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1
천교수는 나메를 재우고 보호자실로 돌아와 커피를 내렸다·
티스푼으로 흑설탕 큐브를 넣으려는 손이 잠시 멈칫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의 향취가 이미 충분히 달콤했기 때문이다·
“허허···”
쓰디 쓴 검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도 천교수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아니 아빠···]
평생 못 들을 줄 알았던 호칭의 저릿한 울림이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나메는 나를 불편해했던 게 아니었구나···’
교수와 제자라는 관계는 언제나 큰 불편함이 따른다·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으며 원생들의 시선이 이를 증명했다·
‘언제부터··· 아니 언제부터가 아니지·’
인간관계는 이산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다·
나메와 천교수의 사이는 매일 매시간 발전했다·
하지만 어떤 ‘계기’가 없으면 관계가 변해간다는 걸 사람들은 쉽사리 깨우치지 못한다·
그리고 나메가 만들어준 계기는 천교수에게 있어서 평생 기억에 남을 이벤트였다·
‘오늘을 기념일로 삼아야 하나·’
10대 20대에나 할 법한 생각에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나메를 딸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천교수의 약혼자는 아들이 태어나기를 바랐던 반면 천교수는 함초롱 같은 딸을 원했었다·
어쩌면 30년 전의 소망이 세대를 건너뛰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과거의 기억은 모두 지워버리기로 했다·
특히나 잃어버린 약혼자와 자식을 나메에게 투영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천교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느라 고역을 치러야만 했다·
다량의 카페인이 함유된 커피도 커피지만 나메의 진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새벽에 핸드폰을 켜서 배경화면을 확인했다·
세피론 아카데미 입학식 날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이 그를 반겨준다·
[누가 꽃인지 모르겠구나· 자 보겠니?]
[요즘 그런 멘트하시면 누가 나이 들어 보인다 할거예요·]
당시의 나메는 조금은 쑥스러웠는지 벚꽃나무 앞에서 몸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었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배경화면 한쪽에 기념일을 설정해놓고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이제는 교수가 아닌 한 명의 어엿한 아버지로서 다시 태어나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천교수를 깨우는 건 기상알람이 아니라 다수의 전화였다·
몽롱한 정신으로 지인 교수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걸 듣고 있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나메가 울프상 수상을 끝끝내 거부한 것이다·
* * *
장 폴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하였다·
자신의 동정심과 지지발언이 서구권을 대표하는 노벨상의 권위로 대체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페렐만은 필즈상 수상을 거절하였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 실상은 수학자들의 정치질과 언론 플레이에 환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상 거부라는 행위에는 사회 전체에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메가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NoNaMe_11]
[노나메 · 팔로워 695만명]
[상을 안 받으면 훨씬 더 유명해질 수 있잖아요·]
그녀가 SNS에 게시한 글은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았다·
한국은 아직도 민족주의적 사상이 지배적인 국가이다·
개인이나 단체가 해외에 나가서 수상을 해도 정부기관과 정치인들이 국민을 대표하여 축하하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들의 영예를 곧 국가 전체의 영예로 돌림으로써 한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국가 시스템의 안정성을 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수상 거부라니?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최초 울프상인데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누구는 평생 공부해도 못 따는 상을···
-내 생각에 나메는 한국인으로서 상을 받는 게 싫은 거다·
└ 그러게· 한국에서 가르쳐준 게 뭐가 있다고·
-병원에 실려갔을 때 혹시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야···?ㅠㅠㅠㅠ
단순히 유명해지고 싶어서 수상을 거부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기자들은 이를 원동력으로 삼았다·
“분명 어딘가 하나는 불만이었을 거야·”
“그게 어디일까요?”
“말해 뭐해· 정부지·”
그런 얄팍한 고정관념으로 지레짐작한 기자들은 한국 교육의 실태를 비판하는 칼럼을 작성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감정을 지배하는 화살촉이 자신의 등에 꼽힐 줄은 상상이나 했을까·
[노나메 양부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조사 받아·]
└ 아동학대는 무슨 아동학대야ㅋㅋㅋㅋ
└ 기사 제목은 평범한데 내용은 ㅈㄴ 악의적이네 저 교수랑 무슨 원한 졌냐?
