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4
[애 키우는 게 그럼 쉬운 줄 알았나? 세민이 하나 키우는 것도 얼마나 고역이었는데·]
[하지만 아버님 그런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오히려 자녀와의 애착형성에 방해가 되는 요소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네요·]
천규진 교수가 뒷짐을 지고 거실을 빙빙 돈 지가 어언 10분째였다·
‘나메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게 정말 나메를 위한 일이 맞을까?’
그는 ‘구속’이라는 단어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남들의 가치관에 맞추어 한 아이의 인생을 억지로 틀에 맞추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다·
그래서 천 교수는 항상 나메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하였고 보호자의 역할은 그저 묵묵히 자녀가 넘어지지만 않도록 뒤에서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나메가 올린 영상은 이미 천교수가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섰다·
달칵-
병원에서 막 퇴원한 나메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고작 짐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10분이나 걸렸을 리가 없다·
나메의 표정에서도 복잡하게 꼬인 심경을 엿볼 수 있었다·
“나메야 잠깐만 이리로 와보겠니?”
“··· 아까 그 얘기는 차에서 다 끝난 거 아니었나요?”
나메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대놓고 불쾌함을 표출했다·
천교수는 나메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메가 올린 영상을 내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반시간 동안 서로의 입장은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나메는 자신이 영상을 올린 의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었지만 이번만큼은 천교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건 나메의 안전이 달린 일이다·
“지금이라도 영상을 내려줬으면 좋겠구나·”
“안 내려요· 말씀드렸잖아요· 충동적으로 올린 영상이 아니라 나름 심사숙고해서 찍은 거라고요·”
천 교수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러댔다·
나메가 원래도 이리 고집이 강한 아이였나?
‘딱 한번 그런 적이 있었지· 기말고사 시험 클레임을 걸어왔을 때·’
하지만 그때는 마나의 금단현상 때문에 이성이 폭주한 것이지 이렇게 평상시에 나메가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
아직 설득이 부족해 아이에게 잘 와닿지 않았을 수 있다·
천 교수는 다시 돌아가는 상황을 천천히 나메에게 설명했다·
“네가 하는 말들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야· 나메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지· 하지만 모든 이들이 나메처럼 똑똑한 건 아니란다· 스키 선수들이 왜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넘어져서 다칠까봐?”
“···”
“스키를 잘 못 타는 초보자가 와서 들이박을까봐 그러는 거란다· 나메 너를 지켜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만큼 너 스스로도 조심을 해야겠지?”
“전 스키가 뭔지 잘 몰라요·”
“하아···”
나메는 일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휙 돌렸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대화에 천교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발푸르기스는 테러단체이며 광신도들이다·
그녀가 복수를 다짐하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나메는 어리고 약하다·
자신이 보호의 대상이라는 점을 자꾸만 망각하는 아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을 계속 키워나가는 게 천교수는 불만이었다·
“노나메·”
낮게 내리깐 목소리에 나메가 몸을 움찔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천교수가 이리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네·”
“영상 지우거라·”
“싫어요·”
“내가 지금 나메한테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는 거니?”
“아니요···”
“나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건 훨씬 더 심각한 일이야·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모르겠어?”
“잘 알고는-”
우우웅-
거실 식탁에 놓여있던 천교수의 폰이 진동상태로 울렸다·
나메가 눈으로 힐끗 바라보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배성준 의원]
나메에 관한 모든 연락은 이제껏 천교수가 책임지고 받고 있었다·
최근에 얼마나 많은 연락이 오갔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괜히 미안해진 마음에 나메의 기가 한 풀 꺾였다·
천교수는 폰을 뒤집어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나메에게 설교를 이어나갔다·
“세상은 게임이 아니야 나메야· 목숨이 하나라고 하나·”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 것쯤은·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 말에 책임은 질 수 있고?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은 어제부터 경계태세에 돌입했다고 하더구나· 왜? 국가는 언제나 만약을 대비해야하거든· 언제나 세상은 편의주의적으로 흘러가지 않아· 만약이지만 전쟁이라도 나서 사람들이 너를 욕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니?”
“···”
“나메야 조금만 겸손해지면 좋겠구나· 너의 능력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주위에 많잖니· 굳이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서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
“교수님 전 마찰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저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지 모르니까 다같이 경계를 하자는 의미로-”
“노나메! 정신 차려!”
