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5
사람의 인연은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편이다. 예시조차 너무 많아 콕 집기가 어렵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나도 모르게 인연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황태자 한 명 때문에.
“신기하군. 세상에서 가장 추운 지역과 세상에서 가장 더운 지역의 공녀 공주가 한자리에 모이다니.”
“네가 모았어.”
“나도 안다네. 그냥 신기해서 그런 걸세.”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침 식사나 하자고 권유했던 카라스. 나는 그의 말을 수락했다.
그런데 나 혼자만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포함돼 있더라.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도 만만치 않죠. 특히 여름은 습도 때문에 엄청 찝찝하더라고요.”
“그것도 그렇지. 아카데미만큼 사계절이 뚜렷한 곳도 잘 없으니. 프로즌은 1년 내내 추운 편이지 않나?”
“네. 추버요.”
카라와 레이나가 포함돼 있어서 문제지. 불행 중 다행인 건 다이애나가 없다는 걸까.
다이애나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나 같아도 쉬고 싶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침 식사는 나 카라스 카라 레이나가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원래라면 수업에 들어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괜찮다.
이번 실습처럼 하루를 꼬박 새우는 실습이라면 서로 합의된 상황이다. 그러니 조교에게 오침을 부여하는 거고.
아무리 강한 사람이어도 잠을 못 자면 기력이 급격히 하락하기 마련이다.
‘이 사람들은 밤샘에 자신 있으니까.’
카라스는 하루 못 잔다고 빌빌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머지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고.
오침하러 간다 해도 낮잠 자는 거랑 비슷하겠지. 눈 감고 뜨면 금방 생생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이 조합은 신선하다 못해 시원하다. 특히 레이나가 합류했다는 것 자체가.
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은 어색할 텐데 자연스레 낀 걸 보면 기분이 묘하다.
“레이나 공녀. 무례할 수도 있지만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네.”
“혹시 혀나 다른 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공용어가 좀 아니 많이 어눌해서 그렇네.”
“…”
하마터면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돌직구를 날리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나 레이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민망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끼로 대가리 쪼개버릴까?”
“…”
“아.”
역시 레이나도 만만치 않구나. 모국어라지만 면전에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다만 뒤늦게나마 아차했는데 내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시바르. 레이나 공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
“자기도 아쉽다고 말했어. 공용어 못 하는 거.”
“흠. 그렇군.”
이럴 때는 어떻게든 커버를 쳐야겠지. 카라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나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공용어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지 않나요?”
“제가 공부를 못해서요…”
“공부를 못한대.”
어쩌다 보니 레이나를 대신해 통역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편하다.
카라는 내가 통역해준 말을 듣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 딴에는 공용어가 쉬웠다는 반응이다.
카라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공용어를 배우는 것 자체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내가 언어 쪽 능력에 특화돼 있다는 걸 고려해도 난이도 자체는 쉬운 편이다.
‘동방 쪽은 조금 고생하겠지.’
대신 서방 쪽 문법이 기준인지라 동방은 배우기 까다롭다. 그래도 난이도가 쉬운 건 부정할 수 없다.
레이나는 정말 순수한 의미로 공부를 못해서 공용어를 못하는 거에 가깝다.
“공부를 못한다라…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공부다만?”
“다들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이상하게도 글이 안 읽히더라고요.”
“다 그런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글이 안 읽힌대.”
“비유적 표현인가 아니면 진짜인가?”
“진짜에요. 제 모국어도 힘든 상황인데.”
레이나는 억울하다는 뉘앙스로 대답했다. 얼마나 심하면 모국어마저 읽기 힘든 상황이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쪽 눈을 치켜떴다. 다른 사람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와 비슷한 반응이다.
정신 쪽에 하자가 없는데도 모국어조차 못 읽는다? 문맹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다.
심지어 그녀는 프로즌의 공녀다. 가문에서 가정교사까지 붙였을 텐데 문맹인 건 말이 안 된다.
“모국어도 힘들다고요? 그게 가능해요?”
“그게… 약간 글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해야 하나? 연습하면 되긴 하는데 글씨체가 바뀌면 말짱도루묵이에요.”
“글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말했어. 연습하면 되는데 글씨체가 바뀌면 의미가 없대. 그거 진짜야?”
마지막은 내가 직접 질문한 거다. 레이나는 내 질문을 듣고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더한 의구심이 들었다. 소울 월드의 레이나는 무력이 뛰어난 반면 지능이 반비례한 캐릭터에 가까웠다.
지능보다는 지식이라고 해야겠지. 전투 센스가 뛰어난 걸 보면 지능에 문제가 없다.
단지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무식하게 느껴질 뿐이다. 스스로 읽은 책이 거의 없는 사람.
“흠. 잠깐만 기다리게.”
카라스도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꼈는지 품 속에서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뒤이어 거기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모두 쓴 후에는 우리에게 보여줬다. 나는 그 글을 유심히 바라봤다.
‘인삿말이네.’
공용어로 ‘안녕하세요’를 적은 카라스다. 간단하디 간단한 인삿말이다.
고의적인 건지 아니면 본인 필체인 건지 필체 자체는 평범 이하에 가까웠다. 악필까지는 아니다.
