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0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혜로운 현자 그 자체였는데 순식간에 천박한 변태 영감으로 변했다.
순간 눈을 뽑아야 할지 아니면 혀를 뽑아야 할지 잠깐이나마 고민할 정도.
말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 것이 심상치 않은 영감이라는 건 확실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 분은 누구야?”
우리 앞으로 다가온 엘리가 특유의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과 얼굴을 서로 번갈아 봤다. 분명 겨울옷인데 어쩜 이리 야하게 느껴질까.
나름 두껍게 입었음에도 압도적인 흉부는 가릴 수 없었다. 오히려 독보적이다.
‘확실히 옷이 좀 다양하긴 하구나.’
중세 시대답게 옷을 대충 껴입은 수준이었지만 그 안은 스웨터 비슷한 복장이다.
그 덕분에 엘리의 몸매가 가려지지 않은 거겠지. 본인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냥 이상한 할아버지. 이름은 워덴이셔.”
“이상한 할아버지?”
“이 고얀놈. 기껏 손금까지 봐줬더만.”
이상한 할아버지 맞잖아. 말 하나로 천박함과 지혜를 오가는 할아버지.
나는 워덴이 투덜거리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만약 여기서 성질을 낸다면 뻔뻔한 거지.
그나마 워덴도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혀를 쯧쯧차더니 엘리에게 말했다.
“이보게. 참한 처자.”
“네?”
이야. 어쩜 말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참하다는 말 하나로 천박함을 표현할 수 있다니 여러모로 대단하다.
내가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워덴은 말 대신 지팡으로 자기 옆을 두드렸다.
일어서서 말하기는 조금 그러니 자기 옆에 앉으라는 신호다. 하지만 그걸 두 눈으로 볼 내가 아니다.
“엘리. 여기 앉아.”
“응? 하지만…”
“앉아.”
저 변태 영감 옆에 둘 수는 없지. 옆에 뒀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내 강압 아닌 강압에 엘리는 눈치를 보다가 멋쩍게 웃으며 엉덩이를 붙였다.
당연하지만 워덴의 옆이 아니라 내 옆이다. 워덴은 그런 우리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탓에 표정을 살펴볼 수 없었지만 대충 ‘이놈 시키 봐라?’에 가까운 분위기다.
“세상 참 말세여 말세. 노인의 부탁도 무시하고.”
“아. 그건…”
“건드리지 마.”
워덴의 한탄에 엘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경고했다.
내 밀착에 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지만 이내 배시시 웃었다. 뒤이어 나에게 조용히 기대었다.
훈훈한 우리의 모습이 흐뭇하기라도 했던 걸까. 워덴은 방금 전의 투덜거림과 다르게 씨익 웃었다.
수염으로 덥수룩한 입이었음에도 새하얀 치아가 돋보일 정도였다. 저렇게 웃는 건 또 처음 보네.
“어쩜 이리 욕심도 많을꼬.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구나.”
“…”
“처자가 아주 참하니 아이는 문제가 없겠군. 물론 남자가 구실만 제대로 한다면 말이야. 흘흘.”
이 사람이 벌써 노망이 들었나. 아니 노망이 든 게 아니라 고도의 돌려까기다.
엘리는 조금 엉뚱한 면이 있는 걸 빼면 완벽한 신붓감이다. 솔직히 귀족에게 시집을 가도 될 정도.
워덴은 엘리에 비해 내가 부족하다고 돌려깐 것이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기까지.
나는 살짝 울컥했으나 말려들지 않기로 정했다. 그 대신 그대로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할비요.”
“응? 나 부른 게냐?”
“서요?”
“…”
단 한마디로 구실이니 뭐니 지껄인 워덴을 격추시켰다.
내가 속으로 실실 웃는 동안 워덴은 허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꽤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이어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어린아이마냥 투덜거렸다.
“에잉. 쯧쯧. 젊은 놈이 말본새하고는. 대체 누굴 닮았는지 원.”
나 부모님 없는데. 있긴 하지만 아주 먼 곳에 있다.
구태여 이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냥 워덴을 골려먹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무튼 참한 처자. 처자는 왜 이곳에 왔는가? 남편 만나러 왔나?”
“네? 나 남편이요?”
“하는 짓은 부부인데 뭘 그리 놀라나?”
“아. 그게… 헤헤. 결혼은 안 했어요.”
엘리가 얼굴을 붉히며 쑥쓰럽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여자친구… 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다. 이미 키스까지 한 마당에 무슨 개소리냐 할 수 있겠지.
그냥 공표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장 엘리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 상황이라 눈치를 보는 거다.
“뭐야? 그럼 아이도 없어? 아이 몇 명 낳아도 납득이 가는 몸인데.”
