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5
공국은 드넓은 땅에 비해서 인구가 적은 땅이다. 거기다 인간은 피를 제공하는 가축의 역할을 가진다. 공국의 행정 상업 병역 모두 흡혈귀가 직접 관리하므로 인간은 자기 거주지를 벗어날 일이 별로 없고 벗어나더라도 흡혈귀의 감독 아래 이루어진다.
만일 흡혈귀도 없이 홀로 떠돌아다니는 인간이 있다? 둘 중 하나다. 흡혈귀의 신임을 받는 인간이거나 아니면 압착기 행이 예정된 도망자거나.
“…아하. 밤썰물에서 복귀하시는 거라고요?”
소 젖을 짜던 소녀가 어색하게 다가온 나와 힐데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며 나와 힐데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나름대로 정리하고 왔다지만 숲 속에서 며칠 구른 우리에게서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꾀죄죄함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내어 변명했다.
“야 네네. 밤썰물 때문에 성에 갔다가 해일에 휩쓸려서 사고를 당했지 뭐예요. 많은 수가 다쳐서 병상이 부족한 나머지 경상자들은 알아서 돌아가라더라고요. 여기 에르테 백작님이 발행해준 임시 통행증도 있어요.”
나는 임시 통행증(위조)를 보여주며 뻔뻔하게 말했으나 애석하게도 순진한 시골소녀에게 문서가 갖는 권위는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잠시만요. 먹을 것을… 내어올게요.”
‘아무리 봐도 도망치는 것 같은데. 마을로 가서 빌리테어 어르신께 여쭈어봐야겠다. 예일링인 그분이라면 잘 아시겠지?’
소녀는 우리를 힐끔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향했다.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소녀를 두고 나와 힐데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통한 것 같죠?”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세요. 바로 흡혈귀에게 일러바치러 갈 기세예요~.”
“튀죠!”
그리고 냅다 뒤를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소녀가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도시락과 우유를 챙기고선.
나는 샌드위치를 입으로 욱여넣으며 한껏 투덜거렸다.
“너무 폐쇄적이잖아요! 길 가던 나그네가 도움을 좀 청하기로서니 수상하다고 신고할 생각을 해? 군국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사람이 적게 사는 곳일수록 더더욱 폐쇄적이에요~. 사람 없는 곳에 굳이 찾아오는 인간은 뭔가 구리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구린가요?”
“몇 날 길에서 노숙하고 제대로 못 씻은 티는 나네요~.”
“뭐야. 힐데 때문에 걸렸네.”
“흐음?”
뒤통수로 따끔한 충격이 느껴졌다. 힐데가 기공을 손가락으로 튕겨 쏘아낸 것이었다. 먹던 샌드위치를 반쯤 토해낼 뻔한 나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요 요새 손속이 좀 거칠어졌네요….”
“‘저’ 혼자였다면 저 마을의 일원이 되어 한 석 달 정도 평화롭게 지냈어요. 누구 때문에 ‘제’가 이 고생을 하는데요?”
“아니 뭐. 저 때문이긴 하지만. 어차피 힐데도 공국에서 나왔어야 했잖아요. 그냥 가는 길에 데려다 주는 느낌이면 별로 품도 안 드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기서 바이바이하죠? 아버님은 여기서 평~생 사세요.”
“제가 힐데 없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저에게는 아직 힐데가 필요해요.”
필사적으로 힐데의 비위를 맞춰주니까 조금 불편한 심기가 누그러들었다. 힐데는 짐짓 화난 척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슬슬 국경에도 가까워지겠다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정비를 해야 해요. 오늘 이후로는 숨 돌릴 시간도 없을 거예요.”
“공국의 남쪽은 햇빛도 비치고 토지도 비옥해서 인간이 많다고 하던데 숨기는 더 쉽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만큼 많은 아인이 배치되어 있거든요. 특히 군국 국경 근처 변경백 ‘철벽의’ 크세르는 공국의 국경을 500년 넘게 지켜온 맹장이고요. 뭐 그는 아무리 강해도 아인에 불과하니 못 도망칠 건 없겠지만….”
힐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만일 티르칸쟈카가 아버님을 잡고 싶어한다면 분명히 엘더를 국경 근처로 보냈을 테니까요.”
