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2Chapter 172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일까·
완전히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난 갑옷· 그리고 원래 그랬다는 듯이 텅 빈 내부를 보니 눈썹이 찌그러지는 기분이 든다·
“비었어?”
조금 전까지 마력을 사용해 경공을 펼치고 빛의 검을 소환해 전투를 펼치던 기사들이다· 분명 인기척이라는 것이 느껴졌고 나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려는 행동은 영락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마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 어?”
나의 질문에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녀’가 고개를 몇 차례 털어내고는 얼타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렇게 쫓겨본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던지 곧장 옆으로 달려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지금··· 지금 도망가야 돼·”
“응?”
“위치가 발각됐어· 놈들이 작심하고 몰려오면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감당하긴 어려울 거야·”
마녀의 보라색 눈동자에 격렬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것이 공포인지 긴장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느낌상 긍정적인 감정의 변화는 아닌 듯싶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혹시 달리기 잘해?”
“못하진 않을걸·”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주변을 얼려 버린 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던지 내가 마법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따라와· 마법은 되도록 쓰지 말고·”
“왜?”
“마법을 쓰면 아까 그놈들한테 추적당할 수 있거든·”
곧장 몸을 돌린 그녀가 숲이 우거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마법사는 아니었던지 상당히 빠른 속도·
‘마법은 사용하지 말랬지?’
경공이나 보법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달리기는 오랜만이었지만 나는 적당히 그녀의 속도를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기의 심장을 쓴 탓에 서늘하게 내려간 체온이 천천히 되돌아온다·
그러기를 한참· 우리는 산속 깊은 곳에 숨겨진 협곡 앞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
협곡의 입구에는 자연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인 흐릿한 마력이 넓게 퍼져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그 앞에 도착한 그녀가 마치 마임을 하듯 공중에 손을 올리고는 어느 세상의 말인지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단단한 벽에 손을 올린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 그녀의 손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이질적인 마력이 어느 정도 흩어졌을 때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됐어· 결계에 1분 정도 구멍을 냈으니까 이제 길이 보일 거야· 따라와·”
“구멍을 냈다고? 그럼 아까 그놈들도 들어올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1분만 뚫었다고 했잖아· 아무튼 빨리 들어와 이거 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그녀의 말에 나는 가만히 수긍하며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지금 그녀의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보니 ‘열려라 참깨’ 한다고 쉽게 열리는 결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놀라지 않네? 수상하게시리·”
“뭘?”
“보통은 절벽이 갑자기 짜잔 하면서 열리고 협곡이 드러나면 신기해하는 게 자연스럽잖아·”
아 손으로 허공을 짚은 게 절벽에 손을 올린 거였군·
“뭐 놀랍긴 했지 근데 나도 웬만큼 신기한 현상은 이미 다 겪어봐서 말이야·”
“음··· 뭐 아까 그 얼음 마법 썼던 거 생각하면 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 너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구나?”
사실 절벽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게 ‘빠른 납득’이라는 정신계 면역 스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성좌가 되어 격이 오른 탓에 어지간한 환영은 꿰뚫어 볼 능력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나의 패를 다 까버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아직 이 여자를 완전히 신뢰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 왔어·”
협곡 깊숙한 구석에 지어진 자그마한 잡동사니 집·
이 집을 지은 사람이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집이 절벽 아래에 덩그러니 지어져 있었다·
“디자인이 어색한데 참 익숙하네·”
평범하지 않은 형태· 일본의 애니메이션 나온 ‘금발 미남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것과 흡사한 분위기라 혹시나 내부도 그런 반전 매력이 있지 않을까 묘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끼익·
하지만 집 내부는 협소함 그 자체· 문을 열자마자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한 자그마한 벽난로와 그 옆에 빼곡하게 나열된 진열장의 물건들이었다·
마법 도구인지 실험 용품인지 알 수 없는 플라스크들· 마녀라는 것을 어필이라도 하려는지 붉은색의 액체 안에는 실험용 개구리 따위가 줄줄이 전시되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네·”
내가 가만히 집 내부를 감상하고 있자 그녀가 한숨을 쉬듯 운을 띄웠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지금까지 꽤 많은 피난소를 전전했거든·”
그녀가 주변에 있던 낡은 나무 의자를 질질 끌고 오더니 탁자 앞에 적당히 배치했다·
“우선 앉아·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뭐라도 대접해야지·”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우선 의자에 앉았다· 남의 집에 와서 멀뚱히 있는 것도 어색했는데 다행인 듯싶다·
진열장을 뒤적거리는 그녀· 위에 놓여 있던 것들이 썩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는지 대충 쓱쓱 밀어내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더니 내 앞으로 가져 왔다·
달칵·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갈색 가루· 그리고 뚜껑이 열리는 순간 나의 코에 들어온 향에 나는 그것이 코코아 파우더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보지? 아껴 먹는 건데 내가 선심 쓴다·”
“선심을 쓴다기보다는 생색내는 거 같은데·”
“아무튼 먹는 거 보여 줄 테니 잘 봐·”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에 그녀가 피식하고 짧은 콧소리를 낸다·
나무 상자에 들어 있던 작은 티스푼을 사용해 코코아 파우더를 한술 뜨는 그녀·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나는 감탄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텁·
“엥?”
