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4
마치 세계의 균열에서 심연의 존재가 카빌라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방 안에 가득 차 있다. 터질 듯한 육편 사이로 눈동자가 기괴하게 움직였다. 틈 너머를 비집고 드러난 촉수가 꿈틀거렸다.
두려움은 학습에서 나온다. 인간이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것도 역사와 경험으로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존재를 처음 본 이들은 당혹과 경이 그리고 징그러움을 느끼고는 얼굴을 구겼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정적. 고깃덩이 사이로 드러나 있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카빌라가 거대한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문어. 크라켄 급.”
은신처로 삼은 집이 망가지자 문어가 분노하여 다리를 휘둘렀다. 창문으로 지붕 틈으로 벽의 균열로 뻗어 나온 빨판 달린 다리가 카빌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육중하고 질긴 다리는 그 자체로도 무기이자 흉기였다. 조금 스치고 지나간 것만으로도 돌담이 와르르 무너졌다. 카빌라는 뼈바늘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바위 틈에서 살아가는 바다짐승이에요. 크기가 크기인지라 고래섬에서나 간간이 보이지 연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아요. 저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잘 기억도 나지 않네요.”
뼈바늘에서 자라난 용아병이 카빌라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뼈칼과 뼈톱이 문어의 다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렇지만 질기고 점액질로 끈적끈적한 다리는 날붙이가 잘 듣지 않았다. 용아병이 멈칫한 사이 문어는 빨판 달린 다리로 용아병들을 조여서 으깨버렸다. 방해를 떨쳐낸 문어가 다른 하나의 다리로 카빌라를 잡아챘다.
까드득. 문어의 다리가 카빌라를 쥐어 터뜨릴 듯 조였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으스러졌을 거다. 그렇지만 카빌라는 몸이 짓이겨지면서도 태연했다.
“뭍에 올라온 이상 위협은 안 되지만 말이죠.”
싹둑. 어디선가 튀어나온 거대한 집게발이 문어의 다리를 짓이겼다. 카빌라의 인형인 바닷가재였다. 문어의 질긴 다리는 집게발의 공격에도 형체를 유지했으나 카빌라의 명령을 받은 집게발이 집요하게 입을 닫았다 펼 때마다 문어의 다리 살점이 잘려나갔다. 거기에 용아병의 뼈칼이 더해지자 문어의 다리도 기어코 잘려서 떨어지고 말았다.
땅으로 떨어진 카빌라는 혈기를 조작했다. 끊어진 다리가 스스로 움직여서 몸에 달라붙으려고 했지만 카빌라의 혈기가 단면에 스며들며 다리의 운동을 방해했다. 불순물이 몸을 파고들자 문어의 다리가 경련하며 오그라들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붉은 핏물이 스며들더니 문어 다리는 카빌라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
발다미르는 카빌라가 싸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되물었다.
“결론은?”
뭍에 자리를 잡은 순간 이미 문어의 끝은 정해졌다. 용아병과 바닷가재가 도망치려는 문어를 잘게 분해하는 동안 카빌라는 질린 얼굴로 발다미르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섬고래와 구름가오리의 충돌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물이 빠지는 시기에 이 크기의 해일이 들이치진 않을 거예요.”
“그런가.”
“그런가? 그게 전부예요? 당신은 언니가 아니에요! 내가 주는 만큼 당신도 결과를 내야지! 자꾸 당연하다는 듯이 일을 시키지만 저와 당신은 동등하다는 걸 잊지 마요!”
물론 카빌라는 말하면서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발다미르는 그녀보다 강력하며 시조를 향한 반란까지 막아낸 영웅이다. 발다미르는 명실상부한 공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카빌라도 티르칸쟈카의 기분이 조금 더 안 좋았다면…. 아니 인간의 왕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다면 그림자의 한입 식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지를 자각한 카빌라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슬슬 고백하시죠? 해일이 올지 어떻게 알고 인간들을 미리 대피시켰죠?”
“정보가 있었다.”
“정보라니요? 저 먼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가 어떻게 왜?”
발다미르는 잠시 말을 골랐다.
누군지는 안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지 왜 했는지는 모른다.
