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3
어디선가 또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직후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고원을 달리는 높새바람 한 움큼을 머금고 온 검은 털의 수인이 사뿐히 아지의 곁에 내려앉았다.
빠르다.
단순히 빠른 게 아니다. 날랜 개처럼 민첩하다. 조금 부산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움직임과 방향 전환이 빠르다. 그런데도 소리는 전혀 나지 않는다. 민첩성이라는 단어를 상징하는 듯한 움직임이다.
무엇보다 흡혈귀인데 낮에 멀쩡히 돌아다닌다는 것부터 범상치 않았다.
머리에서 등 위쪽까지 풍성하게 난 털이 햇빛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흰 줄무늬가 있는 부푼 꼬리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햇빛을 막기 위해 펑퍼짐한 우비를 걸치고 있지만 벗더라도 크게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두 겹으로 된 털이 막아주었을 테니까.
룽켄의 아인이자 양치기의 수호자. 고원을 내달리는 까만 돌풍. 한낮을 달리는 어둠.
목인견 콜리는 그녀의 검은 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아지에게 다가왔다.
“멍?”
“좀 가만히 있어…요! 눈을 떼면 달려가 버리니까 도저히 일할 수가 없잖아…요!”
머리가 좋고 날래기로 유명한 양치기 개. 그 찬란한 혈통을 이은 목인견 콜리는 난감한 얼굴로 도리질했다. 검은 털에 묻어있던 나뭇가지며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나왔다.
“개의 왕인 당신이 인간에게 그리 살갑게 굴면 서열 순위가 흔들린단 말이야…에요.”
“멍멍! 나 친구!”
“알아…요. 아는데. 이 나라는 당신 것이 아니라고…요.”
그녀의 눈앞에 있는 건 개의 왕. 개는 물론이고 개 수인에게도 짐승의 왕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비록 흡혈귀가 되었어도 개로서의 본능이 콜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지를 다독인 콜리는 심기가 불편한 듯 갸릉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니콜. 그는 누구지?”
흡혈귀와 마주친 게 긴장된 탓일까. 잔뜩 놀란 소년은 말을 더듬어가면서도 대답했다.
“코 콜리 님! 아 이분은 검은 계곡 마을에서 오신 분인데….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콜리 님께 알리러 왔대요.”
“빌리테어의 마을에? 거기에 너 같은 인간이 있었나?”
콜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에게 코를 대고는 킁킁거렸다. 명백히 경계하는 태도였다. 다행스러운 건 수인이어도 흡혈귀의 후각은 그리 뛰어나진 않다는 점이랄까. 냄새로 이상한 점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
“네 네. 저를 아실지 모르지만 검은 계곡 마을의 휴밀이라고 합니다. 콜리 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
“아-우-. 됐고. 너 양을 치러 온 적 한 번도 없지? 너처럼 건장한 아이가 얼굴 한 번도 비추지 않은 건 이상한데.”
“어렸을 때 한 번 왔었습니다만…. 물론 양치기 견습으로 오진 않았지만….”
하지만 짐승의 감각으로 위화감을 잡아채는 능력은 흡혈귀가 되고서도 여전하다. 차라리 무언가를 물어봤다면 독심술로 읽고 답했을 텐데.
위기일발의 순간 나를 구한 건….
“멍멍! 반가워! 반가워!”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빙글빙글 나와 콜리 사이를 맴도는 아지였다. 아지는 나와 콜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킁킁거렸다.
아지가 사방팔방 냄새를 묻히며 돌아다니자 콜리가 짜증 아닌 짜증을 부렸다.
“아니 왕! 기다려봐…요! 할 일이 있다구…요!”
“멍멍. 다쳤어? 아파?”
“그 피 냄새는 내가 다쳐서가 아니라…!”
근거가 있으면 위화감이 아니다. 근거 없기에 사소한 변화 하나로도 뒤바뀔 수 있다. 개의 왕인 아지가 내심 친근한 태도를 보이니 콜리의 위화감도 덩달아 약해졌다.
“아우우-. 그래. 빌리테어가 뭐라든?”
