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5
편입생 그것도 카라스의 참여로 한동안 혼란스럽긴 했으나 어찌저찌 넘어갔다.
단예린과 카라스를 매일매일 보는 것도 아니고 각자 할 일이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개학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시기였다.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이렇게까지 질질 끌고 갈 건 아니잖아요…”
그레이스가 테이블에 엎어진 채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머리 위에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내려오는 것 같다. 온 몸으로 저기압을 표현하고 있다.
“어… 힘내라?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거야? 계약서까지 썼잖아.”
맞은편에 앉아있는 카라가 위로와 함께 의문을 드러냈다.
현재 그레이스와의 계약은 성사되었다. 카라와 엘리가 중간에 훼방을 놓긴 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이후로 전부 동의하더라.
그레이스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내는 건 덤이다. 아마 트라우마와 관련된 부분이겠지.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막혔는데 다름아닌 위원회 측이다.
“아무리 호위라 해도 이성 간의 동거는 절대적으로 금지래요. 나중에 편법으로 쓸 여지가 많다나 뭐래나.”
“그래서 지금 규정을 만들고 있다 이거지?”
“네. 심지어 총장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힘들었을 거예요.”
위원회 측에서 악용될 여지가 있다며 거부한 것이다. 덕분에 상황이 조금 꼬였다.
위원회가 꼰대 같은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레이스의 뒷배경을 알고도 소신 있게 나선 거다.
심지어 로드의 입김이 작용하고 나서 규정을 만들었다. 이것만 보면 도리어 이쪽이 미안할 지경이다.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게 어디야. 앞으로 잘 해 봐. 아 총장님 말씀은 꼭 지키고.”
“그런 사고는 절대 안 쳐요. 저도 과욕인 건 알아요.”
물론 로드라 해서 무조건적으로 이쪽 편을 든 건 아니다. 그도 최대한 중립을 지켰다.
동거의 조건으로 나에게 제한 아닌 제한을 덕지덕지 붙였다.
가장 먼저 그레이스의 신변이다. 아무래도 이성 간의 동거다 보니 위험한 부분이 많다.
만약 그런 사건이 터지게 된다면 나는 물론이요 로드마저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로드가 직접 책임을 지는 조건으로 동거를 허락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위원회도 받아들일 수밖에.
“확실히 총장님께서 시바르를 많이 아끼네. 자기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걸 보면.”
“그래서 조만간 좋은 약초라도 드릴 생각이에요.”
이래서 권위가 좋다. 하지만 너무 남용하는 순간 로드에게 피해가 갈 거다.
어차피 사고를 칠 생각은 없으나 로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중간에 누군가 욕을 해도 상관없다. 그냥 내 주변 사람에게 이상한 소문만 붙지 않으면 괜찮다.
‘이미 소문이 퍼진 것 같다만.’
나와 루나에게 그런 벌점이 부과된 걸 보았을 때 소문은 이미 퍼졌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개학하고 나서 우리에게 시선이 가해지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 그레이스와의 동거까지 퍼지게 된다면 아주 볼만할 것이다.
‘일단 벌점을 부과시킨 놈부터 찾아야지.’
그 사람을 찾아 얘기부터 할 거다. 전에 말했다시피 우리 반일 확률이 높다.
다른 반 학생들은 관심도 없을뿐더러 얼굴조차 모를 테니까.
만일 건실한 학생이라면 어휴. 알았다하고 넘어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변명은 들어봐야지.’
슬슬 개학이 다가오니 할 일도 많아진 것 같다.
단예린과 카라스도 그렇지만 아직 무색의 마법진이 남아있다.
딱 하나 남아있으며 위치 또한 쉽다. 내가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는 주식거래소.
하지만 유동 인구가 워낙 많은 탓에 ‘실수’랍시고 사고를 치기도 어렵다.
설령 사고를 쳐도 당분간 출입 금지를 당할 수도 있다.
‘게임에서는 그냥 대놓고 부숴도 됐었는데.’
잠깐 위원회에게 끌려가긴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는 식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혀있는 상황인데 지금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명예 수치로 따지자면 명성과 악명이 골고루 분포돼 있는 상태니까. 자중할 필요가 있다.
‘잘못하면 학기 중 반을 근신으로 채울 수도 있고.’
지금까지 로드가 잘 커버해 줬으나 간당간당할 것이다.
