 신성술을 쓴다고는 했는데···
뭔데? 저 근본 없는 주문은! 묘하게 신성모독적이잖아!
저러다 천벌 받는 거 아니야?!
하지만 우려와 달리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 이안· 오랜만이네요?]
“[부탁입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을 부디 거둬가지 말아주세요!]”
[흐음· 죽고 사는 문제에 자주 관여하면 좋지 않지만··· 이안의 부탁이니 특별히 들어주도록 할까요?]
이안은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신성술은 신에게 탄원함으로써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행위·
신의 사랑을 받는 자의 신성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고는 한다·
마법과 기적의 사이에 위치한 기술·
그것이 신성술이다·
“헤르타 선배님!”
“··· 기적··· 일까?”
따스한 빛이 안톤의 몸을 휘감았다·
상처가 아물고 정신이 돌아오며 영혼의 불꽃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상식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
신성술이 수기술사 안톤의 생명을 구원한다·
“안톤!”
안톤은 눈을 떴다·
새까만 머리카락의 건방진 꼬맹이·
이안 에레디스의 얼굴이 보인다·
“··· 네 마법이 날 살렸군·”
안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암영술은 물론 대지술이며 화염술이며 아무튼 온갖 마법을 익혔다고 주장하는 이안·
그 말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클레릭들이 수련하는 신성술까지 손을 댈 이유는 없으니까·
“넌 정말이지 온갖 마법을 다 배웠구나· 이안·”
“살아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에요?”
이안은 웃으며 등 뒤를 가리켰다·
눈가를 촉촉이 적신 채 뺨을 붉게 물들인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다·
대기술사 헤르타·
“안톤·”
“헤르타·”
두 마법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으응··· 이안 덕분이지·”
안톤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얼굴이 뜨거워서 헤르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무지성 고백의 후유증이었다···
“이안 이안! 저 두 사람 심상치 않은데?”
“심상치 않은데요~?”
“뭐야뭐야~ 저러다 사귀는 거 아니야?”
“사귀는 거 아닐까요~?”
“··· 시끄러워! 망할 꼬맹이들!”
안톤은 옆에서 염-병을 떠는 이안과 크리서스를 내쫓아버렸다·
되살아난 지 1초만에 꼴보기 싫어지는 꼬맹이들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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