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3
데오니 성녀님이 도끼까지 들고 레비엥으로 향하고 난 뒤 한 차례 소강상태에 이르러 숨통이 트이게 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라이카와 함께 저택을 둘러보는 거였다·
내가 자기 집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는 역마살 낀 놈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라단에 간답시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저택이 아주 마개조되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져서 잠깐 자리를 비운 건 아니지만 아무튼 마개조는 진짜다·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조작해서··· 아하 비밀문·”
문제는 이 어르신들이 단순한 마개조를 넘어 집안을 아주 던전으로 만들어 놨다는 점이다·
혼자서는 이걸 다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친절하게 가이드 북까지 몇 부 만들어서 티에에게 맡길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었던 그들의 사전에 과유불급이라는 단어는 업었던 것일까· 엄청난 정성을 쏟아부은 결과물은 하루 종일 저택만 탐방했음에도 절반 정도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결과물들도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건물 외벽에 습격을 대비해 내장재로 특수 합금을 박아 넣었다든가 일정 규칙에 따라 조작하지 않으면 절대 드러날 일 없는 세이프 룸을 만들어 놓았다든가 비슷한 형태로 지하 수로로 이어지는 무허가 건축물 같은 비밀 통로가 있다든가·
진짜 이 양반들은 혼자 다른 세계관에서 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복잡한 설계들을 이틀에 걸쳐 확인한 나는 결국 다 외울 수 없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저택을 탐방하는 내내 들고 다녔던 가이드 북 한 권을 내 방에 비치해 두기로 결정했다·
“오 드디어 저택 탐방이 끝난 것이더냐?”
그렇게 삼일을 맞이하게 된 날 간만의 외출을 위해 정장을 입고 내려오자 거실 소파에 누워 쿠키를 집어 먹으며 이런저런 문서들을 훑어보던 에스뮈에가 내 손에 가이드 북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개조된 집도 적응이 안 되고 네가 우리 집 거실에 누워 있는 것도 적응이 안 되네···”
“원래 삶의 질이 너무 갑작스럽게 올라가면 적응하기 쉽지 않은 법이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동거를 삶의 질 상승이라 확언하는 에스뮈에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잠깐 옆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문서들 중 아무거나 하나를 주워 읽어보려 시도했으나 하필 주워도 온갖 숫자들이 적혀 있는 명세서 같은 문서라서 다시 곱게 원래 자리로 내려놓았다·
액수가 천문학적이라는 것만 알겠네· 그런 나를 뭐 하냐는 듯 바라보던 에스뮈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썹을 휘더니 헛웃음을 터트린다·
“이틀 동안 저택을 구경했으면 좀 쉴법도 하거늘 어찌 가만히 있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뒤척이느냐·”
“딱히 그런 건 아닌··· 아닌가? 맞나?”
반사적으로 반박하며 내 행동과 할 일을 되새겨 봤더니 이게 웬걸? 놀랍게도 에스뮈에의 평가가 거침없는 팩트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일정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이렇게 잠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발쿤 씨를 비롯한 지인들을 찾아 인사를 돌릴 생각이었으니까· 칼들고 싸우지 않으니 휴식이라면 휴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루 종일 그러고 다닐 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하고 나니··· 쉰다기보다는 직접 발로 뛰는 영업 사원의 하루 일과 같은 기분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쉽게 피로해지지 않다 보니 자꾸만 휴식의 범주가 넓어지는 건가· 갑작스러운 화두에 팔짱을 낀 채 한참을 고민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에스뮈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쿠키가 담긴 그릇을 들고 내 무릎에 앉더니 대뜸 입에 쿠키를 집어넣었다·
“전사의 체력이라는 게 원래 일상적인 활동으로는 쉬이 떨어지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대는 좀 과하구나· 평소에 마력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니 피로를 느낄 법도 한데 정작 지난 이틀간 식사와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잖느냐? 안 피곤하더냐?”
“음 피곤하다기엔 미묘한 상태이긴 했지· 그렇다고 잠이 안 오는 건 또 아닌데·”
오히려 반신의 영향을 받아 극단적으로 잠이 줄었을 때와 비교하면 숙면을 취했다· 혹시나 싶어 몸 구석구석 마력을 돌려보는 동안 넙죽넙죽 주는 쿠키를 다 받아먹자 거기에 재미가 들렸는지 웃는 낯으로 계속 쿠키를 넣어 주던 에스뮈에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이거 어째 그대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경우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사람도 기계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망가지는 법이라며 케이크를 먹었을 때와 흡사하지 않더냐·”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어·”
그리고 그 기억은 휴식이라는 단어를 두고 진중하게 고민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작 그녀한텐 휴식을 권장한 주제에 내가 무리를 하면 좀 테가 그렇잖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피로와는 거리가 멀다· 자각을 한 채 오늘의 일정을 되새겨보다 보니 하는 일은 업무스럽지만 실상 내 감각은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 보러 가는 기분에 가깝다· 이를 최대한 정리해서 대답하자 에스뮈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그러면 되었느니라· 기껏 온전히 그대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배려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가 쉬지 못하면 본말전도라서 해 본 말이었느니라·”
“···엥? 그런 거였어?”
