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8
시조가 있는 곳이 곧 공국의 중심이라 안개 공국에는 수도가 따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시조가 있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티르는 나에게 안개 공국의 가장 뛰어난 부분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같은 손이라도 더 아끼는 손가락이 있기 마련. 아닌 척 공정한 척하면서도 티르는 가장 웅장한 도시로 굳이 가고자 했다.
“에에~ 군국에서 멀어지면 돌아갈 때 귀찮은데.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너는 여기 있으면 되겠구나.”
“섭한 소리를 하신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행을 함께 한 동료잖아요!”
힐데는 웃는 낯으로 들러붙었다. 웃는 낯에 침을 못 뱉는 건 흡혈귀도 마찬가지라 티르도 거칠게 힐데를 내치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힐데… 딱히 악감정은 없으나 뭔가 가까이하고 싶지 않구나.’
정 감정에 종류를 재자면 티르는 힐데를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었다. 힐데 특유의 불성실함이나 냉소적인 어조가 나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마음에 든다고 전부 가까이할 수는 없다.
‘휴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알려고 한다. 공국에 결코 드러나선 안 되는 비밀 따윈 없지만…. 나와 공국에 대해 더 알려주기는 꺼려지는구나. 루스키니아가 죽은 지금은 더욱.’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독심술사인 나만 그 세상 속에 살고 있다. 티르는 그러한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공국까지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터. 네 용건은 무엇이냐?”
은연중에 깔린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챈 힐데가 되물었다.
“용건은 왜요? ‘저’를 빨리 돌려보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군식구로 영원토록 있을 생각이더냐? 용건이라도 들어야 너를 데리고 다니는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
“흐음. 국가적인 중대사인데 길바닥에서 하기에는 좀~ 품격이 안 맞지 않나~.”
“기대할 터이니 준비하고 있거라. 내용이 네 말의 절반이라도 따라가길 바란다. 아니라면 네 가치에 대해 재고해야 할 터니까.”
속내를 숨긴 차가운 대화가 끝을 맺었다. 티르는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했다.
“가자꾸나. 휴. 황혼의 요새는 외침을 막기 위해 지은 도시라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으니. 네게 만월의 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아직 공국에는 네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으니.”
“흠. 가는 건 좋지만…. 티르 괜찮겠어요?”
“괜찮다니? 무엇이 말이냐?”
되묻는 티르를 향해서 나는 제법 깐깐하게 대답했다.
“저는 인간의 왕.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대변자. 그런데 흡혈귀는 인간을 가축이라 여기잖아요? 제 앞에서 인간이 가축 취급당하는 광경도 당당하게 보여줄 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나는 인권운동가가 아니다. 나는 짐승의 왕이고 짐승은 기본적으로 먹거나 먹히는 속성을 갖는다. 다른 짐승을 가축으로 삼으면서 똑같은 짐승인 인간이 가축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단지 내가 군국을 적대하고 뒤집었던 건 군국 사령부의 행보에서 성황청의 개입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군국민이 죄를 짓기도 전에 미래를 읽은 성녀에게 제지되는 것 같아서. 인간이라는 짐승을 자기 입맛대로 재단해 무언가로 바꾸려는 것 같아서 군국을 뒤흔들자는 회귀자에게 힘을 보탰지. 정작 군국 사령부의 모습은 생각한 것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러나 흡혈귀는 어찌 되었든 같은 인간이며 힘으로 통제할지언정 그건 자연스럽다. 애초에 세상 어디나 힘없는 사람들은 가축처럼 다뤄지곤 하는데 뭐.
오히려….
“후후. 나와 이 나라를 너무나 얕보고 있구나. 내 아무리 두려울 게 없다고 한들 네게 나라의 치부를 보일까.”
티르는 내 무례한 질문조차도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기 전에 보여주도록 하마.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해흉의 바다에서 솟구친 해무가 태양을 가리고 구름을 이룬다. 바람을 타고 솟아오른 구름이 거대한 지붕처럼 공국 위를 지나다가 높은 산맥을 만나 정체된다. 그러는 와중 단 한 곳. 낮은 구릉으로 몰려들며 빠져나간다.
햇빛이 범접하지 못해 사시사철 어두운 곳. 언제나 바닷바람이 비릿하게 밀려드는 곳. 그 비린내가 피비린내와 섞여 구분 가지 않는 곳.
비탄과 선혈이 흐르는 안개 공국.
그곳에서는….
“자 쌉니다! 싸요! 모든 종류의 고기를 취급합니다!”
“선지 팝니다! 이거 한 덩이면 두 달치 혈세는 거뜬하다고요! 선지 먹고 피 보충해요!”
“저기. 지금 피 구하는 예일링 어디 없나요? 정 안 되면 트와윗이라도.”
생각 이상으로 활기가 넘쳤다.