그레이스와의 동거도 사실상 억지였으니까. 위원회 입장에서 좋은 시선을 보내는 건 무리다.
“전 이만 가볼게요. 내일이 개학일이니 준비할 게 많거든요.”
“나도 슬슬 가야겠다. 시바르 너는?”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그레이스와 카라가 떠나려는 듯했다.
나는 루나와 얘기할 게 있어서 잠깐 남을 계획이다.
“나중에. 루나랑 같이.”
“루나랑 같이 간다고? 알았어.”
“그럼 내일… 보기 전에!”
그레이스는 나에게 인사하려다가 말고 두 팔을 활짝 펼쳤다.
표정 또한 특유의 당당한 표정이었는데 지금 보면 다소 뻔뻔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 안아달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가기 전에 아시죠? 안아주세요.”
“에휴.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제가 멀쩡해질 때까지요.”
놀라운 건 카라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그레이스의 이런 행동을 눈 감아 주는 편이다.
“그럼 내가 먼저 안고 나서 안으면 안 될까? 은근 부러워서.”
“안 돼요. 그럼 카라 씨 냄새가 나요.”
“…내 냄새가 어때서.”
“전 오직 시바르 씨만 원하거든요. 자. 시바르 씨?”
나는 안아줘요를 시전하는 그레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뻔뻔한 미소를 보니까 뭐랄까.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은근 귀엽다.
그래서 가볍게 안아줬다. 그레이스는 내가 안아주자마자 떨어지기 싫다는 듯 강하게 껴안았다.
덕분에 말랑말랑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으응…”
그레이스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거나 비비는 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를 안는 것 같다. 외로움이 묻어나오는 포옹이랄까.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속내는 여리디 여린 그레이스였으니 말없이 호응해줬다.
“후우. 좋아요. 이런 식으로 꾸준히 충전하다 보면 나아지겠죠.”
“시바르가 무슨 약초도 아니고.”
“인간 약초는 맞죠.”
도대체 어딜 보고 약초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좋으면 좋은 거니 넘어갔다.
카라도 그레이스의 대답에 피식 웃더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또한 그녀와 마주했다.
“나도 안아줄래?”
“응.”
카라의 부탁에 아까 그랬던 것처럼 안아줬다. 카라는 키가 커서 그런지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더라.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포옹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돌발행동은 포옹을 풀기 직전에 나왔다.
쪽-
“…어?”
카라가 물러나면서 자연스레 입술을 훔치더라. 내 목을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진한 키스가 아니고 친밀감의 표시에 가까운 뽀뽀. 조금 당황스러워 카라의 표정을 살펴봤다.
아주 요망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그레이스가 뒤에 있음에도 일부러 행한 게 맞다.
게다가 특유의 구릿빛 피부까지 합쳐져서 더 고혹적인 분위기를 띄었다.
“다 다 당신! 대 대체 뭐 하는…!”
“난 이만 가볼게. 내일 보자~”
그레이스가 뒤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카라는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그레이스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행동에 입만 뻐끔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나와 카라를 번갈아 보더니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이 적태양 씨!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뭐가? 우리가 배려했으면 받는 게 있어야지.”
“그 그건 그렇지만!”
지금 보니 카라와 그레이스도 어느 순간 친해졌구나.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다행히 지금 여기에 엘리는 없다. 다음 날이 개학이라고 한창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만약 엘리도 이 광경을 봤다면 음… 남자인 내 입장에서는 엄청 좋은 일이 터졌지 않았을까.
나는 방금 전 카라가 뽀뽀한 입술을 더듬거리다가 자리에 도로 앉았다.
아직 루나의 훈련이 끝나지 않았으니 잠자코 기다릴 예정이다.
“으어어…”
“고생했네. 대련을 할 때마다 실력이 일취월장하는군.”
“감사합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반주검 상태의 루나가 들어왔다. 흐뭇한 표정의 로드는 덤이다.
“근육 회복에 좋은 약초를 갖고 올 테니 조금 기다려주게나. 마침 약초가 떨어져서 나가야 하거든.”
“아. 그건 제가 직접…”
“자네는 못 구할 걸세. 내 인맥에게 부탁하는 거라서.”
