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4
나는 보았다. 말보로가 손을 든 날 보자마자 3초 동안 멈춘 것을.
아마 지금쯤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그만큼 이해가 안 간다는 의미다.
쟤가 왜? 무슨 이유? 대체 뭘 하려고? 등등.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출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말보로는 헛기침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흠. 흠. 미리 말하지만 조교직을 수행하게 된다면 자유 시간이 거의 없어질 거다. 2학년 시험은 물론 1학년들의 시험도 도와줘야 하니 당연한 일이지.”
그렇다고 제가 손을 내릴 줄 아시나요. 어림도 없죠.
나는 말보로의 설명을 들어도 꿋꿋이 손을 들었다. 이것 보라는 듯이 말이다.
결국 말보로도 긴 한숨을 내쉬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년 동안 지켜봤으니 내 성향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자네들도 알다시피 조교는 한 반에 2~3명 정도 배정되는 편이다. 그리고 현재 손을 든 사람들은 10명이 넘는군. 일단 반 정도는 거르겠다.”
“아까 대련을 한다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5명 이하일 때의 이야기다. 너무 많으면 시간도 부족해서 알아서 거를 수밖에 없지.”
“아닌 것 같은데…”
설명을 들은 카라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나를 힐끔거렸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나를 저격하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저건 저격이 아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매뉴얼이자 원칙대로 할 뿐이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 때문에 차별처럼 들리는 것이다.
“미리 말하지만 차별은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반에서 선출되는 조교 후보들은 공평한 게임을 통해 선출되기 때문이지.”
“공평한 게임이요?”
“그래.’
말보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천천히 들었다. 주먹을 쥔 손이다.
이윽고 그는 주먹을 쥔 손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위바위보.”
“…?”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게임이지.”
가위바위보로 후보를 선출한다고 하자 곳곳에서 의문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간단한 게임이어서 그렇다.
하지만 그 어느 무엇보다 공평한 게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운’이 아니라 ‘실력’이다.
‘상대가 뭘 내는지 보고 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동체시력 및 반응 속도에 따라 가위바위조차 실력이 판가름나기 마련이다.
당장 나도 로드와 가위바위보를 하면 10번 중 9번은 진다. 사실 한 번 이긴 것도 대단한 것이다.
로드는 기본기만으로 검성의 자리에 오른 실력자였으니까. 화려한 검술이 아니라 상대방의 심리를 전부 꿰뚫고 있다.
“규칙은 간단하다. 자네들끼리 붙는 게 아닌 나와 붙는 것. 또한 한 명 한 명 상대하는 게 아니라 단체로 상대하는 거다.”
“단체로요?”
“그래.”
말보로가 언급한 규칙도 익숙하다. 솎아내기에 편리한 방법이다.
말보로가 주먹을 냈다고 치자. 그와 상대하는 사람들 중에 비기거나 지면 그대로 탈락이다.
승리할 확률이 약 33퍼센트인 셈. 현재 손을 든 조교 후보생만 하더라도 10명 정도였으니 적당한 방법이다.
“후보생은 모두 등을 돌리도록.”
“응?”
“공평함을 위해 운으로 고르겠다.”
이건 예상치 못했다. 등을 돌린 채 가위바위보를 하라는 말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까도 말했지만 가위바위보는 실력으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탁월한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만 있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말보로는 그걸 사전에 차단시켰다. 나를 어떻게든 떼어놓겠다는 의지인지 아니면 매뉴얼인지 잘 모르겠다.
‘이상하네. 소울 월드에서는 분명…’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울 월드에서는 분명 등을 돌리지 않고 가위바위보를 진행했다.
나 때문에 운으로 승부를 보려는 티가 팍팍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그래도 뭐 어쩔 수 있겠나. 말보로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과 별개로 괘씸하지만.
‘어떻게든 이기고 만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등을 돌렸다. 말보로의 희망을 산산조각 낼 예정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운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만큼 걱정됐다. 이러다 떨어지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뭐부터 내야하지? 무승부도 지는 판정이니까… 가위부터 낼까?’
가위부터 내자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신앙이 하락합니다.]
정말 뜬금없이 신앙이 하락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메시지를 쳐다봤다.
어째서 카오스가 신앙을 떨어뜨렸는지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눈치챌 수 있었다.
‘어… 그럼 바위?’
[신앙이 하락합니다.]
‘그럼 보?’
[신앙이 상승합니다!]
카오스께서도 꿀잼을 놓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메시지를 믿기로 정했다.
“안 내면 진… 흠흠.”
“…”
말보로가 말하려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저거 분명 안 내면 진다라고 말하려던 거 맞지.
아무래도 아들내미가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온 모양이다. 평소 근엄했던 분위기가 약간 떨어졌다.
그래도 상관없지. 말보로는 헛기침을 하자마자 곧장 입을 열었다.
“가위바위… 보!”
나는 그 즉시 보자기를 냈으며.
“아.”
말보로의 탄식이 귀에 들어왔다. 망했다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탄식이다.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나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등을 천천히 돌렸다.
등을 돌리니 말보로가 주먹을 쥔 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덤이다.
“아… 떨어졌네요.”
“다행히 이겼네.”
“저도 이겼어요.”
승률이 33%밖에 안 되다 보니 탈락자가 우수수 속출할 수밖에 없다.
그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참 신기하다. 나 카라 루나 마지막으로…
“운이 좋군. 아주 좋아.”
