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9
너부리가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한다는 걸 알고 나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했다가 나와 단예린의 밀회 관계가 들킬 수도 있었으니까. 칼빵 맞기 싫으면 자중하는 게 좋다.
이후로 의심스러운 행동을 최대한 피하면서 너부리를 교육시켰다. 워낙 똑똑한 놈이라 알아서 잘 하는 경우도 있더라.
일단 기본적으로 도구를 매우 잘 다룬다. 손가락 구조가 유인원과 엇비슷해 도구 사용이 매우 쉽다.
과도를 이용해 사과를 깎은 것부터 범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나중에는 젓가락도 사용할 것 같다.
‘그런데 포로리는…’
포로리는 영물인데도 불구하고 너부리보다 못하다. 이러면 누가 영물인지 헷갈렸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너부리가 말을 하게 된다면 포로리는 그저 말하는 다람쥐에 지나지 않겠지.
무력적인 면모가 더 강하다고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전투가 아닌 각종 보조 능력이다.
‘어차피 전투는 내가 전부 담당하니까.’
어쨌거나 너부리의 상태도 확인하고 겸사겸사 주말을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주중도 마찬가지. 도중에 사고를 치는 일 없이 그리고 그 어떤 이벤트 없이 평범하게 지냈다.
기말고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긴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차피 높은 점수를 받을 텐데 뭐.
비록 별의별 괴악한 방식들이 나오긴 하겠으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악마들의 침공이다.
이제 슬슬 체감이 될 정도로 다가오고 있는 악마들의 침공. 어떻게 아냐면 단순하다.
“추워.”
“추워? 안아줄까?”
“응.”
날이 미친 듯이 추워지고 있거든. 나는 엘리의 권유에 말없이 품에 안겼다.
품에 안기자마자 따뜻한 체온과 더불어 침대 못지 않은 안락함이 느껴졌다.
이처럼 완벽한 보금자리가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평생동안 안기고 싶은 마음이다.
“야. 나도 좀 안아주라. 나도 추워 죽겠어.”
우리의 모습을 본 카라가 투덜거렸다. 나는 엘리에게 안긴 채로 카라를 바라봤다.
원래 카라는 외모답게 시원시원한 옷을 입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무슨 북방에 사는 원주민마냥 두꺼운 옷이란 옷은 다 껴입고 있다.
방 안 그것도 화로까지 틀었는데 저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추운 모양이다.
“언니는 그렇게 껴입었는데도 추워? 사막 출신이라 그런가?”
“지난번에는 겨울이 좋다 하지 않았어요?”
루나가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카라는 겨울이 좋다고 말했다.
사막 출신이라 해서 더운 게 좋은 건 아니라고 했던가. 이에 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건 타타르의 겨울이지 여기 겨울은 아니야. 추운 건 추운 거야.”
“음…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언니도 안아줄까?”
엘리가 해맑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엘리를 좀 더 강하게 껴안았다.
카라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어느 무엇보다 따뜻하고 안락한 곳은 내가 선점했다. 카라라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
카라도 그런 내 의지를 파악했는지 피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괜찮아. 이미 주인이 있네.”
“그런가?”
“대신 다른 사람한테 안아달라고 해야지. 나중에.”
“…”
카라가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엘리 입장에서는 절대 흘려듣지 못할 말이다.
지금도 몸을 흠칫거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에게 안기고 있던 터라 생생히 느껴졌다.
저기서 말한 다른 사람이 나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챘을 것이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으나 뉘앙스가 그렇다.
‘달달한 거 먹고 싶다.’
물론 나에겐 다 필요없고 입에 뭔가를 넣고 싶었다. 그것도 달달한 거.
바깥은 추운데 안은 따뜻하니 슬슬 나른해졌다. 오늘은 다른 문제로 훈련도 생각한 참이다.
다른 문제는 바로 애완동물 문제. 지인들에게 애완동물을 소개시켜줄 겸 포로리와의 관계도 구축할 생각이다.
“엘리 학생. 준비한 게 다 됐다네.”
“앗. 알겠습니다. 시바르. 잠깐만.”
하지만 그 안락함도 얼마 가지 않았다. 로드의 부름에 엘리가 잠깐 주방으로 향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었으나 몸이 나른해져서 모든 게 귀찮아졌다. 그래서 그냥 소파에 드러누웠다.
“시바르. 일어나게.”
“귀찮아요…”
“어허. 그러게 늘어지면 안 돼. 어서 일어나.”
로드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나서야 겨우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숲에서 지내던 습관이 나를 지배한 것 같다. 겨울 때마다 잠만 퍼질러 잤으니 습관을 버리기 어려웠다.
겨울은 먹을 것도 거의 없고 사냥조차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은신처에서 잠만 잤다.
‘겨울잠을 자는 이유가 있다니까.’
오죽하면 포로리의 영역으로 몰래 들어가서 도토리까지 훔쳤다. 뒤늦게 안 포로리가 나를 족치러 온 건 덤이고.
