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9
카라스에게 적당한 주식 종목을 알려준 후에는 수업이 진행됐다.
수업 자체는 오리엔테이션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1학기와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커다란 이벤트는 존재하는 법. 이번에는 무려 ‘반대항전’이 기다리고 있다.
반마다 대표들을 선출하여 대련을 하는 식이며 종목 또한 매우 다양하다.
“개인 대련은 물론이고 팀끼리 붙는 대련도 있지. 중간고사를 대련으로 대체할 예정이니 그리 알도록.”
“포인트는 어떻게 되죠?”
“간단하다. 승리하면 더 많은 점수를 그 반대면 떨어지겠지.”
본래 에리카도 저 대련을 통해 얼굴을 비춘다. 그 외에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괄목할 학생이라 해봤자 에리카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아카데미 붕괴 때 드러날 것이다. 일종의 대참사다.
‘2학기는 약간 쉬어가는 식이니까.’
전반적으로 1학기와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수요일은 자율 훈련이며 육성자에게 훈련을 받는다.
중간중간 실습이 포함돼 있으나 크게 관심을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다 씹어먹을 가능성이 높다. 뭘 하든 간에 압도적인 피지컬로 뚫어버리겠지.
교수들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닐 터. 어쩌면 지난 공성전처럼 재미있는 제약을 걸 수도 있다.
아무튼 수업이 모두 끝나면서 각자 할 일을 하러 떠났다. 그중에서 나도 할 일이 있었다.
“여기 계약서가 있습니다. 두 분께서 동거할 시 반드시 지켜야 할 조항이죠.”
“…”
그레이스와 함께 위원회를 방문하는 것. 그리고 그들과 계약을 맺는 일이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위원회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위원회장은 로드처럼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다.
다소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면서도 강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할머니 특유의 파마머리는 덤.
마지막으로 단안경까지 착용한 탓에 흡사 고루한 마녀 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이 할머니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소울 월드에서는 어지간해서 만날 일이 없다. 굳이 있다면 살인처럼 초대형 사건을 터뜨렸을 때다.
로드가 일종의 억제기 같은 역할이라면 이 할머니는 행정 부분에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행정에 관해서 로드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 당연하지만 투표로 뽑은 사람이다.
사실상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교장이다. 로드의 위치가 다소 독특한 거다.
‘밉보일 필요는 없겠지.’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지만 밉보일 필요는 없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계약서를 바라봤다. 일단 조항부터 확인할 예정이다.
[…하여 만약 서로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할 시 계약은 그 즉시 파기된다.]
[또한 경도에 따라 징계를 내릴 것이며 무조건적으로 1년간 정학 조치를 취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동시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위원회 측도 그레이스를 감시역으로 쓴다 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
이에 별생각 없이 도장이나 찍자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내 눈에 뭔가 밟혔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생겼을 시 신전을 방문하여 부부의 맹세를 강제적으로 맺도록 한다.]
“…?”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설마 나와 그레이스가 사고라도 칠까 봐 이런 조항을 걸어놓은 건가.
“저… 위원회장님?”
“네. 말씀하시지요.”
“이 마지막 조항이… 조금 이상한데요?”
때마침 내 옆에 앉아있던 그레이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녀가 계약서를 내밀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위원회장도 그쪽을 쳐다봤다.
뒤이어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늙수그레하면서도 딱딱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보는 그대로입니다. 언제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법이죠.”
“그런데 굳이 맹세까지 해야 하나요?”
“말만 해놓고 도망간 사람을 셀 수도 없이 목도했거든요. 신전에서 맹세를 맺으면 방지할 수 있겠죠.”
“…”
인류애가 바사삭 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물론이고 나 또한 순순히 계약서에 사인했다.
인간의 추악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아야지.
아. 물론 그전에 그레이스와 그렇고 그런 짓은 최대한 피할 예정이다.
앞날이 창창한 처녀의 앞길을 가로막을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할 일이 많다.