“그러겠죠.”
흡혈귀는 강력하다. 고작 아인에 불과하더라도 육장성인 힐데가 쉽게 이긴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의 약점이라 하면 그건 바로 적은 머릿수이다. 권속의 수는 많아봐야 열셋. 제대로 힘을 쓰는 흡혈귀는 엘더 아인 예일링 세 세대 뿐. 이 명백한 상한 때문에 흡혈귀는 국지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엘더는 국경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국토를 누비며 힘을 낭비하는 대신에.
“저쪽에게 엘더가 있다면. ‘저희’쪽에는 아버님이 준비한 수가 나타나야만 균형이 맞겠네요~.”
은근히 숨겨둔 걸 내보이라고 압박을 주는 힐데였다. 하지만 달리 정말 마땅한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해. 마치 중요한 날 선물을 깜빡한 기분이 된 나는 애써 얼버무렸다.
“하 하. 뭐 티르가 저를 쫓고 있다는 것도 추측이니까요. 가뜩이나 반란 때문에 바쁜데 저 따위를 추격할 정신이 있을까요? 금방 단념했을 수도요.”
“그럴까요~? 그때가 되면 알겠죠~.”
‘혹시 엘더가 찾아오지 못하게 수를 써두었을까요? 적혈공이 있는 한 쉽지 않을 것 같지만~. 그때가 되면 알겠죠?’
아마 그때가 돼도 모를 거야. 진짜 없거든….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모르는 힐데는 태평하게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아후. 오늘도 노숙이 되겠네요. 우웅. 노숙도 그다지 나쁘진 않지만 한 번 씻고 싶은데에~.”
“그냥 노숙 말고. 기생 숙박 한 번 하시죠.”
“기생 숙박이요?”
숨겨둔 수 따위는 없지만…. 최소한 나를 위해 힘써주는 힐데의 컨디션 관리는 해줘야지.
***
“마틸다. 그들은 찾았느냐?”
“아니요 빌리테어 촌장님. 돌아가 보았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어요.”
“쯧쯧. 도망자였나 보구나. 에잉 그러니 섣불리 의심을 내보이지 말라고 했건만.”
“왜요? 제 추측이 맞았잖아요. 도망자를 들이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피거머리 혈족의 예일링이자 검은계곡 마을의 현명한 지도자 빌리테어 촌장은 어린 소녀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럴 때는 일단 반갑게 맞이하고 대접해주는 게 상책이란다.”
“왜요? 도망자라면 마을에 들여선 안 되잖아요?”
“자 흥분과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보거라.”
다른 땅에서는 흡혈귀가 모기나 빈대처럼 공포스럽고 경멸해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공국에서 흡혈귀란 믿을 만한 어르신이었고 보살펴주는 보호자였으며 지혜를 나누어주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나이 많은 빌리테어 촌장은 소녀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만일 그들이 말대로 길손이라고 해보자꾸나. 그렇다면 잠시 보살핀 다음 길을 떠나게 해주는 것이 순리겠지. 우리는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은 우리에게 보답했을 거다.”
“하지만 거지꼴이었는걸요? 열 걸음 밖에서도 퀴퀴한 냄새도 났어요!”
“냄새는 내가 맡지 못하니 잘 모르겠지만 밤썰물에서 일한 이들은 보수를 받는단다. 그들 말대로 밤썰물에서 일했다면 충분한 돈을 들고 있었을 게다. 정 주기 어렵다면 내가 그들에게 혈세를 거두어도 되고.”
빌리테어 촌장은 근처 마을의 혈세를 거두는 역할도 맡았다. 체계적이진 않지만 끈끈한 공동체를 이루는 시골에서는 도리어 이러한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감정도 없고 자식도 없는 흡혈귀는 누구보다도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에 폐쇄적인 환경에서 으레 생겨나는 비리나 유착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자였잖아요?”
“그렇다면 더더욱 마을로 안내했어야지. 그들을 살피고 타이르거나 아니면 배불리 먹여 방심시킨 뒤 붙잡거나 할 수 있잖니.”
냉혈한인 흡혈귀답지 않게 온화한 판단이라 생각되지만 애초에 흡혈귀가 인간을 잘 보살피는 것도 비슷한 결이다. 인간을 배불리 먹이고 잘 살게 해야 더 오래 더 좋은 피를 내니까. 차갑게 계산된 온화함을 빌리테어가 설파했다.