“여가 그대의 귀가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당연하지 않느냐· 그냥 매일 같이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긴 하다만 여는 그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은 사람이니라·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지· 그러니 혼자 쉴 수 있을 때 많이 쉬어두는 게 좋을 것이니라·”
묘하게 장난기 가득한 미소와 함께 대화를 마무리 지은 에스뮈에는 다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곁에 있으면 업무에 집중이 안 되잖느냐· 빨리 가거라·”
이거 또 묘한 배려를 하게 만들었구나 싶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해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문서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시로 오락가락하던 그녀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쿠키 하나를 물려주는 것으로 화답하며 저택을 벗어나자 거실에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인기척들이 갑작스레 느껴진다· 그제야 에스뮈에와 대화하는 내내 사용인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나는 뒤늦게 티에와 맺은 고용 계약을 상기하며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교단하고 계약하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이젠 상상도 못하겠네·”
여러모로 인복이 넘치는 삶인 것을 새삼 감사히 여기며 걸음을 옮긴다· 원래 목적지는 발쿤 씨의 대장간이었지만 에스뮈에와 대화를 나누고 나니 우선순위가 틀렸다는 자각이 생겨서 계획을 수정했다·
무방비하게 이루어진 용사의 외출이었지만 시선을 끄는 일은 없다· 외출을 할 땐 마차나 말을 타는 게 상식인 귀족 지구의 장점 중 하나로 걸어서 움직이면 아무리 복장이 좋아도 사용인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인 줄 알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예전에 살던 집이었다면 아주 난리가 났을 터이니 참 시기적절한 이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시답잖은 감상을 하며 도착한 곳은 오가토르프 저택이었다·
“어···? 어어?”
“여어 오랜만입니다· 셰릴 있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저택의 모습에 반가움 한 번 익숙한 문지기의 얼굴에 반가움 또 한 번 그 익숙함과 별개로 얼빠진 모습에는 우스움 한 번· 일부러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줬음에도 불구하고 엘드미아의 방문과 용사의 방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문지기는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고는 어떤 확인 절차도 없이 활짝 문을 열었다·
“엥· 그거 그렇게 막 열어도 됩니까?”
“따 따로 지시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여기서 일했을 땐 오고 가며 얼굴도 봐서 반말하던 사이인데 자동으로 존대를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모습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오그웬 사람들과 비교하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으나 다행히 그 씁쓸함은 나를 마중 나온 사람과 마주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랜만이군요 엘드미아·”
얀 그리드시 오가토르프 가문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집사장님은 문지기와 달리 언제나 봐 왔던 것처럼 신사적인 태도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겹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강녕하셨습니까 집사님·”
“섬기는 가문은 강성하고 반가운 얼굴도 봤으니 세월의 야속함을 제외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좋다고 할 수 있겠군요· 아가씨를 뵈러 왔나요?”
“어찌 아셨습니까?”
“이 시간에는 가주께서 계시지 않다는 걸 당신이 잊을 리 없잖습니까·”
“이미 왕성으로 향하셨을 시간이긴 하죠·”
별거 아닌 대화만으로도 웃음꽃을 피우며 저택으로 들어서자 집사장님은 자연스럽게 나를 안내하며 말을 이어나가셨다·
“그래도 운이 좋았습니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아가씨는 전장에 계셨거든요· 하마터면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계속 전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건가요?”
“대체로 그랬습니다· 이젠 어느 정도 정리된 거 같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아가씨께서 직접 말하고 싶어 하실 테니 아껴두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웃으며 말을 아끼는 집사장님과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도착한 정원은 내 마지막 기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아주 잘 가꿔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집사장님을 뒤로한 채 나아가니 새삼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물론 대부분은 셰릴과의 대련으로 점칠된 추억이다· 하지만 연무장이나 자기 방도 아니고 이 시간부터 셰릴이 여기에 있다는 건 좀 신기했다· 다른 사람하고 여기서 대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랑 맞물린 건가?
그런 내 작은 의문은 셰릴과 자주 대련했던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해결됐다·
“오랜만·”
내 키를 훌쩍 넘기는 덤불을 지나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셰릴이 반응한다·
솔직히 말하면··· 얘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감이 안 온다· 보이는 건 정원 한 켠에 위치한 벤치에 멀뚱히 앉아 검집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인데 아침부터 왜 저러고 있는 것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공간베기 능숙해졌어· 볼래?”
하지만 셰릴이 이어서 던진 한 마디만으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게 됐다·
“당연한 걸 물어보네· 당장 봐야지·”
능숙해진 공간참 어떻게 참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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