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2
내가 누구?
전설 속 대악마의 손아귀에서 비탄에 빠질 뻔한 라단을 구해 낸 용사 엘드미아·
가 아니라·
“아니 그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대륙 역사상 최초로 성검을 날려 먹은 사상 초유의 쭈구리 엘드미아·
입을 열 때마다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줄 알았던 시선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데오니 성녀님이 착 가라앉은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을 말씀해주십시오·”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방문한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침착함이다· 하지만 침착하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화나면 뿔로 벽부터 들이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수 차례 목격하며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으음··· 그게··· 루할 시나가 좀··· 특이한 악마라서···”
그런 그녀와 아실리에 그리고 에스뮈에를 앞에 둔 채 나는 라단에서의 일들을 다시 한번 풀어놓기 시작했다·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둘 이상 되었을 때 그 둘이 사이가 좋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정답은 ‘큰일이 터졌을 때 두 배 이상으로 혼난다’ 입니다·
결국 내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에스뮈에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루할과의 전투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듣게 되었다·
당연히 이는 곧장 아실리에에게로 전달되었고 캬루베로스 패듯이 일방적으로 악마를 패러 간 줄 알았던 아실리에는 루할 시나와 있었던 교전에 대해 이야기하자마자 뒷목을 잡으며 성녀님께 서신을 보냈다·
비록 지금 내 몸 상태가 멀쩡하긴 해도 ‘또’ 신성력을 폭주시킨 거였으니 조금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라단에서 이미 수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달라붙어 확인을 마쳤다고 설명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정확히 이틀 만에 데오니 성녀님이 우리 집에 나타나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상황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제가 에스테를 막 이렇게 만들려고 만든 게 아니라···”
“용사님·”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던 성녀님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절로 말이 멈춘다·
“지금 ‘저희’가 신경 쓰는 건 ‘그깟’ 성검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악과 싸우고도 정녕 용사님이 무사한 게 맞는지 신경 쓰이는 것이죠·”
“옙···”
한 교단의 성녀가 성물 폄하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 에스테가 뭐라 뭐라 구시렁거렸지만 어차피 나 아니면 들을 수도 없었기에 굳이 전달하진 않았다· 괜히 그런 거 전달했다간 나만 곱절로 혼날 분위기가 너무나도 또렷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라단으로 향하시는 걸 납득했던 이유도 마왕군과의 조우를 최소화하고 신성력을 자극하지 않을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랬거늘 마왕의 편린과 교전을 치렀을 때도 무사했던 성검과 장비를 파괴시키면서까지 싸워야 하는 적을 홀로 상대하시다니요? 차라리 마왕군과 푸닥거리를 하는 게 나았을 상황입니다·”
“그게 악마들을 좀 써서 혼자까진 아니었기도 하고 그··· 미리 알았으면 뒤로 빠져서 기회를 노렸을 텐데 걔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우물쭈물 내뱉는 변명아닌 변명에 기어이 성녀님의 눈마저도 도끼눈으로 변했다가 깊은 한숨으로 이어졌다·
“대관절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이번엔 무사하셨으니 망정이지 또다시 폭주가 터졌다면 정말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족 성직자들은 용사님의 상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알죠···”
건강하다는 건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나도 결국은 인족이니까·
하지만 폭주로 인해 문제가 터지면 반밖에 파악 못 할 가능성이 있다· 나머지 반은 마력과 연결되면서 생기는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폭주하는 신성력만 어떻게든 갈무리하면 마력은 내 노력으로 어찌저찌 커버하면 된다는 마인드였지만 아무래도 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땐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위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하아··· 이젠 불안해서 안 되겠습니다· 교단에서도 사람을 한 명 붙이겠습니다· 전투 수행 능력은 좀 떨어져도 치유에 특화된 인물을 엄선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엑·”
하지만 그 모든 걸 이해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성녀님의 결정엔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엑이라뇨? 어떻게 지금 그런 반응이 나오실 수 있습니까?”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사생활적인 측면에서 좀···”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지만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금 내 연애 전선은 초극비라 해도 무방하니까·