“담을 뛰어넘는 가축이 나타났다 고…. 하셨는데.”
담을 뛰어넘는 가축이라는 말은 흡혈귀의 은어였다. 흡혈귀가 흡혈귀보다 강해진 인간을 칭할 때 무언가를 뛰어넘었다고 한다. 예일링을 이기면 담 아인을 이기면 성벽 엘더를 이기면… 종을 뛰어넘었다고 일컫는다.
당연히 어디서 들은 건 아니고 독심술로 읽은 내용 중 가장 그럴싸한 걸 말했을 뿐이다. 콜리는 의심을 거두고는 고개를 치들었다.
“…아우우-. 그러고 보면 빌리테어에게는 전령을 보내지 않았지. 사태를 모르는 모양이야.”
“사태요?”
“중요 인물이 도망치고 있어서 경계가 강화되었어. 절대로 살려서 잡아두고 성으로 호송하라더라. 그런데….”
콜리는 투덜거리다 아지를 마뜩잖게 노려보았다.
“하필 그때 왕이 나타나서.”
“멍멍? 나? 나 아지야!”
“왕이 내 예일링을 물어뜯는 바람에 쫓고 잡으러 다녔다가 시간을 낭비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왕이 그 중요 인물인 줄 알았으니. 아우우. 좀 더 냉정하게 판단했어야 했는데. 왕이 나빠. 하필 그 타이밍에. 헷갈렸잖아.”
지금 나한테 변명하고 있었다. 인간 따위에게 흡혈귀가 왜 변명하냐 싶지만 콜리의 태생은 개 수인. 흡혈귀가 되어서도 본질이 완전히 변하진 않았다.
양치기 개 수인인 콜리는 강한 의무감과 충성심을 갖고 있다. 위로는 룽켄과 아지에게 아래로는 보살피는 인간에게 충실하다. 그런 콜리에게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콜리의 투정을 다 들어줄 이유가 없기에.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왕? 중요 인물? 도대체 이 수인이 누구길래 그러죠? 흡혈귀이신가요?”
처음부터 설명할 처지가 된 콜리가 얼굴을 확 구기며 짜증을 부렸다.
“아우우우우우-! 그런 게 있어! 꼬치꼬치 따지지 마!”
자기가 먼저 꼬치꼬치 털어놓고선. 어쨌든 투덜거리기를 멈춘 콜리는 즉각 양치기 소년을 보고는 소리쳤다.
“니콜 너는 마을로 돌아가!”
“네 네에….”
내 앞에서는 싹싹했던 꼬마 목동도 흡혈귀 앞에서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소년은 조금 풀 죽은 채로 이쪽을 힐끔거리며 마을로 향했다.
소년과 개를 돌려보낸 콜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개 수인은 개 수인이라 앉는 자세도 아지와 똑같았다.
“그래서? 전해야 할 내용은?”
“검은 계곡 마을에서 신원 미상의 도망자가 나타났습니다. 식량을 훔쳐 먹는 걸 목격하고는 촌장님이 제압하러 나서셨는데….”
“졌다는 거지? 괜히 중요 인물이 아닌가 보네. 그것 말고 다른 건?”
“다른 거라니요…?”
“인상착의나 쓰는 능력이나. 쫓는 데 알아야 할 것들 있잖아.”
의도한 만남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기회다.
아까도 느꼈지만 어차피 콜리에게선 도망칠 수 없다. 양치기 개 수인 흡혈귀. 달려서 지치는 것보다 달리지 않아서 지치는 일이 더 많은 그녀를 상대로 도망치는 건 놀잇감이 되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언제나 그랬듯이 속이는 거다.
“30대 후반? 저보다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남성이었습니다. 모습을 가리고 싶었는지 후드 달린 로브를 걸치고 있었죠. 빌리테어 촌장님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난 뒤 재빨리 마을 바깥으로 달아나더라고요. 그토록 빠른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물론 콜리 님보단 아니겠지만요.”
“인간 주제에 빌리테어를 어떻게 이겼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싸움은 촌장님의 오두막 안에서 벌어졌으니까요. 다만 촌장님이 말씀하시길 땅을 파고드는 힘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대지술이었나.”
