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7
원작의 아카데미 붕괴는 아수라장이라는 표현조차 불가능할 만큼 위험했다.
광란 사태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기 바빴고 여기에 몬스터까지 합세하니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여파가 커지고 커져서 전세계가 혼돈에 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 악마의 소행임이 밝혀져도 상관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하길 이미 절벽 끝에 매달린 상태에서 등만 떠밀었던 격이라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그 자체다.
그리고 이러한 짓을 저지르는 주범은 남색의 악마 광대다. 비상한 두뇌와 컨셉에 걸맞는 전투 방식을 보여주는 악마.
원작에서는 광대 하나만 오지만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또다른 남색의 악마도 난입한다. 그 악마가 바로 러스트다.
러스트를 쉽게 설명하자면 서큐버스 퀸이다. 능력 또한 말이 안 되는 수준인데 일단 성별이 남성이라면 디버프를 얻는다.
“어떠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귀가 아니라 정신을 깃털로 간지럽히는 느낌이군.”
러스트의 제안에 로드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러스트의 디버프 효과는 전체 기술 숙련도를 약 5%~10% 정도 하락시키는 것. 매우 사기적인 기술이다.
하지만 이것도 성장한 주인공에 한해서지 어지간한 남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완전히 빼앗길 것이다.
그나마 로드는 남색의 마력을 갖고 있기에 덜한 편이다. 물론 방심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럼 광대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러스트가 있다면 광대도 어딘가에 있어야 정상이다.
무엇보다 러스트 혼자 왔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정신 관련 부문에서는 최상위여도 개인 무력은 살짝 부족한 편이니.
그러므로 그녀를 보좌할만한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광대가 난입할 수도 있다.
‘리제가 정리를 다 할 때까지 버텨야 한다.’
나는 라그나로크를 굳게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선혈의 대검을 가져오고 싶다.
그러나 선혈의 대검은 라그나로크와 달리 각인이 되지 않은 상태. 멀리서 부를 수도 없다.
“아이야.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구나.”
“아니. 알아.”
“음?”
러스트가 나를 살살 꼬드길 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이 몸뚱이가 악마의 자손이라는 건 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도끼를 쥔 채 달려들었다. 도끼에 서서히 붉은 마력이 응집되었다.
-파직!
그와 함께 붉은 벼락까지. 남색의 악마이니 봐줄 필요는 하나도 없다.
러스트는 내가 코앞까지 달려와도 의아한 표정 그대로 유지했다.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도 안 가.”
“알고 있다니… 언제 알았니?”
“최근에.”
그리 말하며 도끼를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리쳤다. 이대로 가면 러스트의 몸은 반쪽이 되리라.
러스트는 내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답하자 당황한 건지 피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혹시나 해서 쉴드를 친 건가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다. 이에 그녀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기 직전.
-까앙!
누군가의 칼날이 내 도끼를 막았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은 접근이다.
악마가 원래 기척이 없는 존재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또 만났군.”
복면에 푸른색 눈동자. 흑색의 단검을 무기로 삼는 암살자.
사냥꾼이었다. 나는 사냥꾼이 내 공격을 막았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광대가 오지 않았다는 부분을 좋아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현재 상황이 사냥꾼이 날뛰기 좋다.
일단 해가 완전히 져서 사방이 어둠 천지다. 약간의 빛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수준.
“그 녀석은? 아 저 애 우리 말 알아듣는 것 같으니 조용히 말해.”
역시 눈치가 빠르다. 러스트의 물음에 사냥꾼이 작게 속삭였다.
입이라도 보여줬으면 대충 파악이라도 하겠는데 복면까지 쓰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
“시바르. 저 녀석이 전에 말한 악마인가?”
“네. 많이 위험해요.”
“흠. 골치아프군.”
로드는 사냥꾼에 대해 듣기만 했지 보는 건 처음이다. 암살자에 한해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자.
다행히 로드 정도 실력자라면 몸을 숨겨도 위치 정도는 대충 파악할 것이다. 사냥꾼이라도 발을 땅에 디뎌야 움직일 테니.
‘반면 나는 대처할 방법이 없어.’
지난번처럼 손에 상처를 내서 피를 뿌리는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건 이미 사용한 전법이다.
