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6
67혁명으로 서구와 동구가 불타고 있는 지금 3세계라고 무사하진 못했다.
인도와 태국을 비롯한 3세계 국가들에서도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가 심심찮게 벌어졌다.
“시위? 이놈들이 돌았나. 여긴 1세계가 아니야. 3세계라고.”
3세계 국가들은 한국식 민주주의의 본고장에서 배워온 다양한 시위 진압 수법을 꺼내들었다.
“시위 진압의 기본은 갈라치기지. 서로를 못 믿게 만들면 그만 아니냐.”
3세계 국가들은 대학생들 사이에 프락치를 심었다.
그리고 시위대 사이사이에도 사복 경찰을 배치 시위대가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하게 했다.
그럼 그걸로 끝이냐?
당연히 아니었다.
대한이 개발한 시위 대응 전략은 단순히 상대를 갈라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시위대가 폭력을 일삼는다고? 몹쓸 종자들이네.”
3세계 정부들은 시위에 폭력 프레임을 씌우고 언론으로 두들겨 패는 세련된 전술까지 구사했다.
“시위대가 아니라 폭도야 폭도.”
이들 정권이 꺼내든 한국식 시위 대응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다.
시위대의 규모 자체는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존재가 정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3세계 국가들은 한국이 제공한 시위 대응 전략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모두가 평양의 지원 덕분입니다.”
“우리가 지원했다는 사실은 기밀에 붙여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은밀한 지원 덕분에 3세계 국가들의 불길은 어렵잖게 잡혔다.
나는 이걸로 우리 진영의 문제가 수습됐다고 생각했지만 일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뭐? 중화민국에서 대규모 시위대가 발생했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중화민국은 3세계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의 경제적 식민지나 다름없는 곳.
이곳에서 터진 문제는 한국의 이익과 직결돼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장제스가 아니라 민중의 지지를 받는 신정권이 들어서면 중화민국이 재통일될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중화민국의 정권 전복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 충칭으로 정보원을 증파할 것을 지시했다.
오래지 않아 안기부와 정보사에서 보고서를 올렸다.
“각하. 중국의 시위가 아주 심각한 수준입니다. 충칭에서 일어난 시위대의 규모가 백만이랍니다.”
수도 한복판에서 백만?
그건 민중이 정권에 등을 돌렸을 때나 나오는 수치 아닌가.
‘생각해보니 장제스가 중국인들이 등 돌릴 일을 많이 하긴 했군.’
초인플레와 화폐 개혁만 생각해도 중국인들이 장제스를 증오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간 장제스 정권이 유지된 건 중국 민중의 불만이 폭발할 계기가 부족해서였다.
67혁명은 그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오늘 중으로 중화민국 대사를 만나봐야겠네.”
“접견 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중화민국 대사 웨이다오밍을 공관으로 불러들인 다음 곧장 본론을 꺼냈다.
“대사 우리 정부는 이웃인 중국의 정정 불안을 걱정하고 있소.”
“근래 일어난 시위 문제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우리 쪽에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이야기요?”
“각하. 저희 내정 문제와 관련해 평양이 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틀린 말씀이오. 그쪽에서 정정불안이 생길 때마다 난민이 생기는데 우리가 어떻게 신경을 끄고 살겠소.”
중국 대사도 이 말을 반박하진 못했다.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사태 수습을 위해 평양의 지원을 받는 게 어떻겠소?”
사태가 조기에 수습되길 원하는 건 한국이나 중국이나 이해가 같지 않느냐.
나는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하지만 중국 대사는 내 제안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각하. 우리 중화민국이 평양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국가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건 함정 하나 없는 선의 어린 제안이라니까?
“그래도 장 위원장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 이야기나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장제스에게 미끼를 던진 채 상황을 지켜보려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플레이어가 우리 반대편에 등판했다.
“미국 대사가 시위대 주변에 나타났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미국 대사가 할 일도 없이 시위대 주변을 어슬렁거릴 리가 없다.
나는 미국이 이번 사태에 개입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안기부도 내 생각과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표면상으로 시위를 지켜보러 왔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론 시위를 지지하겠단 의사 표현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직접 개입한다.
67혁명으로 자기 앞가림도 힘든 처지에 아시아로 손을 뻗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
‘아니 워싱턴으로선 당연한 짓거린가.’
린든 존슨 정부는 늘 언제나 우리를 견제할 각을 봐왔다.
‘그런 계산을 한 것치곤 시위대에 손을 내밀었다는 게 뜻밖이군.’
그간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지만 의외로 미국은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워싱턴의 기본 스탠스는 늘 승자와 손을 잡는 쪽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포지션을 택한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국이 포지션을 바꾼 데는 내 영향이 없지 않을 것 같았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압도적 강자인 군부를 여론전으로 발라버렸지.’
미국도 같은 방식으로 승리할 각을 보고 있다면?
성공만 한다면 장제스가 아니라 시위대의 손을 잡는 쪽이 훨씬 유리했다.