결국 천교수가 언성을 높이며 단호하게 일갈했다·
설령 나메가 그 어떤 정당한 이유를 내세우든지 간에 천교수는 이를 아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같이 경각심을 가지자고 호소하는 방법은 지금 천교수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만 해도 수십가지이다·
[나메 학생은 매우 낮게 나온 걸 보면 심각한 질병이 아닌 이상 어느 수준의 아픔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요·]
[아이가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이인증이나 누가 자신을 조정하고 있다는 조정망상 그리고 때때로 환청과 환시를 경험했다고 하더군요·]
아이는 진심으로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마치 게임에서 랭킹 1위의 지위를 누리는 것처럼·
한번도 뼈아픈 패배를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계속 권능감에 취해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앙상한 몸에 살이 조금 붙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메의 체구는 학교에서 제일 작은 편이었다·
더욱이 가상현실게임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성격은 의외로 호전적이기까지 하다·
나메가 영상에서 말했던 취지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발푸르기스가 진짜로 자신을 찾아와줬으면 좋겠다는 열망이라도 품은 것인가?’
단단히 혼을 내지 않고서는 안 된다·
가족을 또 같은 이유로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착각하지마 나메 너 겨우 여덟 살이야· 몸이 아픈 여덟 살 환자! 교수님 말 알아듣겠어? 사회에 나가면 넌 아직 연약한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선명한 푸른색의 오러가 천교수에게 배어 나왔다·
차가운 분노의 색감을 입힌 오러가 스멀스멀 퍼지면서 나메를 짓누르는 것도 잠시
나메도 똑같이 그녀 고유의 황금색 오러를 발산하며 천교수의 오러를 자비없이 증발시켰다·
흔들림 하나 없는 올곧은 두 갈래의 눈빛은 명백한 반항의 의미를 띄고 있었다·
“노나메 오러 거둬·”
“천교수님이 먼저 거두세요·”
“두 번 다시 말하게 하지 말거라· 당장 오러 집어 넣어·”
“전 약하지 않아요· 저를 제일 잘 아는 건 저 자신이지 교수님이 아니잖아요· 그쪽이야말로 저를 임의로 판단하지 마세요· 이제 본 지 1년밖에 안 된 사이인데·”
결국 나메의 마지막 발언이 천교수가 폭발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천교수가 만들어낸 순백색의 오러가 눈보라처럼 강렬하게 휘몰아쳤다·
아까의 아름다운 푸른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차례 폭풍에 황금빛 기운이 꽁꽁 얼어붙었다·
빛을 잃은 나메의 오러는 이내 대기로 뿔뿔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파트에서는 경보음이 한차례 울리더니 거실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에서 투명한 액체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옷이나 피부가 젖지는 않은 걸 보니 마나의 형태에 가까운 물질이었다·
순식간에 대기 마나 농도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나메는 여전히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조용히 이를 갈 뿐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널브러진 교복을 보더니 옷걸이 통째로 집어들어 현관으로 달려갔다·
푹신한 병아리색 신발을 구겨신고 살짝 곁눈질로 뒤를 돌아본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오후 두 시 남들은 이미 하교할 시간에 나메는 집을 떠났다·
* * *
치사하게 오러 양으로 승부를 볼 생각을 하다니·
이러면 내가 꼭 기싸움에서 진 것만 같지 않은가· 심통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천교수가 걱정하는 의미로 성을 냈다는 건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약하다는 소리를 할 때 감정이 막 부글부글 올라오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전생에서 나는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다·
따라서 검과 마법으로 이루어낸 성취는 내가 평생의 노력을 기울여 일구어낸 결과물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멍청이가 있다면 집에 쳐들어가 즉시 모든 게임 계정을 삭제해버리리라·
천교수와의 말싸움 이후로는 정말 별거 없었다·
중간중간 아카데미 아이들을 마주쳐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재클린 캐롤 선생님과 함께 텅 빈 2학년 A반 교실에서 울적한 마음을 다스렸다·
내가 무슨 일로 학교에 왔는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 표정을 보고 이미 지레짐작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출한 아이들에게 아카데미는 최적의 장소였으므로·
사물함이 있는 소교실에 간이 침대에 이불 베개까지 있으니 말 다했지 뭐·
따스한 햇빛이 별처럼 쏟아지는 창가쪽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아카데미 밖 풍경을 감상했다·
“선생님 이제 퇴근해봐야하는데··· 나메도 집에 가야지?”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음··· 그럼 교장실에 가보는 건 어때?”
