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96
신성이 공산주의같은 방법을 통해 배분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불꽃이 튄다· 빈말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짜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는 기분 속에서 말문이 막혔던 나는 아주 천천히 말을 정리하여 입에 담았다·
“혹시 그거··· 장수종의 소극적인 개입과도 연관이 있습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천 년을 넘게 살았음에도 밖으로 나서는 게 아닌 안으로 파고 들며 정말 자신들의 힘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확신을 가지지 않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엘프 뤼밍스였다·
반신이라는 개념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언정 영웅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하지만 신화로 치부되는 신성 전쟁을 겪고 싸운 끝에 살아 남은 자들이라면 충분히 영웅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엘프들에게는 세계수라는 절대적인 신앙의 상징이 존재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하나가 세계수를 섬기는 성직자이자 대전사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틸레 이모가 말한 ‘영웅’의 조건에 충분히 부합하는 거 아닐까?
“조카는 생긴 거랑 다르게 엄청 유식하구나?”
거기까지 추측하면서도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알 수 없어 조심스러운 와중에 틸레 이모는 굉장히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매우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심지어 그 반응이 단순 농담이 아니었는지 들고 있던 과일마저 놓친다·
“갑자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제 생긴 게 어디가 어때서요·”
“왕도에 존재하는 질 낮은 술집에서 군림하고 있을 깡패처럼 생겼지· 성격은 더러운데 묘한 야성미로 귀족 영애들에게 이상하리만치 인기가 있는? 심지어 목에 요상한 문신까지 있잖니·”
“제가 살면서 들어본 평가 중 가장 억울한 평가네요· 저만큼 준법과 가까운 사람도 없을 텐데· 게다가 저 정도면 미남이죠·”
“오··· 라예흐단도 그렇게까지 자기 외모에 뻔뻔하지는 못했는데· 이게 청출어람인가·”
솔직히 반박하면서도 무슨 대답이 돌아올 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최근 하도 엮이는 사람들이 큼직큼직해서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덜 나왔을 뿐이지 모험가 일 했을 때부터 밥먹듯이 들어왔던 이야기니까·
다만 너무 오랜만에 이어진 격식없는 주제라서 그런가 묘하게 웃기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서 그런가? 이모도 말을 그렇게 하면서 어딘가 그립다는 듯 아련하게 웃는 걸 보아하니 아버지하고도 이와 비슷한 대화를 많이 나눴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면 이게 문제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추억이 샘솟아· 아무튼 조카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아직은 알 수 없다·’야· 하지만 그리 추측하고 있긴 하지·”
천 년을 넘게 산 엘프는 드물 수 있어도 수백 년을 산 엘프는 드물지 않다· 서방과 달리 이런저런 정보들을 전부 규합하여 기록하는 동방답게 그들은 이를 기반으로 표본을 만들어보고자 꽤 긴 세월을 들여 기록에 들어갔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시대의 영향은 분명 있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중이라는 게 이모의 설명이었다·
가만히 나이만 먹는다고 강해지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이 절대적인 법칙에서 어긋나는 건 오직 용족 뿐이다· 이는 엘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악신과 선신이 격렬하게 맞붙었던 그 시기에만 있었던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관측된 바에 의하면 이는 승천 의식 뿐이니 영향이 있을 거라는 전제 하에서 연구를 이어 나갈 뿐이지·”
“이렇게 막 말해주셔도 되는 내용입니까?”
“왕국을 구한 영웅에게 못해줄 이야기는 아니지· 심지어 신의 사념을 돕기 위한 여정이었다며? 신실함만 놓고 따지면 네가 교황한다고 들고 일어나도 아무도 뭐라 못 할 거 같은데?”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다시 과일을 집어 먹는 그녀를 보며 적당히 웃는 내 얼굴과 달리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한다· 아주 잠깐이나마 사건의 서순이 걱정되었던 탓이다·
‘균형’은 정의감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균형이 보기에 나는 균형에 위배되는 존재일까 아니면 마왕이 회귀라는 거대한 삽질을 수없이 반복하며 저지른 과오와 무게를 맞추기 위해 안배된 저울추 중 하나일까·
고민이라고 할 것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내가 균형에 위배된다고 해서 마왕 모가지 안 딸 거 아니고 저울추라고 해서 하라는대로 할 생각인 것도 아니니까·
결국 어느 쪽이든 최대한 대비해서 움직일 수 있도록 더 준비해야 겠구나 결론만 나올 뿐이다·
“어쨌든 전 그 정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당장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제 힘을 키우는 게 목적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있으면 아예 승천 의식을 통해 제 힘도 좀 뺄 방법이나 같이 찾아주시죠·”
“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반신의 힘을 포기하겠다고?”
