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1
봄은 생명과 따뜻함의 계절이다.
앙상했던 나무들은 하나둘씩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겨울잠에 들었던 동물들도 기지개를 펴며 기상하는 계절.
수많은 생명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겨울의 혹독함을 버틴 끝에 얻은 따스함은 그 무엇보다 달콤하다.
이는 문명 또한 마찬가지. 1년 내내 날씨가 비슷한 곳이어도 대부분의 시작은 봄에 이루어지는 편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시작하는 초입 단계. 모든 생명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슬슬 입학식이네요. 카라 씨는 입학식을 2년 전에 하셨죠?”
“난 입학식 안 했어. 중간에 적응기처럼 편입했거든.”
유나이티드 아카데미도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한창 바빠지기는 시기다.
신입생이었던 학생은 2학년으로 올라가고 또다른 신입생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국 수준을 넘어 전세계에서 인재가 모이는 만큼 위쪽도 매우 바빠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알음알음 들리는 소문이 있기에 수많은 관계자들이 흥미를 가지는 편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프로즌 공국의 공녀가 입학한다고 들었어요. 그외에는 딱히 없네요.”
그레이스가 말했다. 평소 수많은 소문을 수집하는 그녀이기에 크고 작은 정보는 미리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재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 정세가 불안정하기 때문인지 눈에 띄는 정보는 없었다.
“아. 한 가지 더 있네요. 의외로 동방 쪽에서 온 입학생이 많다네요.”
“동방 쪽에서? 지금 동방은 반란이니 뭐니 하면서 이상한 소문만 돌아다니잖아.”
카라가 의문을 드러냈다. 동방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시도때도 없이 테러가 일어나는 산티아보다는 낫지만 불안정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괄목할 일이다.
하물며 2학년 과정 중에 동방을 방문하는 일정도 있었기에 주의 깊게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많이 입학하는 거죠. 동방은 혈연에 상당히 보수적이거든요. 위험한 때를 대비해 씨를 안전한 곳에 숨기는 거죠.”
“아카데미라 해서 안전한 건 아닐 텐데. 당장 황녀도 있는 마당에.”
“그건 그쪽들이 알아서 하겠죠. 여기 체크메이트.”
“아.”
말을 하는 도중에 그레이스의 기물이 카라의 킹을 먹어버렸다. 카라는 그걸 보며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이들은 그레이스의 숙소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할 겸 겸사겸사 체스를 두고 있었다.
입학식 전까지 마땅히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매번 로드의 거주지에 모이는 건 민폐다.
당장 로드도 입학식 준비로 바쁠 시간이니까.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바쁠 시간이다.
“에이씨… 이럴 줄 알고 나이트를 아낀 건데 아쉽네.”
“너무 아꼈어요. 킹이 잡히는데 버릴 건 버려야죠.”
“쩝. 그럴 걸 그랬나?”
카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빙긋 웃으며 체스판을 돌려놓았다.
카라가 체스를 못하는 편은 아니다. 단지 익숙하지 않아 공식을 모를 뿐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충분히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다 끝나셨으면 이거 드세요. 맛있는 쿠키랍니다.”
“오! 고마워.”
때마침 끝날 타이밍에 엘리가 맛있는 쿠키를 대령했다. 카라는 그걸 보자마자 반색했다.
엘리가 만든 쿠키는 타타르 출신인 카라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엄청 달다는 뜻이다.
그레이스도 단 간식을 좋아했기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아참. 카라 언니.”
“응?”
“이번 신입생 중에 타타르에서 오는 사람이 있어요?”
“일단 없는 걸로 알아. 아마 내가 졸업할 때쯤부터 오지 않을까 싶네.”
타타르는 신생국가다. 아직 제대로 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을 수습하는 것만으로 힘든데 아카데미에 학생을 보낼 여유가 없다.
카라는 어디까지나 선례라는 의미로 보낸 거라 가능한 거지 타타르도 동방 못지 않게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바르는 체스 잘 두는 편이야? 이건 좀 궁금하네.”
카라가 입에 쿠키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체스를 두니 시바르의 체스 실력이 궁금해졌다.
시바르의 머리가 똑똑하다는 건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좋게 말하면 지혜고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다.
지혜로울 때는 한없이 지혜롭다가 잔머리를 굴릴 때는 정말 영악하다. 이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머리를 체스 같은 쪽에 쓴다면 어떻게 될까. 때마침 그레이스가 있었으니 질문할 수 있었다.
“음… 솔직히 말하면 잘 못 두는 편이라 해야겠죠?”
“못 두는 편이라고?”
“룰은 다 이해했죠?”
카라의 의문 다음으로 엘리의 질문이 이어졌다. 다소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었으나 속내는 달랐다.