날조하자.
대지술에 드루이즘까지 썼지만 능력이 두 개라는 걸 언급하면 상대방이 내 수를 의식해버린다. 스페이드 10만 슬쩍 보여줘서 상대방이 착각하게끔 하자.
“구멍 파기? 아우우. 귀찮아졌네. 땅속까지 확인해야 하잖아.”
기대했던 대로다. 나는 땅속을 파고들 생각이 전혀 없지만 상대방은 내 유일한(아님) 능력인 대지술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거야.
“다른 건?”
“과연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건 촌장님이 보내신 건데….”
나는 품에서 잘린 모포 조각을 꺼냈다. 목인견 콜리의 존재를 알고 떠나기 전에 돌아가서 살짝 챙겨온 것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장소에서 가져온 모포입니다. 냄새가 남아있을 거라고 말씀을 전하셨어요.”
물론 내 것이 아닌 힐데의 모포지만 말이지.
콜리는 벼락처럼 움직였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덧 모포 조각은 콜리의 입에 물려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냄새를 맡았다.
“빌리테어. 제법이네.”
“아! 콜리 님은 개 수인이니까 냄새로 그를 찾을 수 있으시겠죠! 제가 그걸 깜빡했네요!”
“아우우. 나는 잘 못 맡지만. 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 다행이다. 혹시나 진짜 힐데를 찾으러 가거나 아니면 묘하게 남은 내 냄새를 파악할까 봐 걱정했어.
모포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콜리는 문득 아지에게 내밀었다.
“왕. 혹시 이거.”
“킁킁. 멍?”
“냄새의 주인을 찾을 수 있어…요?”
“멍! 여기!”
냄새를 맡은 아지는 고개를 홱 돌리고는 느닷없이 내 발을 앞발로 팍팍 두들기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바짝 긴장했다. 개의 왕인 아지라면 내 냄새는 물론이고 힐데의 냄새까지도 맡았을 텐데. 혹시 그걸 다 까발리는 건 아니지?
“멍멍! 멍멍멍!”
다행이다. 그렇게 말을 길게 해서 설명할 아지가 아니지. 콜리도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말했다.
“걔는 들고 온 녀석이잖아…요. 아우우. 됐어. 내가 멍청했지. 알아도 딱히 도와주진 않을 텐데.”
벌떡 몸을 일으킨 콜리는 가볍게 뛰었다. 사뿐하게 내 머리 위를 지나간 콜리는 나와 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곁에는 사냥개가 많아. 냄새를 맡게 하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네 냄새 때문에 헷갈릴 수 있으니 마을로 돌아… 아니지.”
‘왕이 저 인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까 저것한테 잠시 맡겨야겠어. 섣불리 돌아다니다가 내 예일링을 공격하면 귀찮아지니까.’
“왕을 돌봐주고 있어. 왕이 있다면 인간에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네? 어디서요?”
“어디서든!”
콜리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자리를 떴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콜리는 한 줄기 돌풍이 되어 저 멀리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안개 낀 고원에 있는 양치기의 초소를 향해서.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콜리와 마주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아지의 탓이지만 덕분에 설명도 쉬웠고 멋대로 움직일 재량도 얻었다.
무엇보다 든든한 보디가드를 얻었으니까.
“야. 아지야.”
“멍?”
“너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멍!”
아지는 앞발로 내 발치를 툭툭 두들겼다. 나를 쫓아온 건가. 하긴 아지라면 내 냄새도 기억할 테고. 무엇보다 ‘약속’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셰이 씨는? 같이 있지 않았어?”
“멍? 걔? 멍?”
고개를 갸웃하는 아지에게는 단 한 점의 의문도 묻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회귀자가 왜 언급되는지 모르는 모양새다.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미래에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며. 그러면 좀 관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견주의 자세가 안 되어 있어!
뭐 덕분에 나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났지만 말이지. 나는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쨌든 반갑다.”
아지의 귀가 쫑긋 섰다. 도톰한 귀와 귀 사이에서 내 손길을 느낀 아지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멍! 나도 반가워!”
