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7
지금 힐데는 어떤 배역도 맡고 있지 않다. 그녀의 연기는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것. 그렇지만 무대 바깥에서 지켜보는 나는 힐데에게 속을 수 없다. 누가 관객석에 앉아서 무대 위 연기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다만 무대 위의 인간이 꼭 역할만 맡은 건 아니니까.
“지금도 연기하고 있죠?”
“연기라니요~? ‘저’는 전혀.”
“뭐가 아니야. 저보고 아버님이라고 부르잖아요. 그게 어떻게 진심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진실이 될 수 없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힐데는 이미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부모와 자식이 내가 아는 그게 맞다면 인과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그러자 힐데가 항변하듯 말했다.
“이 얼굴 이 이름 이 신분! 다 아버님이 주신 거잖아요! 진정한 ‘저’를 낳았으니 아버님은 아버님이죠!”
“배역의 아버지라는 뜻이었다고요? 컨셉이 과하지만…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티가 난다고요.”
스스로 알고 있을 테니까 부정하진 않겠지. 힐데는 연기할 땐 ‘저’에 힘이 들어간다고. 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정곡을 찔린 힐데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되물었다.
“헤에~. 아버님에게는 정말로 연기가 통하지 않네요~. 아아. 실패해버렸다~.”
“실패? 뭘요?”
“‘저’. 이번에는 아버님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가 되어보려고 했거든요~. 아버님이 ‘저’를 도와주신 김에 겸사겸사 부탁도 좀 드릴 겸 ‘저’를 아버님께 맞추어 보려고 연기했는데~.”
한숨을 폭 내쉰 힐데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명확한 모티브가 없어서 그런가요.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더라고요~.”
“제 마음에 들어서 뭐 하시려고요?”
“효도죠! 자식된 입장에서 아버님께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건 자연스러운 바람이잖아요? 그리고…. 아버님을 군국으로 모셔야 하고요.”
“그때 말했던 군국의 왕 말인가요?”
“네~. 아버님이 대충 만들고 내버렸던 군국의 왕이요.”
대충 만들다니?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저쪽이 스스로 각성해서 떠맡은 거라고. 내 표정을 본 힐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요. 아버님은 에이비로 하여금 모든 걸 보고 결정하게끔 했죠. 관리자인 유엘은 아버님에게 저항했지만 실무자인 ‘저’는 아버님의 의견에 동의해요. 다만… 아무리 그래도 에이비 혼자서는 무리에요.”
“에이비 대위는 혼자가 아니에요. 수백 명의 통신병이 있잖아요.”
“몇천 명이 있든 마찬가지예요. 수녀원을 본떠서 만들어진 때 묻지 않은 소녀 수백 명으로는 나라를 꾸려갈 수 없어요. 성황청이 괜히 제국에 기생하는 게 아니지요. 운명을 다루는 힘을 가졌어도 더러움 없이 인간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까요.”
수녀원이라. 그래도 통신병을 너무 무력하게 보는 건 아닐까 싶은데. 수녀와는 다르게 원견의 힘을 어느 정도 베끼기까지 했다고. 뭐 성녀도 수녀처럼 나라를 잘 못 다스리는 건 마찬가지 같지만.
“어쨌든 힐데도 목적은 이뤘네요.”
“그야 티르칸쟈카가 폭주해서 어찌저찌 그렇게 흘러간 거지 아버님 마음에 든다는 목적은 못 이뤘잖아요.”
“그 목적은 이미 이뤘는데요?”
“네?”
“저에게 아부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미 성공이에요. 저는 힐데가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꼭 제 탈출을 도와줘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상당 부분 차지하지만…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사실 당연한 일이다. 대놓고 잘 보이겠다며 꼬리 치고 엉겨 붙는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 원래 아부는 쌍방. 알면서도 당하는 거다. 나에게 잘 보이겠다고 애쓰는 태도부터가 나를 흡족하게 만드는 거니까.