그에 비해 아직 온화함을 배우지 못한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되물었다.
“인간 말종인 도망자잖아요? 마을에 들였다가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해치면 어떻게 해요?”
“오호라. 마을까지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니?”
“네!”
치기 어린 거짓말이었지만 빌리테어 촌장은 알 방법이 없었다. 물론 그게 거짓이든 진실이든 별로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흡혈귀의 온화함이 차가운 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이백 년 가까이 마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온 피거머리 혈족의 예일링은 정말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의지하고 그녀 또한 모두에게 보답해주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에게로 데려왔어야 했다 마틸다. 저들이 그토록 인간말종이라면…. 네가 낌새를 보이는 즉시 너를 해코지했을지도 모르잖니.”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빌리테어의 조언은 모든 조건과 경우의 수를 따져서 산출한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렇지만 그건 소녀와 모두를 위한 따뜻한 충고이기도 했다.
“저 저요…?”
“그래. 알았으면 다음부터는 홀로 다니지 않도록 해라. 겁 많은 도망자였으니 망정이지 살인자거나 굶주린 짐승이었으면 어찌할 뻔했니?”
“그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옛 동화가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어른들이 천방지축인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짜낸 지혜인 것이다. 겁이 많아야 오래 살고 더 오래 피를 제공하기에.
조금 겁을 주면서도 진지하게 타이른 빌리테어 촌장은 다시 유유자적하게 곰방대를 물었다.
매캐한 연기를 피워올리는 예일링을 보며 소녀는 생각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내 친구처럼밖에 안 보이는데….’
소녀는 자기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는 촌장을 바라보았다. 외견상 나이는 비슷해서 내심 친근감을 느끼곤 했지만 이렇게 세상을 다 산 듯한 얼굴을 볼 때면 흡혈귀와 자신의 차이를 실감하곤 했다.
“그런데 왜 도망쳤을까요? 바보 같아. 함부로 도망치면 죄인이 된다는 걸 알 텐데요.”
빌리테어 촌장은 곰방대를 문 채로 대답했다.
“모든 흡혈귀가 우리 혈족 같진 않단다. 바쿠타 옹께서는 몹시 태평하신 분이시고 그분이 가진 탐식의 힘 덕분에 짐승의 피로도 목을 축일 수 있으니 너희들의 피도 덜 요구하지…. 다른 혈족을 비방하는 건 아니지만 먹지도 못할 것에 피를 낭비하는 이들이 꽤 있으니까.”
정석적인 대답을 하던 빌리테어 촌장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중얼거렸다.
“…남녀가 함께라고 했지? 쯧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거요?”
“그런 게 있다. 왜인지 아이를 가졌거나 가질 부부는 묘하게 이 나라를 뜨려고 한단다. 이유는… 이 나이를 먹은 나도 잘 모르겠구나.”
후우우. 한숨이 섞인 연기가 허공을 떠돈다. 아직 담배는 익숙하지 않은지 소녀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라는 데요 아버님?”
“몰라요. 일단 먹을 거나 챙겨요.”
곰방대를 물고 마력초를 피우는 흡혈귀 발밑. 어둡고 서늘한 지하실.
대지술로 이 안에 숨어든 나와 힐데는 여기서 온갖 물품을 서리하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시간을 빼앗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필의 거장 님 후원 감사합니다! 저 다시 임하겠습니다. 괜히 이상한 데 힘쓰지 말고 소설에나 충실하자! 악!
비공개 님 후원 감사합니다!!
알콜노예 님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아지나비콘밖에 없는 이유는 제가 아지나비콘밖에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끄덕. 다른 콘은… 어… 원하시는 거라도 있나요? 휴? 사라지는 마술 같은 거요? 저는 조금 더 귀엽고 범용성을 갖춘 걸 좋아해서… 조금 더 아이디어가 있다면 추진하겠습니다! 악!
김경환_541 님 후원 감사합니다! 541이 도대체 왜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님은 제겐 첫 김경환 님입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흑요정 님 감사합니다! 저… 정말 무리 안하고 있습니다… 걱정 감사합니다만 조금은 무리하도록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