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0
유나이티드 아카데미는 전에 말했다시피 포인트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실습 또는 시험 그리고 태도를 통해 점수를 얻을 수 있으며 각종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포인트를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각종 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명예’와도 큰 연관이 있다.
보상 또한 넉넉한 편이나 나에게는 그닥 큰 이점이 없어서 신경도 안 썼다.
굳이 있다면 물질적인 것인데 이미 주식으로 큰돈을 번 상태다.
무엇보다 포인트 제도인 만큼 벌점도 있어서 그다지 높은 점수는 못 받았다.
만약 내가 점수를 높게 받을 거였으면 자중하고 다녔겠지. 이미 수많은 물건을 박살 낸 전적이 있다.
‘이번 학기 1등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네.’
카라는 포인트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데다가 희대의 트롤러 때문에 기말 고사를 말아먹었다.
그나마 성적을 잘 받은 루나 또는 그레이스가 1등에 가까웠을 테지. 포인트가 많으면 여러 편의를 얻을 수 있다.
“여기 두 분께서 받은 벌점 목록이에요. 한번 살펴보세요.”
“이런 걸 받을 수 있는 건가요? 그것도 타인인데?”
“시바르 씨는 제 호위가 될 분이라 하더니 되더라고요. 루나 씨는 뭐… 제가 힘 좀 썼죠.”
그레이스가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두며 말했다. 아무래도 뒷배경을 이용했을 것이다.
나는 그레이스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건네준 종이를 확인했다. 벌점 목록이라 했으니 조금 궁금하다.
[기물파손 -5]
[기물파손 -5]
[기물파손 -5]
[기물파손 -5]
[기물파손 -5]
[위험 행동 -10]
[교수 폭행 -10]
캬. 정말이지 아름답고도 훌륭한 벌점 목록이다.
대부분 기물파손이었으며 위험 행동과 교수 폭행은 뭔지 대충 알 것 같다.
위험 행동은 중간고사 당시 자폭 테러를 의미하는 거고 교수 폭행은 델포이겠지.
교수 폭행은 본디 30점이 깎여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줄인 모양이다.
[규칙 위반: 기숙사 -20]
가장 마지막에는 저런 글이 쓰여 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숙사와 관련된 규칙 위반. 사실 이건 애매한 구석이 많아 어지간하면 벌점을 부과하지 않는 걸로 안다.
더군다나 나는 리제와 동거한 전적이 있다. 무려 아카데미 측에서도 이건 괜찮다며 넘어갔을 정도다.
그런데 규칙 위반이라니. 이게 당최 무슨 말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응? 규칙 위반? 기숙사랑 관련된 거? 심지어 벌점 20점? 이게 뭐예요?”
루나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벌점 목록에도 작성된 듯했다.
무려 벌점 20인 데다가 루나는 평소에 벌점을 받을 일도 없다. 그래서 더욱 어이가 없을 것이다.
“아까 제가 질문했죠. 시바르 씨와 같은 기숙사에서 잔 적이 있냐고.”
“네. 그런데 성녀님에게 훈련을 받을 때는 괜찮았는데요?”
“그 뒤가 문제죠. 성녀님이 떠나고 난 후 그것도 신입생 연회 직후에 누군가 신고한 거라서. 기숙사 관련 규칙이 얼마나 빡빡하신지 두 분 모두 알고 계시죠?”
잘 알다마다. 유나이티드 아카데미 기숙사 규칙은 매우 엄격하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우선 타인의 기숙사에 방문하는 것조차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하며 이성의 경우에는 몇 배나 더 복잡해진다.
만약 누구를 부르고 싶다면 경비원에게 따로 부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출입 자체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왜 이런 깐깐한 규칙이 부과됐냐면 간단하다. 느슨하게 풀어줬다가 각종 사건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이런 규칙이 없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워낙 괴악한 사건들이 터지다 보니 엄격해진 거죠.”
“괴악한 사건이요?”
“성매매 및 성폭행은 기본이고 어떤 사람은 사설 도박장을 자기 기숙사에다가 설치했더라고요. 심지어 동성도 방심할 수 없는 게 그렇고 그런 일까지 터진 적이 있어요.”
“오…”
루나는 그냥 감탄만 했다. 솔직히 감탄만 나올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다.
한창 불타오를 나이에다가 신분 및 각종 사회적 지위가 발동되면 온갖 게 터지기 마련.
당장 멀리 가지 않아도 델포이를 보자. 그놈은 한술 더 떠서 그레이스를 능욕하려 들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의문이 들겠다만 원래 사람은 다 짐승이다. 이성으로 억눌러서 사람이라 부르는 거지.
오히려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하기에 짐승보다 더한 짓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이건 종족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조금 불안했는데… 누군지 몰라도 이런 이유로 신고했더라고요. 루나 씨가 시바르 씨의 기숙사에서 자고 나왔다. 심지어 옷마저 시바르 씨의 것을 입고 있었다. 맞나요?”
“네.”
“후우.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저는 루나 씨가 시바르 씨랑 하룻밤을 지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하룻밤을 지낸 건 맞는데요?”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걸 들은 그레이스의 표정은 참 볼만했다.
저건 루나의 주둥이가 문제가 아니다. 그냥 은어에 대한 상식이 조금 부족할 뿐이다.
하룻밤은 그렇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겠지. 시골 출신에다가 그쪽에 관심이 없어서 생긴 상황이다.
지구에서는 문명의 발달 및 인터넷의 존재로 괜찮다지만 여기는 아니다. 정보의 교환이 없으면 그대로 끝이다.
그레이스도 이를 알고 있는 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었다. 뒤이어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제가 말한 하룻밤은 그런 게 아니에요.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눈 거라고 말씀드려야겠네요. 이건 뭔지 아시죠?”