역시 개는 인간의 친구야.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든든하잖아.
양치기 개 수인 흡혈귀? 흥. 아지는 개의 왕이다. 격이 다르다고. 나는 개의 왕이랑 같이 감옥도 다녀오고 여행도 한 동료다. 거기다 종족적으로 ‘약속’을 나눈 친구란 말이야. 일개 수인 그것도 엘더를 종주로 모시는 흡혈귀와는 다르다고.
아까는 콜리가 지켜보고 있어서 못 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나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아지야. 아까 걔 있지? 검은 털이 난 개 수인.”
“멍? 걔?”
“그래. 나중에 또 보이면 그땐…. 콱 물어버려.”
인간이었다면 물지도 못하고 앞발만 동동 굴렀겠지만 마침 공국은 흡혈귀의 나라. 아지가 아무런 제약 없이 물어뜯고 목을 비틀 수 있다. 나는 아지가 길을 뚫으면 유유히 걸어가면 된다.
큭큭. 속으로 웃고 있기도 잠시. 아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 번 짖었다.
“멍! 싫어!”
“뭐? 왜?”
“걔 친구! 안 물어!”
“아니 친구고 뭐고 흡혈귀잖아! 피 냄새 못 맡았어?”
“친구 아파! 멍! 지켜!”
지키긴 뭘. 그건 흡혈귀야! 네가 물어뜯어도 멀쩡하게 부활한다고! 지킬 거라면 연약한 나를 지켜!
“야! 너는 왜 맨날 반만 도움이 되냐? 한 번 전적으로 도와주면 안 돼? 너무 나사 빠졌잖아!”
“지는!”
“나? 나는 지금까지 여력이 안 됐잖아!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내가 그래도 이번에 힘이 좀 들어와서 여유가 생겼어. 약속 지킬게! 지킬 테니까 이번만 도와줘!”
“꼴에!”
“내 꼴이 어때서? 네가 내 힘을 봤냐? 진짜라니까?”
아지가 콜리를 공격할 것 같진 않네. 뭐 상관없어. 이럴까 봐 작전을 건 거니까.
목인견 콜리가 그토록 빠르고 민첩하다지만 이 넓은 산맥을 개구멍 하나까지 뒤져가며 관리하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나는 콜리가 부재중인 틈을 타서 아지와 함께 산맥을 넘으면 된다. 예일링이나 늑대와 같은 사소한 문제점은 아지가 처리해줄 거고.
아지의 약점이 인간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거지만…. 상관없지? 이 나라의 인간은 가축. 나를 막으러 오지 못할 테니까.
크크. 일이 쉽게 풀리겠는걸.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
“어이 니콜! 오랜만이다.”
“어? 브래드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다. 벌써 제법 양치기 티가 나는구나! 슬슬 장가가도 되겠어!”
“계곡 마을에서 착하고 예쁜 애 소개시켜주고 그런 말씀이나 하세요! 그보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빌리테어 촌장님의 명령을 받고 왔어. 도망자 한 명이 이쪽으로 향했거든. 콜리 님께 그 도망자에 대해 전하려고.”
“네? 또요?”
“또라니? 도망자가 여기에도 있단 말이냐? 나 원 제철인가. 무슨 도망자가 그리 많은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전령 말이에요. 이미 마을에서 한 명 보냈잖아요?”
“보내? 누구를?”
“휴밀이라고. 키 크고 뺀질뺀질하게 생긴 사람 말이에요.”
“무슨 소리냐? 휴밀이라니. 마을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 없는데? 무엇보다 한때 너희 마을에서 양치기 생활을 한 나를 놔두고 왜 다른 사람을 보낸단 말이냐? 나만큼 여기를 자주 찾아온 사람이 없는데?”
“네? 이상하다. 분명히 촌장님이 보내셨다고 했는데…. 그게 거짓말이었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죠?”
마을에서 보내지 않은 인물이면서 간 크게도 흡혈귀를 속인 거짓말쟁이. 신원 미상의 남성.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양치기 소년은 금방 진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도망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