로드는 약초를 구하러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레 나와 루나만 방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
루나는 탈진하기 직전이었는지 테이블에 앉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흰색 셔츠가 땀에 젖은 탓에 속옷까지 훤히 비치더라.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루나.”
“…왜?”
“다 보여.”
“…실컷 봐. 가릴 힘도 없어.”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루나. 언뜻 들으면 시원시원한 대답이다.
“어차피 나보다 큰 것도 보면서 뭘.”
“…”
다음에 이어진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자학에 가까운 말이라 무어라 답하기도 애매했다.
아무튼 루나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 얌전히 빵이나 먹기로 정했다.
방학 동안 자주 방문하다 보니 로드가 준비했더라. 그것도 엄청난 양으로 말이다.
“…아. 맞다. 시바르.”
“움?”
입 안 가득히 빵을 밀어 넣고 있을 때였다. 지칠 대로 지쳤던 루나가 나를 불렀다.
이에 그녀를 바라보니 루나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피로한 안색까지 합쳐져서 괴상한 표정이다.
“나 이번에 체력이 5이나 올랐어.”
“오. 정말?”
“응. 마지막이라고 빡세게 해주셨나 봐.”
그런 것치고 5나 오른 건 매우 어려운데. 역시 희대의 재능러답다.
나는 뿌듯해 하는 루나에게 빵 하나를 건네줬다. 루나도 입이 심심했는지 말없이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그런데 시바르.”
“응.”
“나머지 마법진은 어디 있어?”
“주식거래소.”
이제 둘만 있을 때 이런 이야기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서로 비밀을 공유하다 보니 신뢰가 생겼다.
물론 나는 아직 비밀을 완전히 밝히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밝힐 일도 없을 거고.
루나는 내 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이어 질문했다.
“혹시 어떻게 생겼어?”
“주식판.”
“뭐?”
처치 곤란인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무려 주식판이 마법진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있음에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주식판이 마법진이라고? 그럼 조금 곤란하겠네.”
“응.”
“음… 이건 천천히 생각해야겠다. 어차피 나도 자주 방문하니까.”
“돈 얼마나 벌어?”
“…사실 물렸어.”
“저런.”
이제 물렸다는 표현도 쓰는구나. 요즘 루나는 주식에 재미들린 상황이다.
나에게 묻지 않고 신문을 꾸준히 읽더라. 이러다가 안토니오화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여의치 않으면 내가 도와주면 되겠지.’
나도 아직 돈은 많이 남아있다. 더구나 안정적으로 예금까지 한 상황이다.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중간중간 대박주는 노려야겠지.
‘아카데미 붕괴가 터지면 전반적으로 다 떡락하지만.’
딱 두 곳만 떡상할 거다. 비잔틴 관련 주와 군수물자 쪽.
악마가 등장했으니 비잔틴이 상승하는 건 기본이고 곳곳에 내란 및 전쟁이 터질 거다.
그동안 곪아있던 것이 한꺼번에 터지는 거라 세상은 한동안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 여기 있네. 마시고 푹 쉬면 근육이 회복될 걸세.”
“늘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앞으로 더 고생해야 할 텐데.”
“하하하…”
얼마 후 로드가 돌아오면서 차까지 마셨다. 솔직히 쓴맛이 감돌아서 마시기가 좀 그렇다.
하지만 로드가 무조건 마셔야 된다며 힘 조절을 위해서라도 마셔야 된다더라.
약초에 대해서는 로드가 더 잘 아는지라 순순히 마실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개학이로군.”
“그러게요.”
“시바르.”
“?”
빵과 약초차라는 기이한 조합을 맛보고 있을 때였다. 로드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에 그를 바라보니 로드가 인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의 걱정도 담겨있는 듯했다.
“부디 이번 학기는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고 있다네. 할 수 있겠나?”
“노력해볼게.”
“그래. 노력이라도 하는 게 어딘가.”
로드가 허허 웃으며 내 머리를 툭툭- 쳤다. 나도 최대한 자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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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개학날이 되자마자 사고를 시원하게 쳐버렸다.
문제는 사고가 단순히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
“우선 상황부터 들어보지.”
“…”
“어째서 같은 학우를 때린 건가? 무슨 이유로?”
교관도 아닌 학생을 대상으로 한 폭행으로 징계위원회에 끌려갔다.
모두가 가장 우려하던 초대형 사고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바르: 사고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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