당장 엘리 본인마저 체스 규칙을 모르고 있다. 외우는 것과 이해는 별개의 영역이다.
자기 손발처럼 움직이는 느낌이 아니랄까. 시바르도 비슷한 이유인 줄 알았다.
“룰은 다 이해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룰 때문에 시바르 씨의 창의력이 다 망가지더라고요.”
“창의력이 망가진다고?”
“시바르 씨의 전투를 제한했던 시험 기억나시죠?”
알다마다.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당시 시바르가 선사한 충격과 공포는 여러 의미로 전설로 남았다.
오죽하면 ‘고문 금지’ 및 ‘폭탄 조끼’ 금지라는 새로운 규칙마저 생길 정도. 그만큼 충격이었다는 뜻이다.
조만간 신입생들이 그 시험을 치를 때 시바르의 예시를 둘 가능성이 높다. 따라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이다.
“시바르 씨를 규칙 안에 가두어도 본인이 자유로운 이상 기상천외한 방법을 내놓죠. 그게 제일 큰 강점이기도 하고요.”
“하긴 그렇지. 난 무전 시험 때가 제일 황당했는데.”
“그것도 교수님들이 감탄했죠.”
무전 실습 당시에도 교수들은 시바르에게 만점을 부여했다. 상대방에게 고의로 무전을 보내어 끌어오게 하는 전략.
잔머리가 아닌 지혜를 보여준 적이 상당히 많다.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지능이 낮은 건 절대 아니다.
“그거 때문에 교수님들 사이에서 연구거리로 떠오르고 있더라고요. 환경과 지능은 무관하다는 걸로.”
“그 이야기 많이 들었어. 논문으로도 낸다고 하지 않았나?”
“지능이 낮았다면 혼돈의 숲에서도 살아남지 못했겠죠.”
시바르가 입학한 지 1년이 흐른 지금. 시바르는 뜨거운 감자를 넘어서 요주의 인물로 급부상했다.
야만을 넘어 날 것 그 자체의 삶을 산 사람이어도 적절한 교육과 지도가 있다면 충분히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야만적이라 해서 지능이 낮은 건 절대 아니다. 그저 못 배웠을 뿐이다라고 말이다.
“카라 씨한테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
“뭐… 시바르한테 시선이 다 쏠리는 나머지 편해지긴 했지.”
카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바르 덕분에 카라도 적지 않은 수혜를 입었다.
우선 시선이 분산된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가 바로 인식이다. 카라를 여전히 야만인이라 인식하는 건 여전하다.
그러나 폭력 문제로 떠들석했던 때와 다르게 새로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연하지만 시바르 덕분이다.
여태까지 시바르가 폭력 사태를 일으켰던 건 상대방이 화근이었을 때가 전부다. 당연하게도 정당방위 조치가 됐고.
그런데 정작 카라와는 잘 지내다 못해 미묘한 소문까지 흐르고 있었으니 자연히 시선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틈만 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야만인이 아니라 단지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거라고.
카라 본인의 노력도 포함돼 있어서 차별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재학생 기준이잖아. 신입생 중에 나한테 얻어터질 사람이 나올 수도?”
“그전에 시바르가 먼저 때리지 않을까요?”
“아니. 그전에 저희가 신입생이랑 연관될 가능성이 거의 없죠.”
이들이 1학년일 때 조교를 제외하고 고학년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3학년부터는 실습 위주라 아카데미 안보다 밖에서 활동할 일이 더 많으니까.
그나마 2학년이 조교로서 1학년과 연결돼 확률이 높다. 그래봤자 얼마 되지 않지만.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그레이스의 의견에 엘리가 반박했다. 이에 그레이스와 카라가 그녀를 쳐다봤다.
“별의별 이상한 소문이 다 흐르는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지 않을까요? 최근에 또 하나 적립하기도 했고.”
“최근에?”
“네. 야생인이 이상한 보법으로 사람들을 홀렸다! 이런 식이요.”
“아.”
엘리의 말에 다들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념일 당시 축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많은 외부인이 몰려든 만큼 소문도 발빠르게 퍼졌는데 시바르의 보법(?)과 관련된 소문이 대부분이다.
기묘한 보법으로 사람들을 홀렸다니. 망측하지만 야생인에 어울리는 춤을 췄다든지 등등.
그러나 ‘문화 충격’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그때는… 충격이긴 했지. 난 처음에 구애의 춤인 줄 알았어.”
“푸핫! 구애의 춤이요?”
“솔직히 맞잖아. 그런 식으로 골반을 튕기는데 딱 구애의 춤이지.”
“묘하게 어울리네요. 그리고…”
그레이스는 말을 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구애의 춤과 함께 떠오른 가사 때문이었다.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웬 아이를 데려와 친자라고 했던 가사. 그걸 부정하는 가사다.