무엇보다 그레이스는 그런 쪽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공예품을 다루듯이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좋아요. 두 분 모두 사인하셨으니 이제 방부터 정해야겠군요.”
“아. 그건 제 방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어요.”
“안 됩니다.”
“네?”
단호한 위원회장의 대답에 그레이스가 당황했다. 이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스는 분명 자기 방으로 옮기면 된다 말했다. 혹시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건가 싶었다.
“기숙사는 엄연히 개인실이죠. 또한 남녀가 따로 주거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이성이 함께 살면 확률이 대폭 상승할 테죠.”
“그 확률이라는 게…”
“두 분께서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지라.”
무슨 말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오랫동안 아카데미에서 근무하면서 온갖 사건사고를 다 지켜봤을 터.
다소 깐깐하다고 느껴질 법하지만 위원회장으로서는 당연한 조치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느냐. 이것도 위원회장이 직접 설명해 줬다.
“두 분께서는 다른 기숙사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보통 가족이 있는 교수들이 지내는 곳이죠. 좀 더 넓을 뿐이지 불편한 건 없을 겁니다.”
“가 가족…!”
“…”
가족이라는 단어에 그레이스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애써 무시했고.
확실히 가족이 지내는 곳이라면 범죄 확률도 대폭 줄어들 것이다. 피가 끓는 청춘들 사이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낫지.
‘던이랑 만나려나?’
말보로의 가족도 거기서 지낼 것이다. 어쩌면 중간중간 만날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위원회장으로부터 각종 방침에 대해 들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다른 사람이 들어와도 된다는 것.
하지만 딱 출입만 딱 가능할 뿐 하룻밤을 머물거나 그 외의 짓을 하는 건 절대적으로 금지라고 말했다.
어차피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 소문은 금방 퍼질 거다. 조심하면 그만이다.
“짐은 다 정리하셨나요?”
“아뇨. 지금 가서 해야 해요. 애초에 짐도 별로 없고요.”
“알겠습니다. 위치부터 안내해 드리도록 하죠.”
위원회장은 사람을 시켜 우리를 안내했다. 위치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의 사이.
건물 형식도 맨션에 가까웠다. 다 무너져 가는 그런 맨션이 아니라 세련된 외양.
가족 단위가 지내는 곳이라 했으니 맨션이 딱 알맞긴 하다.
“음? 그대들.”
“응?”
맨션에 들어가려던 찰나 의외의 인물과 맞닥뜨렸다.
특유의 올림머리는 똑같았으나 교복이 아닌 동양풍 옷을 입고 있는 여인.
묘하게 색기가 든 얼굴 덕분에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예린 공주님? 여긴 어쩐 일이시죠?”
단예린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그레이스의 질문에 답했다.
“어쩐 일이긴. 나는 원래부터 여기서 살고 있었다네.”
“네?”
“호위가 있다면 이곳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라고 추천해 줬거든.”
보아하니 2인 이상부터는 무조건 여기서 지내야 하는 듯싶었다. 그러면 리제는 어떻게 한 거지.
설마 무작정 들이밀었던 건가. 리제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보아하니 자네들도 여기서 지내게 될 모양이군. 시바르가 호위라고?”
“네. 그게…”
“아. 사정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네.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군.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단예린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생각보다 그 사건이 멀리 퍼진 듯했다.
그레이스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못해 끔찍할 사건. 실제로 지금도 그 반응이 나타났다.
단예린이 사건을 언급하자마자 몸이 한껏 위축되더니 슬그머니 나에게 붙었으니까.
이런 걸 보면 정말 안쓰러워졌다.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속은 한없이 나약한 사람이 그레이스다.
“앞으로 자주 볼 기회가 생기겠군. 잘 부탁하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릴게요.”
“잘 부탁해.”
“후후.”
단예린은 우리의 인사를 듣고 부드럽게 웃더니 걸음을 옮겼다.