“낳고 싶은데 시바르가 피해서요. 학업도 있고.”
“학업은 때려쳐. 여자는 무조건 가정적인 게 최고야. 어차피 애를 낳을 건데 학업이 무슨 쓸모가 있겠어?”
“그래도 배우고 싶은 건 배우려고요.”
뭐지. 이 묘한 익숙함은.
마치 며느리와 장인어른이 투닥거리는 느낌이다. 본래라면 장인어른이 아니라 장모님이겠지만.
사실 아카데미가 존재한다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을 일찍 하는 편이다.
원래 엘리의 나이대가 딱 그에 맞는 수준이다. 워덴의 상식이 이상한 건 절대 아니다.
‘이건 꼰대라고 하기에도 뭐하네.’
워덴은 지극히 시대에 맞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엘리도 시대에 맞는 반박을 할 뿐이고.
단지 아카데미의 존재 자체가 시대를 앞서 나갔을 뿐이다.
“애를 낳는다면 겨울에 무조건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 뜨개질이라도 배우렴.”
“새겨들을게요. 먹는 거는요?”
“꿀은 절대 먹이지 마. 아기들한테는 독이나 똑같으니까. 알겠니?”
“네? 꿀이 왜 독이에요?”
그래도 가끔 유용한 지식을 건네줬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지혜로운 현자 같다.
실제로 나조차 잊고 있었던 지식을 알려줘서 감탄이 나올 때가 많았다.
“그리고 모유 먹일 때 조심하렴. 자칫하다 애가 질식할 수도 있어.”
“…”
문제는 말 속에 묘한 천박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 현자스러운 말인데 뭔가 애매하다.
대신 지식 자체는 유용해서 그냥 넘어갔다. 엘리도 천박함 자체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어디서 오셨어요?”
“아주 먼 곳에서 왔지. 친구놈 자식이 잘 있나 보러 왔거든.”
“먼 곳이라면 어디인가요?”
“매번 이름이 달라지는 곳이라 말하기도 애매하구나.”
마을 이름이 달라진다라.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아는 듯했다. 이에 궁금해져 그녀에게 물었다.
“마을 이름이 달라져? 무슨 말이야?”
“아주 옛날에는 그런 적이 많아. 몇몇 나라는 마을을 처음 세울 때 세금을 덜 거두거든. 징수원도 매번 달라지니 이용하는 거지.”
“그거 안 들켜?”
“흘흘. 안 들키는 방법이 있지.”
내 의문에 워덴이 사악하게 웃었다. 현자긴 현자인데 나쁜 의미의 현자스러운 반응이다.
그에 내가 이상한 눈길로 워덴을 바라봤을 때였다. 옆에서 엘리가 타박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할아버지. 그거 이제 안 통해요. 시도한 마을이 워낙 많아서 이제는 사형까지 갈 수도 있어요.”
“사형시켜보라지. 어차피 질긴 목숨.”
“…”
상남자가 늙으면 이런 식으로 늙는 건가. 윗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다 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거겠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노인이다.
“으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워덴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나와 엘리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봤다.
맑은 하늘에는 오직 태양만이 당당하게 존재했다. 다만 태양의 위치가 높아진 걸 보면 시간이 꽤 흘러간 것 같다.
단순한 대화임에도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그만큼 워덴이 상당히 수다스러웠다는 뜻이다.
“가기 전에 참한 처자. 잠깐 손 좀 내밀어줄 수 있겠나?”
“손은 왜요?”
“자네의 손금을 확인하고 싶어서 말일세. 동방에서 배운 기술이야.”
워덴의 부탁에 엘리가 나를 바라봤다. 이거 믿어도 되냐는 무언의 질문이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무언의 허락이었다.
어차피 재미로 보는 거라서 상관없다. 대놓고 주물거리지만 않으면 말이다.
“어디 보자… 으잉?”
그런데 엘리의 손금을 보자마자 해괴한 소리를 내더라. 도대체 뭘 봤길래 저러는 걸까.
게다가 엘리의 얼굴과 손바닥을 번갈아 보기까지. 꽤 당황한 반응이다.
“왜 그러세요? 혹시 안 좋은 거라도 있나요?”
“처자. 자네 나이가 몇인가?”
“음… 아마 19살? 20살? 그 정도 될 거예요.”
아카데미 입학 나이는 상관없다. 당장 카라도 엘리보다 2~3살쯤은 더 많을 것이다.
엘리가 본인의 나이를 잘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충 결혼할 때쯤 되면 결혼하는 법이니까.
내가 기억하기로 엘리와 루나의 나이가 가장 어릴 것이다. 물론 크게 의미 없는 수준이다.