“아… 그런 거였어요? 그럼 아니에요. 그냥 말 그대로 잠만 자고 갔거든요.”
“그럼 왜 거기서 주무셨는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엄…”
루나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때의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술에 잔뜩 취한 나머지 무지갯빛 황천을 토해냈던 일. 그걸 그대로 말하려니 조금 껄끄럽겠지.
“토했어.”
“네?”
그래서 내가 대신 말했다. 저 주둥이가 혼돈을 뱉기 전에 미리 차단해야지.
“시 시바르?!”
“아주 시원하게.”
“아으…”
덤덤하기 짝이 없는 내 고백에 루나가 크게 당황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에 루나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떨구었을 때였다. 그레이스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며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신입생 연회 이후 있었던 일을 그대로 설명했다. 그러자 그레이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라.
진짜로 하룻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안도. 루나의 무지갯빛 황천에 대한 웃음. 마지막으로 벌점에 대한 분노까지.
“그러면 전후 사정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신고한 사람이 문제라는 거네요. 아무리 기숙사 규칙이 빡빡하다지만 이런 것까지 벌점을 부과하지 않을 텐데.”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
“어떡하긴요. 색출해야죠. 뚜렷한 증거도 없이 벌점이 부과된 걸 보면 있는 집 자식인 건 확실해요.”
하기야 루나는 몰래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설령 들켜도 잡히지만 않았다면 벌점이 부과될 일은 없다.
덕분에 범위가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우선 우리를 잘 아는 사람에다가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특히 같은 반일 확률이 제일 높은 게 이곳은 반 내의 학생들끼리 경쟁하지 다른 반은 신경도 안 쓴다.
“혹시 두 분 학우들에게 원한을 살 일이 있으셨나요?”
“저는 딱히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음…”
원한을 살 만한 일이라… 그것보다는 워낙 기행을 저질러서 잘 모르겠다.
일단 반 학우들은 나를 배제하는 느낌이 강하다. 저놈은 힘만 미친 듯이 강한 고릴라니 넘어가자는 식.
어차피 성적에 별 관심도 없고 사회에 적응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나를 ‘경쟁자’라 보기보다는 기말고사에서 그랬듯이 ‘전략병기’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아.”
“많다고요?”
“시험 다 망쳤어.”
“아.”
그래서 다들 날 싫어할 거다. 웬 고릴라 한 마리가 미쳐 날뛰면서 시험을 다 망쳤다.
중간고사에서는 고문 자폭 테러 메테오 등등. 꿈에서 나올 법한 기행들을 저지르고 다녔다.
대망의 기말고사에서는 아예 혼자서 성 하나를 전복시켰다. 물론 이건 그때 퍼질러 잔 놈들이 문제다.
많아도 너무 많다 보니 딱히 고르기가 애매하달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도 이상하지 않다.
‘카라랑 어울리는 걸 보고 야만인이랑 야생인이 붙어 다닌다고 했나?’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소리도 들은 것 같다. 물론 신경도 안 쓰고 있다.
어차피 그런 놈들이 씨부려봤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
파리가 귀 근처에 날아다니면서 앵앵거리는 느낌이다.
“일단 알겠어요. 나중에 저랑 같이 행정실로 가면 되겠네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전후 사정 잘 설명하시면 될 거예요.”
“누가 신고했는지 알 수 있나요?”
“그건 힘들어요. 보복이 가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거든요.”
결국 직접 조사해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선 벌점부터 없애는 게 먼저다.
이후로 그레이스와 대화를 좀 더 나누다가 다 함께 행정실로 향했다. 행정실은 진짜 오랜만에 방문하는 것 같다.
맨 처음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 당직으로 말보로가 서 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음? 이번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왔네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말보로가 아니라 고딘이 당직을 서 있더라.
늘 그렇듯이 실눈의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고딘. 요즘 제인 덕분에 연구에 진척이 있다고 들었다.
제인도 고딘으로부터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으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고딘 교수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사정에 대해 설명하려고 왔어요.”
“네. 어디 한번 들어보도록 하죠. 단 저는 어디까지나 전달하는 입장이지 최종권한은 위원회에 있다는 점. 명심해 주세요.”
“알겠어요.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레이스는 나와 루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설명했다. 혹여 꼬투리 잡힐 일을 방지하기 위해 세세하게 설명하더라.
나는 담담하게 듣고 있었으나 루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부끄러워서 차마 얼굴을 마주치기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고딘은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윽고 설명이 모두 끝나자 고딘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위원회에 연락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결과는 언제 나오나요?”
“위원회에서 결과를 내겠지만… 아마 괜찮을 겁니다. 특히 그레이스 학생은 참작의 여지가 있으니 원하시는 대로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확실히 그레이스에게는 강력한 명분이 있다. 또한 무시 못 할 뒷배경까지.
다행히 벌점 자체는 어찌저찌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계약이다.
“그럼 계약하기에 앞서 루나 씨?”
행정실 밖으로 나온 그레이스가 전보다 확연히 밝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흑역사를 다 방출하게 된 루나는 얼굴의 열을 식히다가 조용히 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오늘 하루만 시바르 씨를 데리고 가도 될까요?”
“그건 왜 저에게… 시바르한테 물어봐야죠.”
“아. 그렇죠. 시바르 씨.”
그리고 그레이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불렀다. 나 또한 그녀와 마주했다.
매섭게 느껴지는 보라색 눈동자. 하지만 그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는 것 같다.
나는 그레이스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가 무슨 부탁을 하든 간에 어지간하면 들어줄 생각이다.
“오늘 하루만 저랑 같이 잘 수 있나요?”
“…?”
얘도 입에 혼돈이 달렸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카오스: 그린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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