군벌을 통제 못 하는 반신불수의 중앙 정부가 아니라 중화 전체의 통일을 꿈꿀 수 있는 정부를 등장시킬 수 있으니까.
‘그런 그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
미국의 수상쩍은 행동은 내 결심을 굳혀주었다.
“충칭의 거부 따윈 상관없네. 시위 대응 전략을 시작하게.”
나는 여론전을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
먼저 우리 영향력 아래 있는 언론사를 동원 시위대에 폭력 과격 프레임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면 시위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디서 선동질이야!”
시위대가 언론사를 때려 부수면 그 장면을 반복해서 중국 각지로 송출했다.
나는 여기서 시위대에 똥물을 끼얹었다고 생각했다.
한데 효과가 기대를 크게 밑돌았다.
“더러운 장가의 개들. 너희가 선동한다고 넘어갈 줄 알아?”
장제스의 인기가 상상 이상으로 바닥이었는지 선동으로 재미를 보긴커녕 역효과만 불렀다.
중국인들은 장제스의 ‘추잡한 여론전’에 더더욱 혐오감을 드러냈다.
‘허어.’
그간 승승장구해온 안기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상한 소문까지 퍼졌다.
“한국이 장제스를 돕기 위해 개입하고 있다더라.”
우리는 꼬리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런 말이 돌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떤 놈의 짓거리인지 조사하시오.”
미국 대사관을 중심으로 도감청을 돌린 결과 유력한 용의자가 밝혀졌다.
“아무래도 CIA가 배후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꼬리를 숨긴 채 뒤에서 여론전으로 판을 조종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이었다.
‘이놈들도 많이 배웠군.’
랭글리는 그간 우리에게 당하며 배운 기술들을 그대로 써먹고 있었다.
이 그림대로 흘러간다면 미국이 이길 가능성이 상당했다.
내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중화민국 대사 웨이다오밍이 공관을 방문했다.
“각하. 일전의 제안이 유효한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중국 대사는 내 제안을 걷어찼던 이전과 달리 무척이나 낮은 자세로 지원을 갈구했다.
“물론 유효하오.”
충칭이 태도를 바꾼 이유는 짐작이 갔다.
미국이 시위대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지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웨이다오밍은 조심스럽게 우리의 지원 옵션에 대해 물었다.
“한국에서 시위 진압과 관련해 어떤 지원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공작에 필요한 돈을 지원해주겠소.”
그 돈으로 시위대 지도부를 매수해라.
시위대 지도부의 도덕성만 땅에 떨어트리면 시위의 동력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
내 제안에 웨이다오밍이 허리를 굽혔다.
“그런 지원이라면 위원장 각하께서도 부담 없이 받아들이실 겁니다.”
그렇겠지.
눈에 띄는 지원이라면 받지 않을 사람이 장제스니까.
나는 장제스에게 공작금을 지원해주게 했지만 사실 충칭이 이길지에 대해선 확신이 부족했다.
‘우리가 준 돈을 제대로 집행할지도 의문이고.’
그럼에도 대안이 없었다.
여론전에서 얻어맞고 시작한 상황에서 믿을 건 시위대에 대한 분열 공작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제일 잘 할 수 있는 건 중국 정부였다.
우리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장제스가 잘 대응하기만을 기대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대응은 예리하지 못했다.
시위대 지도부를 흠집내긴 했지만 결정적인 그림까지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 시위대의 규모는 끔찍할 정도로 불어났다.
“시위대가 200만을 넘었답니다.”
중국 인구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숫자지만 충칭이란 도시 하나에서 일어난 규모라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했다.
동맹 휴업 파업을 선언하는 학교와 직장도 점점 늘고 있었다.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시위대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충칭에서 250만 중국 전역에서 1500만 이상이 들고 일어났답니다.”
겨우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변화였다.
시위대의 폭발적인 증가세 앞에 중국 군경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글렀군.’
나는 장제스의 패배를 직감했다.
시위 규모가 더 커지면 군과 관료도 동요하기 시작할 것이다.
리쭝런이 그랬듯 장제스 정권의 붕괴는 이제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안전장치를 갖출 필요를 느꼈다.
“화북 군벌들의 최측근들 약점도 철저하게 캐.”
중화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군벌들이 거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군벌 세력이 중앙에 투항할 수 없게 올가미를 단단히 죈다.
경제적으로 원화와 차관으로 정치적으로는 핵심 인사들에 대한 정보로.
“각하. 이참에 양광 군벌들도 손을 쓰시는 건 어떠십니까?”
중화민국 남쪽의 알토란 같은 영토 광서와 광동도 손을 댈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 본토에서 먼 곳에 있는 2순위 세력이었다.
지금은 화북에 대한 통제가 먼저였다.
“거기 자원을 분산할 여력이 어디 있나. 화북부터 철저하게 다지는 게 먼저야.”
“예.”
기왕 해야 한다면 철저하게.
그게 내 마인드였다.
“정보사와 안기부 역량도 중국으로 돌리도록 하게.”
나는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중국에 시선을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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