교실문을 꼭 잠가야만 하는 담임의 입장을 헤아려주기 위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내가 교장실 문을 두드리자 구온유 교장이 밝은 미소로 받아주었다·
거기서부터 이 사람이 천 교수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교장실 옆 작은 침실을 내어주었다·
교장실에 들락날락거리며 만화책을 쭉 정주행하며 작은 일탈을 즐겼다·
결국 그마저도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이튿날부터는 아예 교장실 바닥에 눌러 앉게 되었지만·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재밌는 만화를 왜 한번도 안 읽으셨어요?”
서류 작업 중이시던 구온유 교장의 손이 잠시 멈췄다·
“나메는 재밌어?”
“네 명작이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네요·”
“나메는 만화책 읽으면서 어느 장면이 제일 재밌었는데?”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저 행동은 내가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나도 답변을 바라고 말한 질문은 아니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장면이라기보다는 좀 와닿는 대사가 있었어요· 인간은 쓸데없는 잡담이라도 매일 누군가와 대화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어두워지는 법이라고· 또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 저절로 유대감을 느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존재라고요·”
“정말 좋은 말이네·”
“네·”
이 나이 먹고 즐기기에는 많이 오글거리긴 하지만 또 이렇게 마음을 간질이는 대사들을 꽂아주는 일본 만화 특유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혹시 교장 선생님도··· 제가 겸손하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왜? 나메가 왜 겸손하지 않은데?”
“그냥 예전에도 그런 말들을 자주 들었던 것 같아서요·”
요즘 브이튜브에 달리는 악플들도 그렇고 유독 ‘선민의식’이라던가 ‘잘난 척’이라던가 그런 문구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천교수에게까지 그런 비슷한 류의 충고를 들으니 마음의 상처를 두 배로 입었다·
“친구들이 나메보고 그래?”
“친구들은 아니고··· 건너건너 아는 사람이 말한 걸 들었죠·”
전생의 인간관계를 돌이켜보면 항상 내 발목을 잡았던 부분이었다·
결국 나는 누군가와 깊게 친해져본 적이 없었다·
루리처럼 내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거나 아니면 클라우드처럼 실망하고 떠나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교계 영애들에게도 들었던 소리였다·
그때는 사람들이 그저 내 능력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거라며 무시하곤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요 근래 자주 들기 시작했다·
피상적인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인 인간인가?
탁-
상념을 깨는 소리·
구온유 교장은 서류뭉치를 책상 한쪽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두소리가 또각또각 규칙적으로 울려퍼진다·
그녀는 내 뒤에 앉더니 내 어깨를 붙잡고는 몸이 뒤로 기울어지도록 만들었다·
어쩌다보니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운 형태가 되었다·
“2학년 A반 노나메 학생·”
“네?”
“그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외롭다고 말하는 거예요·”
“외로움··· 조금 느낌은 다르지만 큰 갈래 안에서는 비슷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런가? 난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그녀에게 정확히 설명을 해주려고 입을 열려다가 이내 다시 꾹 다물었다·
구온유 교장이 내게서 그런 시답잖은 얘기를 듣는 걸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몸을 앞으로 쭉 내빼더니 책장 바닥칸에 있던 두툼한 책 하나를 빼냈다·
잔뜩 쌓여있던 먼지를 손으로 탈탈 털어내고는 내게 보여준다· 척 보기에도 오래된 책인 것 같다·
“아카데미 졸업앨범?”
“이게 훨씬 더 재밌어보이지 않아요? 여기에 천규진 교수님도 계시는데·”
“와!”
이런 치트키를···!
나는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고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교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
이로써 천규진 교수와 구온유 교장은 소싯적에 원수관계였음이 확실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익명의 후원자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비슷하게 1945년 일본에서는 두개의 거대한 7서클 범시전 마법진이 국가방벽을 뚫고 시전되었죠!! 철학적 사유를 통해 오러를 다루는 세상이니만큼 여래신장을 펼치는 승려도 지구 어디에선가는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나메가 불교를 믿는 수준은 그렇게 깊지는 않아서 나메가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익명의 후원자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열심히 응원해주시는 독자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정말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표지빨을 받고 저희 가게가 성황이어서 더욱 행복하네요!!
천교수의 졸업앨범을 보여준다니 나메가 정말 신이 난 모습이네요!! 역시 누군가를 골탕 먹이려면 졸업앨범만한 게 없어요··!!
마나인방 250만 조회수 감사드립니다!! 일일 조회수가 일주일 전에 비해 3배나 뛴 모습!! 역시 다들 나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분명해요!!
공지사항에 ‘마나인방 Q&A/TMI’를 재정비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예전에 세계관에 대해 대댓글로 답변을 드린 걸 다른 분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독자님들이 계시다면 댓글로 에피소드만 알려주시면 제가 바로 찾아서 게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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