카라스였으니까. 나는 흡족하게 웃고 있는 카라스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볼 때마다 얘도 카오스의 축복을 듬뿍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녀석이다.
하물며 원래라면 아카데미에 오지 않을 인물이다. 나와 비견될 만큼 변수 덩어리라 할 만하다.
아무튼 대충 4명 정도 후보생이 나왔다. 아마 이걸로 끝내지 않을까 싶다.
“이런 말이 있지. 가위바위보는 원래 삼세판이라고.”
“…”
저기요.
*****
말보로가 어떻게든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카오스의 인도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오히려 세 판 전부 승리해서 당당하게 1위로 통과했다. 1위로 통과했을 때 말보로의 해탈한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런 짓을 했다가 욕을 먹는다는 것 정도는 말보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대며 강행했다.
그만큼 내가 조교가 되는 건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다는 뜻이다. 대놓고 안 된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시바르가 조교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네?”
“그렇죠. 동급생 중에 시바르 씨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수업이 끝나고 자유가 보장되는 점심 시간. 나는 늘 그렇듯이 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러 나왔다.
그레이스는 후보조차 되지 못해 상심한 기색인 반면 카라는 아주 그냥 해맑은 얼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카라도 동급생 중에서 상위권의 실력을 가진 학생이었으니까. 조교가 되는 건 당연하다.
“시바르.”
“응.”
“앞으로 우리끼리 오붓하게 지내자. 루나 너도 알겠지?”
“네.”
“크윽…!”
카라의 티배깅에 그레이스가 이를 악 깨물었다. 조교가 된다면 붙어다니는 일이 훨씬 많아질 터.
비록 많이 바빠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없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 바빠봤자 큰 타격도 없었으니.
무엇보다 조교직을 수행하더라도 스토리 진행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을 것이다. 조교는 어디까지나 ‘숨겨진 이야기’에 가깝다.
해도 상관없고 안 해도 상관없지만 한다면 적지 않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소울 월드에서는 그나마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일단 내가 아는 미래가 상당히 비틀린 상황이다.
동방은 반란이 일어나지 않아 수많은 귀족들이 피신 차에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더 나아가 망나니 남매까지 들어왔다.
원래 아카데미는 귀족과 평민의 비율이 적당한 편이었으나 이번 신입생들은 유달리 귀족들의 비율이 높다고.
때문에 교수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들었다. 자존심만 더럽게 센 귀족들이 있으면 골치 아프니까.
“…음?”
적당히 점심 식사를 해결하고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내 눈에 무언가가 밟혔다.
아카데미의 옷가게였는데 그 옷가게 밖으로 내놓은 ‘모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홀린 듯이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바르?”
“어디 가는 거야?”
내가 옷가게로 향하자 다들 의문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옷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기껏 새로운 옷을 산다고 해봤자 평범한 바지에 셔츠가 끝이다. 싸우는 일이 많아 옷이 금방 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 관심을 끄는 건 다름아닌 모자다. 나는 옷가게 밖에 내놓은 모자를 집었다.
“모자? 갑자기 웬 모자?”
“그것도 빨간색이네요.”
내가 집은 모자는 바로 빨간색 모자다. 그것도 빵모자가 아니라 각이 잡힌 모자.
빵모자였다면 조금 우스웠겠지만 각이 잡히다 보니 약간의 위엄이 돋보였다. 그리고 내가 딱 원하는 거다.
“나 이거 살래?”
“정말로?”
“이 촌스러운 걸 사겠다고요?”
“응.”
조교로 활동할 때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모자였으니 제 값을 치르고 구매했다. 이걸 쓰고 조교직을 수행할 때가 기대됐다.
“시바르는 빨간색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응.”
“혹시나 하는 말인데 피도 빨간색이라 좋다고 하면 안 돼.”
“…”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루나를 쳐다봤다. 누구를 무슨 학살범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루나의 표정은 나름 진지했다. 입방정은 그대로여도 걱정을 담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이에 약간 떨떠름해져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피를 보는 건 선호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한다면.’
그런 때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리고 그날 저녁.
“갑자기 웬 술이야? 마누라가 뭐라고 안 해?”
“마누라보다는 네가 걱정되서 그런다.”
“이 자식이 징그럽게 왜 그래? 뭔 일 있어?”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러면서도 앞의 남자가 따라주는 술은 잠자코 받았다.
앞의 남자의 정체는 말보로. 그리고 말보로와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신입생을 담당하게 될 교수다.
말보로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 교수를 쳐다봤다. 그는 1년 동안 휴직했기에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다.
학생들을 4학년까지 모두 수료시킨 교수는 1년 동안 휴직을 하는 편이다. 이게 원칙이다.
하지만 그 원칙을 수행하는 사이에 아카데미에 온갖 사건사고가 발생한 참이다.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냥… 앞으로 고생하겠구나 싶어서.”
“내가? 동방에 귀족들이 많이 왔다 해도…”
“아니.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말보로의 친구가 되물었다. 귀족들의 콧대보다 위험하고 짜증나는 일이 있는 건가.
그 의문에 말보로는 한숨을 쉬더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시말서 쓸 준비부터 하라고.”
“시말서?”
“응. 내가 해줄 말은 이거밖에 없다.”
뒤이어 말보로가 술을 입에 넣어넣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으…”
오늘따라 술이 참 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바르: 걸어다니는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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