└ 게다가 조사 끝나고 경찰들한테 박카스 돌렸다고 함ㅋㅋㅋㅋ
└ 기레기 수준 어디 안 가지·
└ 사람들 댓글 여론도 뒤바뀌는 것도 소름이네· 과거순으로 보면 다 아버지 욕하기 바쁘던데;;
└ 나메 아버님 진짜 대단한 인격자이심· 천재발굴단 방송 본 사람들은 아무도 부정 못함·
└ 나메보고 공부하라고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애가 하고 싶은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게 죄임?
└ 따지고 보면 울프상 수상 거절한 것도 다 얘네들 때문인 거 아니냐?
└ ㄹㅇ 아빠가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 잡는 한이 있더라도 상은 받았겠지·
└ 인스타 가보셈ㅋㅋㅋㅋ 엄청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데·
나메가 일주일동안 꾸준히 올린 SNS의 게시글은 여론의 반전을 꾀할 수 있었다·
[NoNaMe_11]
[퇴원하고 아빠랑 같이 한강공원 산책·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
[댓글]
-나메야 너무 귀여워! 모자 잘 어울린다!
-청순공주아기ㅜㅜㅜㅜ 나메 너무 예뻐요ㅠㅠ
-이 할배도나메 지키기로 맘먹었다
-그그 인형 가게 방문하면 계산대 바로 위 서랍 모서리에 앉아있는 마스코트 인형같음··· 귀엽고 예뻐ㅎㅎ
-2인용 자전거 앞에는 아부지 인가요? 둘이 너무 사이가 좋아보여요!
-친절하게 싸인 받아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실물로 보니까 아버님도 너무 멋있고 목소리도 좋으세요!!!
-아버님은 세금 100배로 내셔야 하겠네요· 행복하세요~
한강공원에 출몰한 나메와 천규진 부녀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나메는 오러하트를 단련한다는 명목으로 물가에 달려가 신발과 양말을 아스팔트 바닥 위에 벗어던졌다·
하얀색 꽃무늬 드레스를 양손으로 치켜들고 맨발에 오러를 둘러 사뿐사뿐 물 위를 걷는 묘기를 펼쳤다·
열 걸음째에 다시 육지로 돌아오니 가슴을 졸이며 구경하던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윽고 큰 박수갈채를 받은 나메가 헤벌쭉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의 카메라에 브이자를 새겨주었다·
[NoNaMe_11]
[아빠랑 함께 만들기로 한 비프 웰링턴· 지금은 고기 위에 머스터드 바르는 중·]
[댓글]
-(영국청년): 나메한테는 소 한 마리도 사다줄 수 있어·
└ 이 형 합방 각 날카롭게 보네ㅋㅋㅋㅋㅋ
└ 믿고 거르는 영국음식··· 하지만 비프 웰링턴은 못 참죠?
-요리까지 잘해···! 대체 못하는 게 뭐야 나메야!
-고기 두께가 나메 몸통만 하네ㅋㅋㅋㅋ 이웃집도 나줘주셔야겠어요·
-애가 너무 말랐어ㅠㅠㅠ 하루 세끼 잘 먹고 있는 거지?
-앞치마 길어가지고 바닥에 끌리는 거 너무 귀엽다ㅠㅠㅠ
‘내가 천교수와 이렇다 할 추억이 있었나?’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상념은 나메를 고민에 빠뜨렸다·
매일 저녁 밥상에서 논문 스터디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교수와 제자로서 할 일이지 아무리 봐도 부녀끼리 할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이러다간 나중에 누가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천교수는 늘 밥을 해줬어!’라는 대답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나메는 같이 요리를 해볼 것을 제안했다·
게임이었다면 제작 난이도가 5성급은 될 법한 ‘비프 웰링턴’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생존 요리에 묘한 자부심을 보이는 나메가 중간중간 고집을 피우면서 요리의 결과물은 레시피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런 귀여운 장면들이 속속들이 인스타그램에 담기며 또 다른 추억 하나를 적립할 수 있게 되었다·
[NoNaMe_11]
[안녕하세요 노나메입니다·
매일같이 기다려주시는 시청자 여러분께 정식으로 인사를 못 드렸네요·
최근에 방송을 쉬면서 하나뿐인 가족과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공인으로서의 삶이 아직 부담으로 다가와 복귀날짜는 따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가 잠잠해질 때쯤 조용히 돌아와 화면 앞에 모습을 비치겠습니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알아봐주시고 또 응원해주시는 팬분들께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저는 내일 네버랜드에 입고 갈 코스튬을 고르는 중이에요·
이 중에 뭐가 제일 마왕의 뿔과 어울리나요?]