힐데는 의외라는 듯이 갸웃했다.
“연기인 걸 알았으면서도요?”
“그게 왜요.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가면을 여러 개 쓰고 살아요. 내 앞에 누가 있냐를 살핀 뒤에 가면을 바꾸죠. 저도 아지를 대할 때나 티르를 대할 때 태도는 천지차이거든요.”
“가면이라는 걸 아는 순간 서운해지잖아요. 티르칸쟈카가 아버님에게 그랬듯이.”
“뭐. 그럴지도요. 힐데가 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왕으로서의 쓰임을 기대한다는 걸 알았으니 저도 그걸 신경 쓰겠죠. 하지만…. 그게 어때서요?”
진정한 자신이 뭔지 진정한 자기가 뭔지 아는 사람은 명상을 거듭한 현자가 아니라면 독심술사인 나밖에 없다. 그리고 현자나 나나 아마 똑같은 결론에 다다를 거다.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애초에 진정한 자신이 뭔지 진정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서 달라질 게 있을까요? 우리는 한낱 인간이에요. 한정된 시간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그때그때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죠. 그때 취한 태도가 진심에서 우러나왔든 아니면 상대에 맞춰서 연기한 것이든. 그건 진심이 아닌가요? 힐데는 진심으로 연기했잖아요.”
거듭된 연기 끝에 자아가 희미해져서 존재의 닻이 되어줄 것을 찾고 있던 힐데였지만 정작 연기를 누구보다도 소중히 하고 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힐데는 연기를 놓지 않았으니까.
“힐데는 이전의 삶이 다 배역이었다고 말했지만…. 연기자에게 필모그래피는 정말 중요한 거 아니에요? 신이 힐데를 구원해주지 않았지만 아직도 신성력을 쓰고 있죠? 유엘에게 불려와 혹사당했지만 지금도 군국에 애착을 갖고 있죠? 연기였든 뭐든 소중하게 마음속에 품고 있었잖아요?”
연기가 싫은 사람이었다면 심상 속에 그때의 배역을 고이 모셔두고 그때그때 꺼내오진 않겠지. 힐데는 연기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너무 진심이라 자신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그러면 뭐. 연기의 화신이 되어 살든가. 나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해.
“아버님은 연기라도 괜찮으신 거죠?”
“저는 무대 밖의 관객이에요. 힐데가 어떤 연기를 해도 아무리 실감 난다고 하더라도 연기란 걸 모르진 않잖아요? 저는 보고 감명받을 준비나 할게요.”
“관객….”
힐데가 찾아다닌 건 진정한 자신도 연기하지 않는 삶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연기자였던 힐데가 바란 건 관객이었다. 그녀의 연기를 보고 평가해줄 관객.
처음엔 전능한 천신. 다음엔 미래를 보는 성녀. 힐데는 그들을 위해서 성심껏 연기했지만… 사실 천신은 무대의 장치였고 성녀는 그 무대를 만들려는 설계자였다. 둘 다 힐데의 관객이 될 수 없었다.
다음으로 찾아낸 게 인간의 왕인 나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힐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었다.
“헤에. 그러시구나. 아버님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네요~.”
쭈욱 기지개를 켠 힐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심상 속 그녀는 무대 뒤편에서 배역을 고른다. 어떤 의상을 입을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상대역에 맞추어 배역을 소화해낸다.
그렇지만 나는 관객석에 앉아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다 알고서 관람하는 관객이다. 속아 넘어갈 수가 없지. 속고 싶을진 몰라도.
‘…그러네요. 첫 만남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보니 그때의 ‘저’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채로 임했어요. 이런 실책이 있을까요…. 새로운 걸 연기하려면 전에 하던 걸 비워야 했는데.’