시장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어둡거나 칙칙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건 햇빛이 아니라 여유로운 삶과 음식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이곳 사람들의 마음은 밝고 건강했다.
거리 한복판에 선 나는 놀라움에 중얼거렸다.
“왜 잘 사는 거지?”
“우리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일방적으로 피를 수탈해가는 건 천여 년 전에 그만두었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흡혈귀도 인간도 만족시킬 수 없었으니.”
어둠으로 후드를 만들어 쓴 티르는 나에게 활기찬 거리를 자랑하듯 보여주며 말했다.
“목마르다고 피를 다 짜내는 것은 우물을 다 들어내는 것과 매한가지. 우리의 가혹함은 오직 적에게만 향한다. 아군은 살찌우고 보살피지.”
티르의 설명에는 과장이 없었다. 염장 고기 말린 생선 우유와 선지 치즈나 기름 등 인간을 살찌우는 것들이 가득했다. 태양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밀이나 쌀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다양한 식자재를 보면 밥이나 빵이 그립지는 않았다.
특히 눈에 띄는 건 해산물. 간혹 보았던 생선부터 조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토록 다양한 해산물은 안개 공국 아니면 접하기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해흉이 머무는 바다에 나가서 조업을 하는 미친 인간들은 흔하지 않으니까.
거기다 더 중요한 특징은 따로 있다. 안개 공국은 흡혈귀가 귀족인 나라. 흡혈귀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 즉 이 시장에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전부 인간을 위한 음식이군요? 흡혈귀에게는 이러한 음식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이 시장의 경제는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티르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후후. 정답이다. 가끔 심심한 흡혈귀가 입을 대곤 하나 그건 단순한 유희거리에 불과하지. 흡혈귀는 맛을 느끼진 못하니까.”
“다들 빈혈로 골골대고 있진 않네요. 왜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칙칙한 회색빛 도시라고 생각했지?”
“쿡쿡. 크게 틀린 말은 아니구나. 확실히 회색빛은 맞으니까. 그렇지만 피를 너무 많이 뽑아내면 내일 마실 피가 부족해지는 법이라 피를 과하게 뽑아내는 일은 금하고 있다.”
티르는 내 반응에 크게 만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 또한 신기한 마음으로 거리를 관찰했다.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같은 인간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흡혈귀는 같은 인간이라도 약간 다르다. 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인 ‘피’를 요구하지만 그 피를 제외한 다른 건 알 바 아니다. 식욕도 성욕도 수면욕도 없는 흡혈귀는 순수하게 피만을 요구하지 나머지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하물며 그 피조차도 상대가 건강하게 살아있어야만 제공받는 자원이니 흡혈귀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귀족일지도 모르겠다. 양떼를 모는 목동처럼.
“아주 예전엔 자기가 왕이나 귀족이랍시고 피 색깔부터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 뻗대는 이들도 있었다는데.”
“거짓이지. 다 잡아서 피를 짜내 보면 똑같이 붉더구나. 진정으로 피가 다른 이들은 흡혈귀뿐이었다.”
“그게 티르 현역 때 이야기였구나. 어쨌든. 진짜 다른 귀족들이 지배하니까 좀 어울리네요. 흡혈귀가 사치를 부리겠답시고 돈과 음식을 요구할까요. 기껏해야 몸이나 탐내겠지.”
몸이나 탐낸다는 말에 티르가 잠깐 움찔거리다 나를 나무랐다.
“몸을 탐낸다고 하니 어감이 이상하구나. 피로 정정해주거라.”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신 거예요? 피도 몸이잖아요?”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헷갈리지 않도록.”
아무리 생각해도 헷갈릴 일이 없는데. 머릿속에 마구니가 든 티르나 헷갈리는 게 아닐까? 내 몸을 흡혈귀로 만들겠다는 마구니가 말이야!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파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자양강장에 도움이 되는 건강식뿐이네요. 선지 간 고기 해산물 등등.”
“아까부터 묘하게 몰아가는구나. 이들은 피를 쉽게 보충하기 위한 음식일 뿐이다.”
“다 비슷한 거죠. 마침 저도 피가 좀 부족해서 그런가 고기가 조금 땡기네요.”
군국에서는 고기를 찾기 어려웠다. 곡물을 짐승의 살로 바꾸어 음식으로 삼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통조림 공장에서 만든 압축 고기가 그나마 부릴 수 있는 사치라니 말 다했지.
그런데 인간의 피를 짜내는 공국에서는 피를 보충시키기 위해 고기를 권장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어쨌든 공국에 온 김에 사치를 좀 부려볼까. 둘러보는 내 눈에 한 가게가 보였다. 커다란 고기를 꼬챙이에 매단 채 구워 주문을 받으면 그때그때 잘라서 파는 가게였다.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보니 아지 생각이 났다. 클라우디아에 두고 온 그 짐승이 이걸 보고도 참을 수 있었을까. 공국의 치안을 혼자서 어지럽힐 바에 차라리 거기 있는 게 나았을지도.