아무튼 이상하게도 노곤한 몸을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엘리가 뭔가를 들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여기 있어요. 우유도 준비했고요.”
“…어?”
나는 엘리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것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우 익숙한 간식들이다.
컵에 담은 우유는 둘째 치고 그릇에 올려놓은 저것. 색깔이 보랏색이 가까웠으나 분명 고구마다.
반으로 정갈하게 잘라 황금빛 속살을 내비치는 고구마. 이 세상에도 고구마가 있었던가.
“이게 뭐에요? 처음 보는 음식인데.”
“고구마라고 동방에서 수입한 주전부리라네. 엄청 달고 맛있지. 루나 학생은 피죤투를 데려오게나.”
“네.”
루나가 마당의 피죤투를 데려오는 동안 고구마를 면밀히 살펴봤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어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고구마. 지구에서도 자주 먹은 간식 중 하나다.
덕분에 살이 엄청나게 쪘던 걸로 기억했다. 다이어트 음식이긴 하지만 정작 많이 먹으면 살이 찌는 간식.
나는 입 안에 군침이 싹 도는 것을 느끼며 고구마를 손으로 덥썩 집었다.
“앗뜨뜨뜨뜨!!!”
“…뜨겁다는 말을 안 했군.”
“누가 봐도 뜨거울 것 같은데요.”
그리고 손 전체에 퍼지는 뜨거움에 한바탕 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로드에게 한소리 듣고 나서야 고구마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 막 찐 거여서 엄청 뜨겁다.
덜컥-
“응? 뭐 먹고 있었어요?”
“그레이스 학생도 왔군. 자네도 이리 와서 먹게.”
“케엥?”
“너부리도 먹고.”
고구마가 나오자마자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했다. 양도 많은 편이라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냠냠냠냠.”
“옴뇸뇸.”
맛있게 고구마를 먹고 있는 나. 마찬가지로 내 무릎 위에 앉아 고구마를 먹고 있는 너부리.
피죤투도 루나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그나저나 새가 고구마를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뭐 혼돈의 숲에서 성장한 새이니 먹어도 괜찮을 거다. 육식마저 하는 놈인데 잘 먹겠지.
“잘 먹는군. 이제 라타토스크한테 줄 것만 남기면 되겠어.”
“성녀님은요? 오늘 안 오신대요?”
“안 온다고 들었다네. 제자를 가르치느라 바쁘다더군. 애초에 고구마를 준 사람이 리제였다네.”
로드가 아니라 리제가 준 거구나. 고구마는 제철 음식이어서 별로 의심하지도 않았다.
“냠냠냠냠.”
“시바르.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야?”
“맛있어.”
정말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라 그럴까. 거의 흡입하는 수준으로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
고구마와 찰떡인 우유까지 있어서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양도 엄청 많다.
“시바르. 그만 먹어. 라타토스크한테 줄 것도 남겨야지.”
“한 개만 더.”
“그냥 더 찌는 게 낫겠군. 허허허.”
로드는 내 먹는 모습이 흐뭇했는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고구마의 양이 꽤 많은 모양이다.
이윽고 남아있는 고구마들을 전부 처치했을 때쯤 아주 익숙한 기척이 내 감각에 잡혔다.
똑똑똑-
정문이 아니라 창문 쪽이다. 이에 창문 쪽을 쳐다보니 웬 돼지가 한 마리 떡하니 있더라.
빈말이 아니라 거의 돼지에 준할 정도의 푸짐함이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다.
드르륵-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뭐 먹고 있었어?”
“어… 라타토스크?”
“왜 불러?”
포로리였다. 그런데 루나의 떨떠름한 반응을 보듯이 포로리의 모습이 썩 이상했다.
분명 사냥꾼에게 생명력이 빨렸을 텐데 뭐랄까. 건강하다 못해 너무 푸짐해졌다.
도대체 여태까지 뭘 먹고 있었으면 애가 저리 펑퍼짐해질 정도일까. 볼살이 툭- 나올 정도다.
“살이 좀… 많이 찐 것 같다?”
“그러게요.”
다른 사람들도 포로리의 상태가 영 이상하다는 걸 간파했다. 살이 뒤룩뒤룩 쪘다.
이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에게로 향했다. 포로리는 지금껏 엘리의 기숙사에서 지냈던 걸로 안다.
엘리도 푸짐하게 변한 포로리를 보고 어색하게 웃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것저것 많이 주긴 했어요. 아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대체 뭘 줬길래 살이 저 정도로 쪄?”
“원래 이맘때쯤이면 다 그래.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거든. 읏차.”
포로리가 대신 답하면서 가볍게 점프했다. 살이 찐 것과 별개로 몸놀림은 그대로다.
확실히 겨울이니 포로리의 살이 늘어나는 건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숲에서도 항상 그래왔으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엘리의 비호까지 받고 있었으니 살이 찌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뭐 먹고 있었냐니까? 엄청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고구마라고 있었는데 시바르가 다 먹었어.”