어쩔 수 없었지. 그때는 회귀자에 티르에 리아까지 동행하고 있었다. 힐데가 나와 함께하려면 군국 육장성의 신분이어여만 했다. 내가 있는 무대로 건너오기 위해서 힐데도 ‘영궤’의 연기를 한 채로 합류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 곁에는 아무것도 없다. 군국도 회귀자도 티르도. 전 무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나’는….’
속으로 조금 되뇐 힐데는 다시 눈을 떴다.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나는 힐데가 배역을 바꾸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으으 다행이다. 천년을 살아온 흡혈귀도 이런 지하에 땅굴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거예요. 잠들지 않는 흡혈귀는 꿈을 꾸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여기라면 당분간은 안전하겠죠.”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 속에서 우연히 은신처를 찾아냈다. 천년만년 살 수는 없겠지만 당장 며칠은 안전하다. 언젠가 떠나야 할 것이 약속된 낙원에서 힐데는 애써 절망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날도 늦었으니 뾰족한 수가 떠오르기 전까지 여기 머무르도록 해요 아버님.”
힐데의 생각에서 군국이 사라졌다. 신성력 역시도 사라졌다. 지금 힐데가 입은 배역은 한 줄기 희망을 품고서 흡혈귀로부터 도망치는 부녀의 것이었다.
뭔 짓인가 싶지만 이런 걸 받아주기로 했으니까. 어차피 공국만 탈출하면야 상관없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날이 저물고 있으니까 눈 좀 붙이고 내일 정비하는 걸로 해요.”
“그래요!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 힐데는 슬그머니 내 모포 속으로 파고들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의구심조차 느끼지 못한 나는 뒤늦게 모포를 들어올렸다. 내게 딱 붙어 꼼지락거리던 힐데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들어와요?”
힐데는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 밤에는 추우니까 체온을 나누려고요….”
“체온은 뭔 체온? 필요하다면 마음껏 바꿀 수 있으면서!”
감기공을 익힌 사람은 몸을 제 생각대로 다룰 수 있다. 경지에 따라 갈리기는 하지만 한서불침이니 만독불침이 하는 건 다 감기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얼굴과 몸을 바꿀 수 있는 힐데가 고작 체온을 바꾸지 못할까.
그렇지만….
‘아버님도 참. 어렸을 때는 같이 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너무 자라서 부담스러우신 걸까요. 험난한 여행길에서는 체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힐데’에게 있어서는 진실이고 진심이었다. 지금 그녀는 연기 중이니까.
이 미친 컨셉충이. 아예 자기 믿음부터 뒤바꾸어 버렸어! 연기에 몰입한 탓에 나도 힐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의구심을 느끼지 못했다. 당사자인 힐데가 의구심을 안 느끼니까!
대단하다 대단해. 새삼 놀라면서도 모포 속에서 따뜻함이 느껴지자 생각이 바뀌었다.
힐데는 몰라도 나는 필요하긴 하네. 나도 마침 마신을 얻어서 감기공 비슷하게 쓸 수 있지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보다는 힐데를 난로로 쓰는 게 편하니까.
“아버님은 ‘저’와… 같이 자는 게 싫으세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아닌데 냄새가 좀 나서.”
“이 바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걸었으니까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하죠! 내일 씻으려고 했어요!”
삐진 힐데는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있다. 몸은 솔직하다는 듯이.
‘아버님의 몸은 역시 크네요…. ‘저’도 꽤 자랐지만 아직도 아버님에게 비하면 한참 작아요. 이렇게 계속… 아버님의 품에 안겨 있을 수만 있다면.’
파더 콤플랙스를 가진 딸이라니 참 골때리는 설정이 아닐 수가 없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런 정신 나간 연기를 하게 되었을까.
‘‘내’가 무 무슨 생각을! 아무리 친아버지는 아니라지만…! ‘저’를 키워주신 분이라고요! 일단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에요!’
설정 한번 참 복잡하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몇 번 갈아엎었습니다… 힐데에게 시동을 걸으려는데 자꾸 어색한 부분이 보여서요…
죄송합니다…
표지는 단발 님이 그려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