아무리 에스뮈에가 의중을 감추지 않는 적나라한 행보로 나와의 친분을 과시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시에 불과하지 기정사실의 유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레비엥 변경백과 공간을 베는 검사가 되어버린 오가토르프 가문의 소가주까지 엮였으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나는 어떨지 몰라도 정치 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세 사람들은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 내 반박을 듣고 처음엔 어이가 없다는 듯 진중했던 얼굴을 당혹감으로 가득 채운 성녀님이었으나 아실리에와 에스뮈에를 보고는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용사님이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만 따라 붙는 형식으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성검부터 보죠·”
결국 어정쩡한 타협을 끝으로 불편하기 짝이없었던 이야기의 주제가 드디어 에스테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성검이고 그걸 망가뜨린 건 나였기 때문에 자루만 남은 에스테와 검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칼날 조각들 앞에서는 죄스러움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다·
조각도 다 회수한 게 아니다· 에스테가 신성력을 회복한 이후에도 제대로 된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절반 정도는 찾는 걸 포기해야 했다· 남은 절반도 날아와서 검신에 달라붙은 게 아니라 잔해 속에 파묻혀 있다가 빌빌 기어나오는 걸 겨우 찾아내서 모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에스테는 검으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에스테의 구시렁거림이 계속 이어지는 걸 차마 막을 수 없었다·
“여러모로 전례가 없는 일들의 연속이군요· 솔직히 평소에도 그렇게 산산이 깨진 검신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긴 했습니다만···”
내 잘못을 언급할 때보다는 한결 나은 얼굴로 에스테를 바라보던 성녀님은 이내 팔짱을 끼며 고민에 들어갔다·
“보통 성물이라 함은 위업을 함께 한 무구에 신성이 깃들면서 격이 오르는 것인지라··· 파괴된 성물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사실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도 듣기 힘드니까요·”
“뭐 좀 더 근본적으로 따지면 그렇기도 하죠·”
심지어 성검 에스테는 성창 에스테가 존재함에도 마력과 신성력이 제멋대로 뒤틀리는 와중에 과거의 인격이 파생되면서 만들어진 이레귤러 중의 이레귤러다· 그마저도 당시 성창 에스테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다른 검으로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고 해서 에스테 Mk3가 나올 거 같진 않다·
“용장분들의 노력으로 신전은 완공되었으나 두고 온 지식까진 다 채울 수 없었으니 우선 다른 교단의 도움을 받아 기록을 좀 찾아봐야겠군요· 그리고··· 일단 레비엥에 상주 중이신 몇몇 용장들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성소가 완공되면 계시라도 받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니·”
그리 말하시면서 에스테를 챙기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앞서 ‘그깟 성검’이라고 표현하셨던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성검 수복이 끝나기 전까지 용사님은 무조건 휴식입니다· 어차피 무기도 없이 뭘 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렇긴··· 하죠·”
“대답이 어째 시원찮습니다만·”
기어이 성녀님도 엘드미아 불신 라인에 들어서고 만 것인가···!
내가 뿌린 씨앗이라 겸허히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억울했기에 피눈물을 머금으며 추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럴 리가요· 어차피 장비들도 재점검 받아야 하니 한동안은 수도를 벗어날 생각은 없··· 음 정확하게는 안전한 지역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고치려면 또 드워프 왕국까지 가야 할 수도 있으니 덧붙인 사족이었는데 그 뉘앙스가 영 별로였던 탓인지 나를 향해 쏟아지는 불신의 눈초리만 깊어진다·
“후우 어쨌든 서둘러야 하는 사안인 건 사실이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용사님은 꼭 지금 말씀하신 바를 지켜 주셨으면 좋겠···”
그래도 이번엔 그리 길지 않았다·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성녀님이 멈칫하며 미간을 찡그리자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성녀님에게로 쏠렸다·
“······음· 용사님?”
마치 뭔가 확신이 안 선다는 듯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듯한 모습으로 한참을 그리 어중간한 자세로 서 있던 성녀님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도끼 어딨습니까?”
···에스테를 살피느라 조금이나마 풀렸던 얼굴이 다시금 불신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예? 갑자기 무슨 도끼요?”
“왜 그거 있잖습니까· 막 던지시던 양손 도끼·”
“아··· 카쿨라의 도끼요?”
갑자기 그건 왜? 나도 마지막으로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눈알을 굴리려던 찰나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호다닥 달려간 아실리에가 끙끙거리며 도끼를 들고 왔다·
“아니 그건 왜 들고···”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뭐가 통하긴 한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카쿨라의 도끼도 성녀님께 양도된다· 이에 한 손에는 에스테를 한 쪽 어깨엔 카쿨라의 도끼를 짊어지게 된 성녀님이 이제는 익숙한 도끼눈을 뜨며 나에게 통보했다·
“도끼도 압수입니다· 이번엔 진짜 쉬십시오·”
그리고 나는 나라 잃은 얼굴로 집을 나서는 성녀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거 엘드미아 혐오야···!”
진짜로 쉴 생각이었다고!
심히 억울한 대우에 작게나마 하소연 해봤으나 정작 들어 주는 이는 회의가 끝났음을 눈치채고 싱글벙글 다가온 라이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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