사냥꾼도 내가 자해를 하는 순간 눈치를 채고 멀리 떨어질 터. 게다가 그는 정면 승부를 피할 것이다.
‘감을 믿는 수밖에.’
이럴 때 쓰라고 야생의 본능이 있는 거겠지. 나는 도끼를 강하게 쥐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로드가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작게 속삭였다.
“내가 곁에서 보조할 테니 마음껏 날뛰게. 저 사냥꾼이라는 놈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도와주지. 굳이 우리가 직접 처치할 필요는 없네.”
로드가 전략적인 계획을 꺼냈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가 저 악마들을 직접 처치할 필요가 없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 악마 전략병기가 있지 않는가. 그녀가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해도 충분하다.
이른바 시간 싸움. 저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발목만 붙잡기만 해도 괜찮다.
‘이미 1차적인 목표는 실패한 상황이야.’
광란 사태에 돌입하지도 못했고 로드는 팔팔하다. 심지어 리제도 있는 상황.
그렇기에 약간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저들은 도망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을까.
아까 러스트가 말하길 자기랑 같이 가자고 한 걸 보면 뭔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싸우다 보면 알겠지.’
나는 그 생각과 함께 곧장 돌진했다. 장기전으로 돌입해야 유리하니 처음부터 전력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어둠 속으로…]
내가 돌진함과 동시에 사냥꾼이 어둠에 스며들었다. 육안은 물론이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경계 태세에 들어가야 하나 로드를 믿었다. 지금 내 눈에는 러스트만 보였다.
“싸우기는 싫은데.”
“그럼 그냥 가.”
“그건 더 안 되지.”
-휘릭
내가 도끼를 사선으로 휘두르자 러스트는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동작이다.
그러자 아찔한 살결이 노출되면서 드레스가 날개처럼 펄럭였다.
-까앙!
도끼와 드레스가 서로 부딪혔다. 분명 천쪼가리나 다름없는 드레스인데 철이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내 발목 쪽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사냥꾼이 내 뒤를 점검한 것이다.
-촤악!
그 서늘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로드가 내 뒤를 지켜준 것이다.
뭔가 베이는 소리까지 들린 걸 보면 사냥꾼의 어디가 잘려나갔겠지. 물론 악마인 만큼 금방 재생하겠지만.
“아이야. 가족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지. 난 너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단다.”
러스트가 그리 말하며 손을 위로 까닥거렸다. 발밑에서 안 좋은 기운이 전달됐다.
나는 그 기운을 느끼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그 기운의 정체가 드러났다.
-콰앙!
흑색의 가시가 땅 속에서부터 솟아났다. 저기에 꿰뚫렸다면 나라고 해도 큰 피해를 입었을 터.
[피어나라.]
그 가시는 곧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가시에서부터 장미와 유사한 백색의 꽃이 피어났으니.
나는 그 꽃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색이라면 코를 막아야 하지만 하얀색은 눈을 감아야 한다.
-퍼엉!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폭음. 백색의 꽃은 일종의 섬광탄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적중당했다면 몇 초 동안 정신을 못 차렸겠지. 눈을 감았으니 그나마 덜하다.
“흠?”
내가 공략법을 훤히 꿰뚫자 러스트가 의아한 반응을 드러냈다.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로드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드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 터지는 걸 보고 한쪽 눈만 감은 모양.
아무런 공략법도 없는데 눈 하나만 감은 걸 보면 연륜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지직!
나는 도끼에 붉은 벼락을 담으며 러스트를 천천히 공략했다. 전에 말했듯이 그녀는 무력이 출중한 편이 아니다.
정신적인 데미지를 차곡차곡 쌓으며 상대를 약화시키는 서포터에 가깝다. 혼자가 아닌 다수일 때 진가가 발휘되는 스타일.
멀리 가지 않아도 로드가 사냥꾼 때문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최고의 암살자라지만 로드 정도 되는 실력자가 고전하는 것부터 이상하다.
[내 품에 안기렴.]
러스트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풍만한 가슴과 넓은 골반이 유독 돋보이는 자세다.
그와 함께 내 코에 달콤한 향기가 찔러들어왔다. 그 향기를 맡자마자 순식간에 주변 환경이 변한다.