말보로의 아들 던뿐만 아니라 단예린도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차피 그녀와 인연을 맺는 게 좋았으니 나쁠 건 없다. 하물며 관련 이벤트도 있지 않나.
‘대련 이후에 발생하겠지?’
나는 단예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레이스와 함께 방으로 걸어갔다.
“음? 왜 또 찾아왔나?”
“…여기가 저희 방인데요? 설마?”
“여기가 내가 지내는 곳이다만.”
그런데 단예린이 바로 옆에서 지내더라. 우연도 이런 기막힌 우연이 없을 거다.
조금 황당하긴 해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어서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나중에 떡이라도 돌릴까?’
환 제국에 그런 문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인사라도 해야지.
이윽고 우리가 함께 지낼 방으로 들어섰을 때 나와 그레이스는 저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음. 이 정도면 마음에 드네요. 이곳이 신혼… 이 아니라 동거할 집이라면.”
“넓네.”
가족 단위로 생활하는 곳이라 그런지 상당히 넓었다. 방도 꽤 많았고 침실도 따로 있더라.
심지어 침실에 배치된 침대는 사이즈가 매우 넓었다. 성인 남자 3명이 누워도 약간 남을 정도다.
저걸 퀸사이즈 침대라 부르는 건가. 기숙사의 침대도 상당히 컸는데 여기는 더 크다.
“그럼 이제 짐부터 가져오도록 하죠. 이따가 봐요.”
“응.”
짐이라 해봤자 옷가지 몇 개와 음식밖에 없다. 겸사겸사 내 무기들까지.
짐 자체는 괜찮아도 무기까지 들고 오려니 조금 귀찮다. 우선 라그나로크부터 가져오는 게 나을 것 같다.
어떻게 가져오냐고? 당연히 불러야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활짝 열린 문 밖으로 손을 뻗는 건 잊지 않았다.
“뭐 하세요?”
“무기 부르는 중.”
“무기? 아. 그 도끼 말이죠?”
“응.”
선혈의 대검은 각인이 되지 않아 호출이 불가능하다.
조만간 카라에게 따로 부탁을 하든지 아니면 따로 찾아가든지 해야 할 터.
각인을 하는 대장장이는 아카데미에 없다. 세계적으로 귀중한 인력이라 찾기가 좀 빡세다.
‘근데 왜 이리 안 오는…’
와장창!!
호출한 지 시간이 됐는데도 잘 오지 않길래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내 앞이 아닌 뒤쪽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음이 들렸다.
이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라그나로크가 매서운 기세로 나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탁!
다행히 손으로 잡는 것까지는 쉬웠다. 문제는 완전히 박살 난 창문이다.
아무래도 위치를 잘못 파악한 모양이다. 맨션이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 사이에 끼어 있다 보니 생긴 참사다.
“…첫날부터 사고를 거하게 치셨네요.”
“…”
그레이스의 핀잔에 머쓱해져서 머리만 긁적거렸다. 설마 이걸로 쫓겨나지는 않겠지.
조항에는 없었으니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면 또 로드를 찾아가서 사정사정하면 되지 않을까.
“무슨 일인가? 방금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만.”
창문이 깨지는 소리에 놀란 건 우리뿐만 아니었다. 옆집에 있던 단예린과 여혜가 화들짝 놀라 찾아오더라.
그리고 그레이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그냥… 시바르 씨가 물건을 부쉈거든요. 늘 있는 일이에요.”
“…이게 늘 있는 일이라고?”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호위무사 여혜. 단예린도 비슷한 표정이다.
“그런데 시바르 씨.”
“응.”
“시바르 씨가 지내던 기숙사 창문은 열어놓으셨어요?”
아. 맞다.
“…아니?”
생각이 좀 짧았네.
“흠. 파괴왕은 타타르 민족이라 들었는데.”
팩트폭력은 아픕니다 단예린 공주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고를 부르는 남자 시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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