“애초에 이미 사념 님의 도움을 받아 한 번 발 뺏었습니다· 막 힘만 쎄지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존재가 되는 거라서 영 취향이 아니더라구요· 안정적으로 껐다 켤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가능하다면 이 기회에 줄여 놓는 게 안전할 수도 있겠네요·”
“뭐어어? 취햐아앙?”
다시 한 번 이모의 손에 들렸던 과일이 떨어진다· 카펫도 깔려 있고 그녀가 오기 전에도 아침부터 청소했으니 지저분하진 않겠지만 자꾸 저러는 건 좀 지저분하지 않을까 싶어 표정이 좀 이상해졌는데 그런 내 반응과 거의 동시에 이모에게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지실 나이는 지나신 거 같은데···”
“너! 지금 그런 말과 반응을 보여줘 놓고 웃지 말라는 건 너무하지! 어쩜 이런 것마저도 규모가 남다르지? 조카 반신 다음이 뭔지 알잖아? 신이라고 신!”
“딱히 그런 계단식 구조는 아닌 거 같았지만 뭐··· 길이 열리는 거 같긴 했었죠?”
“세상에 얘 좀 봐· 16살짜리 애가 후천신이 될지도 모르는 역사적인 순간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어쩜 저리 귀찮은 티를 낼 수 있을까!”
그야··· 귀찮은 게 맞으니까···!
그래도 이모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좆같은 감각을 직접 겪기 전까지 좆같다고 인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하흐··· 미친다 정말· 조카 그 말 후회 안 할 수 있지? 그 조건이면 라단의 모든 교단들에게 도움을 강요하는 게 가능해· 정확히는 그들이 먼저 돕겠다고 나서는 수준이겠지만·”
“절대 후회 안 합니다· 매번 싸울 때마다 얼마나 불안한데요·”
그래도 이번엔 뭔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마무리됐지만 난 여전히 그 원인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건 숙원 성취 이어지는 미래지 언제 공멸로 끝날지 알 수 없는 핵폭탄이 아니다·
그런 내 대답에 틸레 이모의 웃음기가 조금씩 잦아든다·
“반대로 말하면 그 힘이 없으면 상대할 수 없는 상대들과 싸우고 있다는 뜻이잖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근데 어차피 지금의 저보다 더 강하면서 반신이라는 위협과는 담 쌓고 사는 분들도 많잖습니까· 그리 되면 되죠 뭐·”
“마스터 급에 오르겠다는 말을 하는 데도 그게 헛소리가 아니라 자신감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네···”
기가 막히다는 듯 떨어진 과일을 다시 주워 우물거리던 이모는 한참이 지나서야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신 근처에서 못 간 내가 뭘 알겠니· 그 조건으로 설득할게· 하지만··· 설령 통과되더라도 사람이 붙을 거야· 승천 의식은···”
“능력있는 자의 손에서 악용된다면 모든 신들을 위협할 수도 있는 지식이니까요?”
대답은 웃음 섞인 끄덕임이었다·
◈
엘드미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방을 나선 틸레는 별 생각없이 닫힌 문을 돌아보고는 작게 웃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나온 말은 아닐 텐데·”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한다· 나는 어땠더라· 성녀였을 때도 성녀직을 내려놓고 교단의 고위인사가 되었을 때도 나아가 지금에 이르는 매 순간순간 욕망이 함께 했다·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욕망 더 위대해지겠다는 욕망 최소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왕국의 평화를 깰 수 없게 만들겠다는 욕망·
그런 자신에게 반신의 가능성이 있었다면? 당연히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받아 들이고 후회조차 하지 못했겠지·
“어째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한 조카에게 도움만 받는 기분이네·”
엘드미아와의 대화에서 얻은 반신화의 정보는 굉장한 거였다· 겨우 ‘다른 존재가 된다·’는 단 한 마디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세상엔 반신이 되거나 되지 못한 사람들만 있었을 뿐이니까·
“폐하께 요구 사항에 대해 보고 드리고 각 교단의 수장들에게 연락하여 따로 회의를 잡도록· 그리고 반신이 된 자들의 기록 안에 갑작스러운 성격의 변화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라고도 전해· 인격의 변형이 일어날 가능성을 엿보았으니 만약 정보들이 일치한다면 토론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도 언급하고·”
“이후 에가 경을 향한 지원은 어떻게 편성할까요?”
“최대치까지 상정해· 서방이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야· 장기적으로 봐야지·”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정당한 명분이 있으니 딱히 켕기지는 않는다· 엘드미아 에가가 죽으면 라단에게 있어서도 막대한 손해니까·
이젠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을 모두에게 납득시킬 방법을 고민하는 틸레의 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기가 낫질 않습니다···
다행히 어찌저찌 글은 썼지만 이번주는 좀 위태위태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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