[사랑하는 아이야. 품에 오려무나.]
[편하게 있으렴.]
[후훗. 여기이려나?]
색욕 그 자체의 환경이 있다면 이곳일까. 사방이 온통 새하얀 살결들로 가득 채워졌다.
나체의 러스트가 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내 몸에 가슴을 비빈다든지 허벅지를 야시시하게 만진다든지 등.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남자여도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환각 마법. 소울 월드에서도 눈 뜨고 당하는 마법이다.
전에 말했듯이 러스트는 서큐버스 퀸 즉 몽마다. 진정한 강함은 이러한 환각에 있다.
‘와… 진짜.’
공략법을 알고 있는데 막상 당하니 5초 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음심으로만 채워지는 느낌.
그러나 이건 환각이다. 나는 환각을 풀기 위해 정신을 다잡았다.
문제는 정신을 다잡는다 해서 환각을 풀기는 요원하다. 러스트가 작정하게 사용한 기술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정신을 다잡는 수준이 아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면 되지 않는가.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혀를 입 밖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까득!
혀가 반쯤 잘릴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더럽게 아프다 못해 눈물이 핑- 정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혀가 반쯤 잘린 순간 죽었겠지. 다행히 나는 악마 못지 않은 재생력을 갖고 있다.
“아으으…”
새하얀 살결들로 채워진 환각이 물러났으나 짜릿한 통각은 남아 있었다. 너무 아프다.
나는 눈꼬리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느끼며 주변을 탐색했다. 일단 환각이 풀린 건 확실하다.
뒤이어 고개를 돌리니 나에게 환영 마법을 걸었던 러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째서 환영 마법이 풀린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아까도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어떻게 알기는. 공략법 보고 알았죠.
나는 러스트가 당황하는 사이 두 발로 땅을 박찼다. 이제 내 차례다.
-털썩!
“어?”
하지만 앞으로 가지 못했다. 이유는 몰라도 두 다리 정확히는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당황하여 통증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목 그러니까 아킬레스건이 깔끔하게 베여있다.
“미안하군. 이게 최선이었다네.”
“로드?”
“사특한 환영 마법에 걸려서 말이지.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군.”
뒤이어 로드가 다급히 나에게 다가왔다. 보아하니 사냥꾼을 놓치는 바람에 이리 된 모양이다.
제아무리 로드여도 남자로 태어난 이상 당할 수밖에 없는 마법이다. 하물며 향기였지 않았는가.
그나마 검성이어서 곧장 정신을 차린 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냥꾼한테 목이 따였을 터.
‘그래도 유효한 타격을 줄만 했는데? 어째서?’
로드를 노리지 않고 나를 노렸다. 적어도 로드를 잠깐동안 무력화시킬 정도의 시간인데.
게다가 나를 완전히 무력화시킨 것도 아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만 제한했다.
‘…혹시?’
러스트의 발언도 그렇고 뭔가 촉박함이 느껴지는 표정도 그렇고. 하나하나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가설을 증명시키기 위해서는 실험에 나서야 할 터. 나는 로드에게 속삭였다.
“할아버지.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지?”
“그러니까…”
나는 로드에게 계획에 대해 말했다. 로드도 내 의견을 듣다가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확실한가?”
“네. 반쯤은.”
“음… 일단 믿어보겠네.”
우리가 속삭이고 있을 때 저쪽도 무어라 의견을 나누고 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계획이 꼬인 걸 인지한 모양. 그리고 나는 그 즉시 계획에 나섰다.
“할아버지.”
“그래.”
“지금!”
그 계획이라는 건 단순하다. 등을 돌려서 도망치는 일.
평범하게 도망치는 게 아닌 둘이 찢어져서 도망쳤다.
“어 어어? 아 안 돼! 빨리 잡아!”
“예.”
우리가 등까지 돌리며 도망칠 줄은 몰랐는지 악마들이 크게 당황하며 쫒아왔다.
그리고 이들이 쫒는 대상은… 나다. 사냥꾼과 러스트 모두 내 뒤를 쫒아왔다.
‘역시…’
이들이 노리는 건 로드가 아니었다. 로드는 신경도 안 쓰고 있다.
‘내가 목표구나?’
이제 유리한 건 이쪽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니게룽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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