공연이 발생한 직후에 몬스터 습격이 터져서 깜빡 잊고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서서히 하강했다.
“…카라 씨? 그리고 엘리 씨?”
“응?”
“네?”
“말이 나와서 하는 건데요…”
그레이스는 카라와 엘리를 천천히 번갈아 봤다. 시바르를 두고 매섭게 경쟁하는 여자들.
다들 시바르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으며 상황만 받쳐준다면 언제 어디서든 위로할 여인들이다.
비록 리제의 경고 아닌 경고로 참고 있는 거지 때가 된다면 시바르를 덮치게 될 터.
“그… 다들 시바르 씨랑 어디까지 했나요?”
“뭐?”
“네?”
그레이스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서로를 쳐다봤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들. 이에 카라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그 말을 왜 하는 거야?”
“중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서요.”
“중요한 이야기?”
“네. 그러니 사실대로 얘기해줄래요?”
“딱 키스까지만 했는데? 네가 직접 봤잖아.”
-꿈틀
직접 봤잖아. 그 한마디에 그레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직도 기억이 났다. 시험 당시 시바르를 얻기 위해 카라가 먼저 도착했던 일.
그때 카라가 대놓고 시바르의 입술을 탐했지 않았는가. 그 여파로 기절했던 걸로 안다.
“…그렇군요. 엘리 씨는요?”
“저는 연습용으로 뽀뽀… 헤헤.”
“…”
엘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어쨌든 했다는 이야기다.
그레이스로서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때 시바르가 공연을 펼치며 꺼낸 가사가 머리를 맴돌았다.
그 반응에 눈치가 유난히 좋았던 카라가 의문을 드러냈다.
“갑자기 그건 왜? 이제는 키스까지 순번을 두려고?”
“아뇨. 그건 아니에요. 단지… 가사가 거슬려서요.”
“가사? 무슨 가사?”
“시바르 씨가 춤을 추면서 꺼낸 가사 있잖아요.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아요?”
“음…”
카라는 그레이스의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했다. 확실히 가사만 듣는다면 묘한 기분을 일으켰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그저 그렇구나~ 라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들은 아니다.
호시탐탐 시바르의 정조(?)를 노리고 있었기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시바르가 왜 그런 가사를 지은 거지?”
“설마 그레이스 씨가 먼저 했어요?”
“아뇨. 같이 자긴 했지만 한 적은 없어요.”
“뭐야? 줘도 못 먹고 있었네. 그럴 바에야 나한테 주지 그랬어?”
카라가 킬킬거리며 그레이스를 놀렸다. 그녀 입장에서는 그레이스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녀였다면 덮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맛있는 케이크가 떡하니 있는데 참으면 바보다.
이에 그레이스가 순간 울컥했으나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지금 화를 내봤자 좋을 건 없다.
“후우. 이번만 넘어가드릴게요. 아무튼 시바르 씨가 그 가사를 지었다는 건… 무슨 뜻인지 알죠?”
“우리 몰래 만나는 여자가 있다? 이거지?”
“설마 루나를 말하는 거예요?”
카라의 날카로운 이야기 다음으로 엘리가 의견을 꺼냈다.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다.
서로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가만 보면 둘이서 얘기하는 빈도가 많은 편이다. 그것도 몰래.
다른 사람이 본다면 밀회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법도 하다.
“루나 씨라… 제일 가능성이 높긴 하네요. 당장은 말이죠.”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바보가 무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친구 사이는 없다지만 시바르와 루나는 예외다. 진정한 의미로 친구라 할 수 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과 아무 감정이 없는 여자의 눈은 구분할 수 있었으니.
무엇보다 루나의 화법을 고려하면 있던 정도 탈탈 털릴 것이다.
“흠… 여러분의 의견이 그렇다면야…”
그레이스는 그 의견에 동의하다가 의문을 표했다.
“아 씨. 그럼 누구지?”
*****
한편 비슷한 시각.
수사망이 점차 좁혀오는 상황 속에서 교묘히 의심 대상에서 벗어난 단예린은…
“이제 곧 입학식이구나. 기대되는군.”
“그러게.”
“그대도 입학식은 처음이지 않나?”
“응. 처음 봐.”
“우리 둘 모두 처음이로군.”
아주 대범하게도 바로 옆방에서 시바르와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단예린은 침대에 누워 있는 시바르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행복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뺨에서 올린 손을 서서히 움직였다.
이윽고 입술에 닿았을 때쯤 단예린이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 처음일 때가 많아지겠지.”
“아마도?”
“가능하면 그대의 처음을 갖고 싶구나.”
중의적인 표현이었으나.
“내 처음도 말이지.”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봄이 다가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단예린: ㅋㅋㅋ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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