“어서오십쇼!”
한탄하며 가게 앞으로 다가가자 주인장은 손님용 밝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가게를 눈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가장 잘나가는 걸로 2인분 주세요.”
“예이! 잠시만요!”
겹겹이 쌓여서 거대한 덩어리를 이룬 고기에서 지방이 녹아 흐른다. 주인장은 노릇노릇 익은 고기를 두꺼운 칼로 잘라 접시에 담고는 볶은 채소와 소스를 담아서 나에게 내밀었다.
안개 공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식문화만큼은 세계 어딜 가도 꿇리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군침을 흘리며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아.
나 돈을 안 들고 왔다.
어디지? 아까 객실에서? 아니 객실에서는 돈을 꺼내지도 않았다. 내 돈은 전부 클라우디아에 두고 왔다. 잔녹이니 황금경이니 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놀다 보니까 돈에 가치를 안 두게 되더라.
“손님?”
돈을 빨리 꺼내라는 듯 주인장은 내 두둑한 주머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만 지금 주머니 안에 있는 건 돈이 아니다.
“주인장.”
“네?”
“제가 마침 가진 게 카드뿐이라 혹시 여기 카드로 결제는 안 될까요?”
“카드? 무슨 카드요?”
카드였지. 조금 전 마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물건.
주머니에서 열 장 가까이 되는 카드를 꺼내 주인장 앞에 펼쳤다. 하나같이 스페이드가 그려진 카드를 보고 주인장이 이게 뭔가하며 미간을 좁혔다.
“이 카드로 말할 것 같으면 인간은 가히 짐작하기도 어려운 신비로 만들어진 카드입니다. 무려 마법의 신이 만들어낸 걸물로.”
오직 진실로만 포장하여 주인장에게 팔아넘기려고 했으나 상대 역시 10년 가까이 매장을 운영한 노련한 장사치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인장이 눈을 희번덕 뜨며 말했다.
“장난하냐?”
“그러지 마시고. 보세요. 마신이 만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많이 나오겠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끊임없이 꺼냈다. 주머니 크기에 비해 너무 많은 카드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사실 내가 빼낸 카드를 손 안에 숨기고 다시 꺼내는 척하는 거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주머니에서 카드가 솟아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보세요. 카드가 무한히 나오죠?”
주인장은 잠깐 신기해 했으나 그도 잠깐이었다. 노련한 주인장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재미있는 재주네. 그런데 우리는 돈만 취급해.”
“안 보여요? 카드가 계속 나온다니까요? 이거 고철상에 팔면 돈 좀 나올 텐데.”
“그러면 고철상에 가서 바꿔 오든가! 꺼져!”
고기를 눈앞에 두고는 냅다 떠밀렸다. 쳇 사회에 찌든 어른 같으니. 동심도 다 죽었네.
무전취식에 실패한 나는 터덜터덜 티르에게로 돌아와서 말했다.
“티르. 저 사람 감히 티르의 손님인 저에게 손가락질했어요. 혼내주세요.”
“후훗. 농담도.”
“아니 진짠데.”
진심으로 한 말인데 이걸 농담으로 받아들이네. 갑질해달라는 뜻 맞는데. 내가 시조를 등 뒤에 업었는데 푸대접을 받아야 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내가 높은 자리에 있으면 횡포 좀 부려도 되지!
“원한다면 이 거리의 모든 것을 거둘 수 있으나 그건 너도 원하는 바가 아니잖느냐. 지금은 암행을 나왔으니 평범한 광경을 더 지켜보자꾸나.”
‘이리 같이 시장 거리를 걸으니 평범하게 나들이를 하는 것 같아서 즐겁기도 하고.’
평범은 무슨. 그렇게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미 특별한 거야! 평범한 사람은 돈 걱정에 잠도 못 이룬다고!
“평범한 사람도 돈은 있다고요. 돈이 없으면 티르가 원하는 평범한 광경도 그림 속의 떡이나 마찬가지에요.”
“돈 걱정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땅의 주인이자 모든 흡혈귀의 시작. 설마 내 땅에서 내가 돈이 없어 곤란을 겪겠느냐.”
“왠지 티르라면 겪을 것 같은데요. 이미 몇 번 겪지 않으셨나요?”
내 예상은 적중했다. 주섬주섬 몸을 뒤지던 티르가 작게 탄식했다. 티르야말로 평범한 이들이나 쓰는 화폐를 의식적으로 챙길 소시민이 아니었던 탓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휴가 굶주렸는데 허기조차 채워주지 못하다니!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정체를 드러내서라도!’
이거거든. 이게 권력자와 빌붙는 이유지. 감히 시조의 손님을 내친 주인장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샤워하고 와서 또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