아니 그 ‘누군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클라우디아에서 한 번 마주치긴 했다. 그렇지만 발다미르를 찾아왔을 때의 ‘그것’은 무언가 달랐다. 마치 조금 전에 보았던 심해의 존재처럼 지금껏 그가 아는 어떠한 군상과도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발다미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카빌라가 말했다.
“설마. 성녀는 아닐 테고. 부유성? 마도왕국의 ‘관측자’인가요?”
당연한 추론이었다. 성녀는 흡혈귀의 숙적이다. 흡혈귀가 성황청을 증오하는 만큼 성황청도 흡혈귀를 경멸한다. 저쪽에서 도움이 될 예언을 해줄 리 없다.
뭐 결과적으로 성황청에 이득이 된다면 할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성황청에게 이득이란 흡혈귀의 멸절이기에.
“모르겠다.”
“모르겠다고요? 당신이 허언을 하진 않을 테니 진짜 모른다는 건데. 그 말을 믿고 사람을 물렸다고요?”
“모르니까 섣불리 넘기긴 어려웠지. 말마따나 그땐 시조의 일로 바빴기도 했고. 일단 미지의 존재가 한 요청을 들어주어서 나쁠 건 없으니.”
카빌라는 의아해했다.
발다미르는 냉정하고 합리적이다. 만일 그 미지의 존재가 미덥지 않았다면 그를 잡아 가두고는 정보를 빼냈을 것이다.
달리 말해 그가 그 ‘합리적인’ 해결법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뜻은….
“대단하신 적혈공께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고요?”
발다미르는 카빌라의 의혹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싸우진 않았다.”
“하아? 모든 엘더를 오시하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적혈공 발다미르가 겁을 먹었다? 성질 많이 죽었네요. 상대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성녀라면 어쩌려고 그래요?”
생각해보면 성녀일 가능성이 가장 크긴 했지만. 발다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게.”
“그러게? 말로는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정작 자기는 무책임하게….”
앙심이 섞인 비난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발다미르는 대검을 움직였다. 해흉의 바다에서 떠밀려온 바다짐승은 강력하고 위험했지만 발다미르만큼은 아니었다. 인간들이 치울 사체만을 남기고 발다미르가 연안을 정리하며 나아갔다.
그렇게 원래의 해안선에 가까워지던 그의 눈에… 무언가 이질적인 지형지물이 보였다.
“저건 뭐지?”
“내가 말하는 설명서라도 돼요? 안 알려줄 테니 혼자 스스로 알아내… 저게 뭐죠?”
카빌라조차도 ‘저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흉의 바다를 누구보다 오래 지켜본 흑마법사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바다를 잘 안다. 물론 세상이 저 넓은 바다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없다는 것까지도 고려해야겠지만 어쨌든 카빌라의 지식은 꽤 깊고 다양했다.
그런 그녀조차도 눈앞의 구조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현실감이 사라질 정도로 큰 크기다. 연안까지는 수 km가 남아있지만 군청색 얼룩을 가진 ‘저건’ 어디서 땅조각을 얇게 떼어 갖다놓은 것만 같았다. 해일과 함께 떠밀려왔다기에는 지나치게 크다.
“피?”
…단면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카빌라도 발다미르도 저것을 해일에 휩쓸려 온 섬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카빌라가 이질적인 혈기를 감지하고는 말했다.
“저게 생물? 아니 생물의 조각? 그렇다는 건….”
“해흉이로군. 구름가오리의 지느러미인가?”
연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란 크기. 와중에 단면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저게 생물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믿기지 않지만 그것밖에 가능성이 없다. 검푸른 얼룩도 세로로 뻗어나가는 연골도 그게 구름가오리의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토록 거대하고 위용 넘치던 해흉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카빌라가 중얼거렸다.
“정말 섬고래와 싸우기라도 한 건가요? 바다짐승도 짐승이라고 멍청하긴. 크기부터가 다른데….”
“아니. 저 단면은 짐승의 자국이 아니다.”