“모두 읽을 수 있겠나? 공용어로 적은 걸세.”
“네. 읽을 수 있어요.”
“읽을 수 있어.”
“레이나 자네는?”
“끄응…”
레이나는 눈에 힘까지 주며 읽기 위해 노력했다. 잘 안 읽히는 모양이다.
아무리 대충 적었다지만 이것도 못 읽는 거면 심각한 건데. 레이나는 인상을 구기더니 이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못 읽겠어요. 뭐라고 적은 거예요?”
“간단한 인삿말일세. 안녕하세요지.”
“그래도 못 읽겠어요. 분명 배운 건데…”
레이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돼서 심란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자책할 필요가 없다. 이 정도로 심각한 거라면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혹시 난독증 아니에요?”
“네?”
“난독증이요. 난독증 환자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카라의 설명이었다. 이어서 카라스가 덧붙였다.
“내가 보기에도 난독증 같군. 그런데 그 정도는 프로즌에서도 진단할 수 있지 않는가?”
“그… 제가 어릴 때 공부하기 싫어서 자주 놀았거든요. 부모님이랑 형제들도 반쯤 포기한 거라… 헤헤.”
“…”
레이나가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막내딸이자 막내 여동생이 레이나다.
공부하기 싫다? 그러면 안 해도 돼! 라면서 키웠겠지. 기본 중의 기본만 배우게 하고 끝냈을 것이다.
특히 난독증은 진단하기 은근 어려운 병이다. 하물며 시대가 시대다 보니 ‘문맹’의 비율이 많다.
지구의 중세 시대에서도 문맹인 기사들이 스스로가 문맹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레이나는 무력 쪽에 재능이 출중했으니 거기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난독증일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나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소울 월드에서는 그저 머리가 나쁜 캐릭터로 취급했다.
하지만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난독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어서 공용어를 못 배운 거라니.
역시 현실과 게임은 다르다. 아니 이제는 게임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정말 난독증이라면 치료할 방법이 있나요?”
“난독증을 치료할 방법이 있는지 물었어.”
“병원에 가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요? 진단도 확실하게 할 겸.”
“그게 좋겠군.”
우선 병원에서 확실하게 진단을 받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치료는 천천히 하면 그만이고.
다만 그 과정에서 과연 공용어를 수월히 뗄 수 있는지가 문제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도와주고 싶다.
“난독증도 난독증이지만 공용어부터 제대로 하고 싶은데…”
“공용어부터 제대로 하고 싶다고 말했어.”
“그러면 도움이 필요하겠군. 시바르.”
“우리 조교야.”
그럴 줄 알았다. 나는 곧장 거절의 의미로 말했다.
거절이라기보다는 여건이 안 된다는 쪽에 가깝다. 조교로 활동하는 이상 공용어 수업은 어렵다.
그러나 카라스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방안을 꺼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대신 주말에 같이 있으면 되지 않겠나?”
“주말에?”
“베르체 공녀와 함께 산다고 들었다네. 그녀와 함께 공부를 한다고 했으니 레이나 공녀를 끼우면 되겠지.”
“힘들 텐…”
괜찮은 방법이긴 해도 어렵다. 그레이스가 허락할 가능성도 낮다.
“무엇보다 프로즌 언어를 병행한다면 훨씬 쉬워질 걸세. 여기서 프로즌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지 않는가?”
“어… 그런가?”
“맞는 말이긴 해. 원래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울 때 자국어와 병행하면 훨씬 쉽거든.”
심지어 카라까지 거들어줬다. 그녀까지 합세하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민하면서 레이나를 쳐다보니 이유는 몰라도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더라.
두 손까지 가지런히 모은 것이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새다.
‘…카라스 이 새키 진짜.’
어쩜 이리 선동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걸까. 너무 자연스레 나에게 떠넘겼다.
심지어 명분마저 확실하다. 프로즌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이유.
이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나 말고 그레이스부터. 허락 받아야 해.”
“네! 받을게요!”
“그래. 병원은 꼭 가고.”
“네!”
난독증 진단부터가 시작이다. 거기서 치료도 함께 병행하면 되겠지.
또한 사라에게도 말을 하는 게 좋을 듯했다. 프로즌 공녀가 알고 보니 난독증이었다고 말이다.
‘이러면 프로즌에서 어떻게든 반응을 보이겠네.’
이상하게도 높으신 분들이 꼬이는 느낌이다. 반쯤은 내가 자초한 일이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를 정확한 발음으로 해줄 수 있나요?”
“나는 바보입니다.”
“네?”
“나는 바보입니다. 이거야.”
“음…”
레이나는 순간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나는 바보입니다! 시바르 씨!”
아주 힘차고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푼수 같은 이미지라 정말 잘 어울렸다.
“푸흡.”
“큽.”
“…”
당연히 반응도 비슷했다. 다들 고개 숙여 웃더라.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러자 레이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그거 나는 바보입니다라는 뜻이야.”
“네?”
“나는 바보입니다라고.”
“아.”
속이기 참 좋다.
레이나가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카라가 물었다.
“듣는 건 되지 않았어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자기가 잘못 알고 있는 줄 알았데.”
“그럼 시바르 네 잘못이네.”
내 잘못인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재미있는 걸 어떡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바르: 장난감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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