“아델라 너도 의견을 내봐· 뭐가 제일 괜찮은 것 같아?”
카페트 바닥에 엎드려 있는 아델라·
그녀의 등 위에 가로로 교차해서 누운 나메가 물었다·
“으윽 숨 막혀··· 그냥 아무거나 해! 음침한 게 다 거기서 거기인데!”
하지만 아델라는 나메가 세피론 아카데미 행정실에 제출할 10일짜리 ‘현장체험학습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짬을 맞아서 억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메는 몸을 가뿐히 일으켜 아델라의 허리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아아아악 진짜···! 나 허리 끊어진다구!”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똑바로 협조 안 할래?”
내일은 한국마력공사에서 3서클 짜리 ‘마왕의 뿔’이 정식으로 출시되는 날이었다·
사전예약으로 구매한 소비자들과 함께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협조하고 하잖아· 아니 왜 이렇게 쓸 게 많아?”
“하루당 보고서 5페이지밖에 안 되는데?”
“그게 10일이나 되니까 문제지!”
총 50페이지를 빽빽하게 써야하는 의무를 가진 아델라는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했다·
“뿔이 달린 게 또 뭐가 있을까?”
“뭐 악마? 마왕?”
“그런 건 진작 다 찾아봤지·”
“그럼 뱀파이어···? 근데 뱀파이어도 뿔이 있었나? 아니면 바이콘?”
“바이콘은 뭐야?”
아델라가 시선을 회피했다·
“어··· 그런 게 있어 신경 안 써도 돼!”
“다 너무 서구적인 것들이네·”
“할로윈이 원래 영미권에서 온 거 아냐? 당연한 거지·”
나메가 아델라 위로 겹쳐 누워 고민을 시작했다·
마케팅의 기본은 벤치마킹에서 시작한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게 무엇이 있을까·
굳이 분야를 가리지 않아도 된다·
음악 요리 게임 만화 영화···
‘영화?’
한국의 영화산업은 거의 내수시장으로만 작동한다·
한국에서 제일 관객 수를 많이 동원했던 영화의 목록을 떠올려본다·
‘1위부터 3위까지 전부 임진왜란이나 독립운동에 관한 영화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나메는 아델라의 뒷통수를 때리며 유레카를 외쳤다·
“이 왜놈자식!”
“아얏! 또 왜 때리는데! 흥 나 갈 거야 저리 비켜!”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메는 개량한복을 입고 네버랜드 테마파크로 떠났다·
마왕의 뿔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인간이고 마족이고 대동단결하는 한민족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익명의 후원자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아빠라는 울림은 너무 감동이네요!! 300화만에 겨우 불릴 수 있다니 참 오래 기다렸습니다!!
미니서니님 5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나메가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받은 나메는 얼마나 더욱 애교가 많아질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드릴게요!!
베른슈타인님 3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300화면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네요!!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00화 500화까지 열심히 사랑스럽게 봐주세요!!
Jack Pen님 1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일상을 즐기는 나메도 많이많이 사랑해주세요!! 항상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이파리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아마 나메가 폭로하는 파트였나보네요!! 감명깊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ㅎㅎ· 앞으로도 감동적인 스토리를 많이많이 보여드릴 테니 자주 방문해주세요!!
모모닥닥불불님 1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인생 첫 후원이라니 정말 뜻깊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신 독자님들 덕분에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개량한복 나메가 삿된 것들을 물리치러 출발합니다!!
꽃길만 걸으랬더니 물길 위를 걸어버리는 나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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