발다미르는 겁도 없이 지느러미를 향해 걸어갔다. 카빌라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원래는 갯벌이었지만 해일이 몰아치고 난 뒤 바닷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뭍과 바다의 경계는 엘더도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발다미르는 개의치 않고 물살을 헤쳤다. 인간도 아인도 발을 댈 수 없는 영역에서 오직 바닷가재에 올라탄 카빌라만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
“죽고 싶어요? 여기는 바닷물이 있어요! 댁이 지금 콧대가 높아진 건 알겠지만 물 밑에서 다가오는 위협은 저나 당신이라도 위험해요!”
카빌라의 진심어린 경고도 무색하게 발다미르는 기어코 해흉의 잔해에 도착했다.
해흉의 잔해는 인간에겐 재앙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축제였다. 수천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해흉의 잔해를 뜯어먹으며 배를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냥하기 위해 찾아온 포식자들이 바깥쪽에서 틈틈이 먹잇감을 낚아챘다. 하늘에는 수백 마리의 갈매기가 맴돌고 지느러미에 붙은 수백 마리의 빨판상어도 낙수를 누렸다.
수만 마리의 짐승이 자글자글하게 먹어 치우느라 단면은 무어라 말하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아예 살갗을 파고들어 안쪽에서 사는 물고기도 있었다. 여기서 단서를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검사인 발다미르는 이 거대한 참상 속에서 검의 흔적을 느꼈다. 발다미르는 일자로 쭉 뻗어나간 단면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일격?”
“발다미르! 조심해요!”
카빌라의 날카로운 경고가 울려퍼졌다.
물살을 헤치고 무언가가 다가왔다. 발다미르를 먹잇감으로 착각한 바다짐승이 탄환처럼 날아와 그를 노렸다. 바닷물 속이라 혈조술로는 알아차릴 수 없지만 그는 물살의 흐름을 읽고는 수면 아래로 대검을 휘둘렀다. 쩌엉 바다 밑에서 바다짐승의 아가리와 대검이 부딪쳤다.
믿기지 않게도 밀리는 쪽은 발다미르였다. 물속이라 건곤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그는 마치 허공에서 부딪힌 것처럼 밀려났다. 낯선 먹이를 노리던 포식자는 연신 꼬리를 휘저으며 더더욱 대검을 몰아붙였다.
까드득 까드득. 거센 이빨이 대검에 흠집을 낸다. 어마어마한 악력이었다. 대충 포식자의 힘을 가늠한 발다미르는 몸을 빙글 돌렸다. 한쪽 다리를 땅에 세게 디딘 뒤 어깨와 허리를 조금 비틀어 힘을 모은다. 몸의 회전을 단숨에 토해내며 대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검기가 바다를 가르고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한참 뻗어나간 검기가 사라지고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가엾은 바다짐승 한 마리가 반으로 나뉘었다. 별미를 노리던 물고기는 스스로 별미가 되어 다른 물고기의 먹이가 되었다.
물속에서 바다짐승을 베는 기염을 토했지만… 발다미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가 전력을 다해 쏘아낸 검기도 해흉의 지느러미를 벤 일격에 비하면 티끌조차도 되지 않았기에.
하물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한 해흉이다. 사람보다 조금 큰 물고기도 물속에서는 힘이 엄청났는데 태고의 해흉은 감히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해일을 일으키고도 멀쩡한 지느러미를 일격에 잘랐다니?
힘과 기술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치에 닿았거나 혹은 마신에 근접했거나. 검성 혹은 마왕이라는 존재만이 저럴 가능성이라도 논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일까. 발다미르는 섣불리 결론을 낼 수 없었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군.”
티르칸쟈카의 그림자. 인간의 왕. 그리고 해흉을 공격한 ‘무언가’까지. 연이은 이상 사태에서 발다미르는 거대한 흐름을 느꼈다.
세상은 변한다. 세상 속에 사는 흡혈귀도 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아무리 그대로 있고 싶더라도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세상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발다미르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원래는 먼곳의 이야기를 따로 빼려고 했는데 글자수가 맞지 않아서 조금 잘렸네요… 불편…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하필 분량을 잘 조절하지 못한 데다가 최근에 약간 아쉬운 일이 있어서요. 어째서…
저에게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이 글을 사랑해주시고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충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