“뭐?”
포로리가 나를 째려봤다. 그렇게 째려보면 뭐 어쩔 건데.
더구나 천천히 기다리면 다른 고구마도 올 예정이다. 지금 싸울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건 애완동물들의 상태를 파악하는 거니까. 이에 엘리가 먼저 포로리에게 부탁했다.
“라타토스크. 너는 동물이니까 다른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대충은? 동족이 아니면 조금 힘들지. 사람으로 따지자면 방언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
“그거면 됐어. 그럼 피죤투랑 너부리 말 좀 통역해줄래? 얘들이 뭘 선호하는지 잘 모르거든.”
지금이야 이것저것 다 주고 있다지만 각자마다 선호하는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의 정보의 전달도 매우 느리고 하물며 혼돈의 숲에서 살다 온 개체들이라 입맛이 다를 수도 있다.
물론 포로리처럼 단순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얘는 종족 자체가 다람쥐라 파악이 쉬운 편이다.
“알았어. 야. 너희들 숲에서 뭐 하다 왔어? 우선 너부터.”
“케엥?”
“그래. 너 임마 너. 뭐하다 왔어?”
다람쥐 주제에 팔짱까지 끼며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포로리.
살이 조금만 덜 쪘더라면 괜찮은데 포동포동해지니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래도 동물들에게는 나름 카리스마가 있었을까. 너부리는 포로리의 지시에 충실히 답했다.
“케엥. 켕.”
“가족들이 전부 잡아먹혔다고?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구걸하고 다녔다?”
“켕. 케엥.”
“그런 상황에서 이 녀석과 만났다라… 이 녀석을 따라가면 먹을 걸 줄 것 같아서 왔다는 거지?”
“켕.”
너부리의 사정은 꽤 기구한 편이다. 가족들이 먹이 경쟁에 패배해 쓸쓸히 남은 개체라고.
과거의 나처럼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이용한 케이스다. 그 과정에서 나를 만나 이곳에서 온 거라고.
“케엥.”
“먹을 걱정만 덜어주면 평생 동안 따르겠다는데?”
“고구마 하나 더 줄까?”
“켕! 케엥!”
내 권유에 너부리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고구마 반 개 정도는 줘야겠다.
이렇듯 너부리의 이야기는 끝나고 다음은 피죤투였는데…
“짹! 째액!”
“하늘에서 이 녀석이랑 엄마가 같이 떨어졌다… 라는데?’
“…”
피죤투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루나도 본인이 원흉이라는 걸 알았는지 헛기침을 하며 모르는 척했다. 저런다고 다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피죤투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피죤투가 로드를 힐긋거리더니 날개짓을 했다.
피죤투가 날개짓을 하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그에 의문을 품었을 때 피죤투가 말했다.
“째액! 짹!”
“늙은 인간이 날개짓을 알려줬다고? 그리고 다양한 먹이를 줬다… 라는데?”
“응? 총장님께서.”
“허허허허. 고구마가 다 익었나?”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로드가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아직 고구마가 다 익으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을 텐데.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았으나 애써 참았다.
“그럼 앞으로 이 녀석들을 따르는 거지?”
“케엥.”
“짹!”
“먹이만 잘 주면 따르겠다는데?”
너부리와 피죤투 문제는 손쉽게 해결됐다. 먹이만 잘 주면 끝이더라.
나도 먹이는 충분히 줄 생각이었기에 별 생각 없었다.
“부럽다.”
“?”
옆에서 엘리가 작게 속삭이는 걸 듣기 전까지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묘한 표정으로 너부리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가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한 번 힐끔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나도 잘 따를 자신 있는데.”
순식간에 치고 들어와서 할 말이 잃어버렸다. 가끔 응큼한 짓을 한단 말이야.
이에 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엘리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뒤이어 내 귓가에다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멍.”
“…”
“헤헤.”
화룡점정으로 천진난만한 웃음까지. 내 얼굴이 조금씩 화끈거렸다.
이 화끈거림을 조금이라도 물리기 위해서는 딴짓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고구마라든가.
“여기 고구마 있다네. 조금씩 먹게나.”
때마침 적절하게도 고구마가 도착했다. 꽤 빠른 시간이다.
아마 로드가 무슨 조치를 취한 게 아닐까. 지금은 맛있게 먹어야지.
“앗뜨뜨뜨!!”
“어휴…”
너무 당황해서 학습 능력이 떨어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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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일주일 후.
“…시바르?”
“응?”
“살이 좀… 찐 거 같다? 얼굴이 포동포동해졌는데?”
나는 에너지를 충분히 비축할 수 있었다.
“그래?”
“일단 손에 든 고구마부터 내려놓자.”
“하나만.”
오랜만에 먹어서 끊을 수가 없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애완동물 특: 고구마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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