그녀는 코코아 파우더를 입에 털어 넣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꼴깍하며 파우더를 삼키더니 나에게 티스푼을 내밀었다·
“너도 한 입 먹어· 대신 너무 많이 먹지는 마· 스승님이 옛날에 선물해주신 건데 더 이상 구할 수가 없거든·”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우선 이 세계는 코코아 파우더라든가 그 외에 가루 형태의 차가 익숙한 문화는 아닌 모양·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말한 ‘스승’이라는 존재였다·
“혹시 네 스승이라는 사람 어디 출신이야?”
“응?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그냥· 나랑 고향 사람인가 싶어서· 나한테 이 가루는 상당히 익숙한 물건이거든·”
나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내 스승님이랑 네가 같은 고향 출신이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아니 어딘지 맞추기라도 하면 내가 이거 너 준다·”
“어허· 공수표는 함부로 던지는 거 아니야·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는 중이거든·”
“킥· 그래? 내 스승님 고향이 어딘데?”
그녀가 여전한 웃음기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는 것을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는 모양이었다·
“지구·”
“헹 뭔진 몰라도 아닌···”
“한국 중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네덜란드 러시아 인도 우크라이나·”
나는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국가를 하나하나 읊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는 타이밍이 있었다·
“프랑스?”
“···”
“이탈리아구나·”
이탈리아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녀가 당황하며 코코아 파우더를 슬그머니 챙긴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파팟!
“아악! 돌려줘!”
“약속했지 않나?”
“그냥 한 말이잖아! 농담!”
“그러게 공수표는 함부로 던지는 게 아니라고 했거늘·”
나는 코코아 파우더를 향해 온몸을 날리고 있는 그녀를 적당히 밀어냈다· 진지하게 이 정도로 집착하는 정도면 중독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너희 스승은 어디 있는데?”
나와 같은 지구 출신의 존재가 12층에 있다면 그가 이 세계의 성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성좌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이 여자는 그 성좌의 화신이겠지·
하지만 나의 물음에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대답하기를 꺼려한다는 느낌인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지금 나는 여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거든· 그리고 그 정보를 네 스승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나의 말에 그녀가 잠시 턱에 손을 올리더니 미간을 찌푸린다· 이제 보니 인상을 찡그리는 게 집중을 할 때 나오는 습관인 모양이었다·
“스승님과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했지?”
“맞아·”
그녀의 물음에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즉답에도 그녀는 아직도 내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당신이 스승님과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걸 한 번 증명해 봐·”
그 이탈리아 출신의 성좌에게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 그나저나 갑자기 증명해 보라고 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아·”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에 놓여 있던 작은 컵 하나를 가져 왔다·
“혹시 지금 마실 수 있는 물 있어? 우유가 있으면 더 좋고·”
“···갑자기 그건 왜?”
“증명해 보라며·”
코코아의 음용법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 나와 같은 세상에서 온 사람이 코코아를 선물하며 이걸 먹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
“하아아···”
데운 우유에 탄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한껏 나른해진 표정으로 구석에 있던 소파에 흘러 들어가듯 풀어진다·
“이게 원래 이렇게 먹는 거 였구나···”
나도 어릴 적 코코아를 가루 째로 털어 먹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달달한 느낌은 있어도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은 이렇게 우유에 녹여 먹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제 믿어?”
“응· 이상하게 신뢰가 가네· 굳이 네가 거짓말할 이유도 없는 것 같고·”
역시 디저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단 게 입에 들어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경계가 풀린 그녀는 꽤 편안한 표정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이제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아·”
나의 물음에 풀려 있던 그녀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뜸을 들이는 모습·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너 혹시 성좌라는 말을 알아?”
“대충은·”
“놀라지 말고 들어· 내 스승님이 이곳을 관리하는 성좌야· 나는 스승님의 화신이고·”
여기까지는 내 예상 범위· 하지만·
“나 말고도 화신이 더 있어·”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데·”
“···”
그녀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문다· 무겁게 열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내 스승님은 납치를 당했어·”
“···응?”
“본인의 화신한테 말이야·”
12층에 입장한 이후로 아직까지 성좌의 메시지가 없었던 이유·
자신의 화신들에게 봉인 당한 성좌를 구하려는 외로운 화신의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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