“이런 말을 하기 미안하지만… 23살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네.”
“네?”
“생명선이 짧아도 너무 짧아.”
23살을 넘기기 어렵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소울 월드에서도 엘리는 죽음의 위기를 셀 수도 없이 넘겼다.
그나마 후반이 된다면 밸런스고 뭐고 의미가 없어져 괜찮지만 그전까지는 매우 위험하다.
“왜 왜요? 왜 23살을 넘기기 어렵나요?”
“그건 나도 잘 모르네. 하지만 총 5번의 위기를 넘기면 생명선이 멀쩡해질 거야. 다행히 지금은 두 번이나 넘겼군.”
“두 번이요?”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으나 머지않아 깨달았다.
맨 처음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 망키의 손에 곤죽이 되려는 걸 겨우겨우 막았지.
두 번째는… 아마 신입생 환영회 때가 아닐까. 그때 자칫했으면 순결이 더럽혀질 뻔했으니까.
순결이 더럽혀졌다면 엘리의 성격상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 어릴 때 버섯을 잘못 먹었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어요. 그것도 하나로 치는 건가요?”
“아닐세. 본래 생명선이 존재하다가 희미해진 케이스라네. 매우 강력한 운명이 처자를 바꾼 거지.”
“강한 운명이요?”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아마 아카데미 입학을 말하는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멀쩡히 살던 사람이 개복치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가 문제긴 문제다.
“그런 게 있네. 아무튼 앞으로 세 번만 잘 넘기면 될 걸세. 다행히 수호자가 든든히 버티고 있어서 한 번은 버티겠군”
“수호자?”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해주게나. 그 수호자가 자네를 대신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
저것도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다. 엘리도 비슷한 마음인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수호자가 대신 목숨을 잃는다. 수호자라 할만한 존재는 나와 포로리밖에 없다.
이 말은 즉 나와 포로리에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가 온다는 것.
마냥 방심할 수 없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포로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게 좋을 듯했다.
단순한 미신이지만 대비해도 나쁠 건 없다. 실제로 사냥꾼에게 당할 뻔했지 않았는가.
“다음은 가족운인데… 호오. 아주 진하군. 남편이 누구인지 몰라도 참 행복한 가정을 이룰 거야.”
“정말요? 헤헤헤.”
“대신 그 남편이 자네에게 신경을 쓴다는 가정 하에. 아직은 길이 엇갈린 상태로군.”
워덴은 그리 말하며 나를 힐긋거렸다. 아마 저건 내 목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고향으로의 귀환이다. 그러니 엘리의 가족운이 엇갈렸다는 거겠지.
“음… 나머지는 그저 그렇군. 보아하니 운명을 누군가에게 맡긴 것 같은데 아닌가?”
“시바르에게 맡겼어요. 제 목숨을 구해줬거든요.”
“요놈 시키. 이런데 결혼을 안 해? 네놈은 천벌 받을 거다.”
“아니. 저는 왜?”
갑자기 현자에서 또 괴팍한 노인으로 변하네. 나는 워덴이 지팡이로 삿대질을 하자 억울해졌다.
나도 마음이 없는 게 절대 아니다. 단지 상황 때문에 받아들이기 애매할 뿐이다.
“에구구. 여기까지 얘기해야겠구만.”
엘리의 손금까지 확인한 워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을 충분히 취한 모양이다.
이에 나와 엘리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워덴이 손을 내저었다. 도움은 필요없다는 소리다.
“만날 사람이 있네. 자네들은 올 필요가 없어.”
“그래도…”
“아까도 말했지만 젊은이의 도움을 받을 만큼 약하지 않네.”
구부정한 허리와 반대로 강인한 목소리다. 정말 도움이 필요없을 것 같다.
“이보게. 어린 친구.”
“저요?”
“그래. 어린 놈이 자네 말고 더 있겠나?”
아까는 젊다고 하더니 이제는 어리다고 하네.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른이 얘기하니 들어야겠지. 나는 경청의 자세로 취했다.
“목표를 다시 정하는 게 좋을 걸세.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니까.”
“…”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좋은 대화였다네.”
워덴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걸음을 옮겼다. 살짝 구부정한 허리와 반대로 걸음걸이는 꽤 빨랐다.
나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엘리도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했다.
“신기한 할아버지야. 그렇지?”
“그러게.”
그러부터 잠시 후.
“이 고얀년을 보았나! 그게 어른에게 할 소리냐?”
“악! 때 때리지 마세요…!”
“…?”
워덴에게 지팡이로 맞고 있는 루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참고: 엘리가 죽을 위기 중 하나는 아이를 낳을 때다(실제로 위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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