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6
최근 그레이스는 기분이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여러 의미로 말이다.
우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시바르와의 관계 진척이다. 시바르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바르의 매력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진척 부분이 걸리는 이유는 갖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첫 번째가 시바르의 조교 생활이다.
‘시바르 씨에게 이상한 사람이 꼬이지는 않겠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시바르가 조교직 수행으로 같이 수업을 못 듣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 해서 시바르와 동거를 안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콩깍지일 수도 있지만 시바르는 너무 매력적이었으니.
점점 완숙해지는 미모부터 시작해서 남자다운 체격. 특히 무력적인 부분에서 감히 누가 따라갈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하다.
이 세상은 무력이 곧 힘이자 권력으로 바뀌는 세상. 하물며 시바르가 가르치는 신입생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들이다.
‘시바르 씨의 무력을 눈 여겨 보고 관심을 주겠죠.’
시바르의 무력은 단순히 ‘강하다’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다.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지인에게 들은 바로는 ‘파괴왕’이라 칭해지는 헥토르에게마저 승리를 점했다 하지 않았는가.
세심함이 부족해서 그렇지 전력으로만 따지자면 장군 혹은 그 이상에 준하는 무력이다.
장군급은 곧 그 나라의 무력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침을 질질 흘리며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야생에서 온 사람이라며 무시했으면 좋겠네요.’
그렇기에 그레이스는 부디 신입생들이 시바르의 가치를 눈치채지 않기를 원했다.
안 그래도 주위에 경쟁자들이 차고 넘치는데 여기서 더 늘어났다가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으니.
심지어 자신은 한없이 유리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동거 그 이상의 관계를 못 나아가고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요. 제가 매력이 없는 걸까요?’
그레이스는 약간 침울해진 표정으로 자기자신을 되돌아봤다. 배경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다.
우선 여성으로서의 매력. 얼굴이 약간 무섭다는 단점이 있긴 해도 몸매로만 따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비록 뭘 먹고 자랐는지 몰라도 젖소 아니 자기보다 더 큰 엘리가 있긴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성격적인 부분도 귀족으로 태어나 자랐기에 고압적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이것도 차차 고치고 있다.
더구나 시바르 앞에서는 고압적이고 나발이고 고양이마냥 골골거리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니 시바르 씨의 이상형을 잘 모르고 있네요.’
시바르가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남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다.
책에서 본 바로 남자는 이상형에 부합하는 여자를 만나면 정신을 못 차린다고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시바르는 앙탈이나 응석을 부릴지언정 바보가 되지는 않았다. 마치 목석처럼 말이다.
‘…그 그렇다고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가끔 아침마다 본 적이 있다. 텐트를 친 것처럼 우뚝 서 있는 시바르의 바지 중앙을.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이유 모를 성적 충동이 일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억누를 수 있었다.
만약 억제하지 못했다면 저도 모르게 손이 갔겠지. 그리 된다면 자연스레…
“으으으…!”
그레이스의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음란마귀가 몰아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다. 좀처럼 그때 상황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았으니까.
보통 ‘색기’라는 단어는 여자에게 자주 사용되는 편이나 시바르도 가끔 묘한 색기를 뿌릴 때가 많다.
그때문인지 가끔 성적 욕망을 이기지 못해 시바르가 없을 때마다 홀로 푸는 편이다.
‘안 돼요. 제가 먼저 건드리면 다른 사람도 건드릴 테니까.’
그레이스는 끝까지 인내했다. 이는 시바르를 좋아하는 다른 여인들과 암묵적으로 합의된 바다.
시바르가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거사를 치르지 않는다. 시바르의 마음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그가 악마의 후손인 것과 전혀 상관없는 오직 시바르 개인을 위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는 년이 시바르랑 하룻밤을 보낸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러나 시바르가 조교가 되면서 걱정이 점점 더 쌓이기 시작했다.
카라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지만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뭐랄까. 낯선 사람이 사탕 준다며 따라갈 것 같은 느낌이다. 시바르는 애 같은 면모가 많았으니.
‘만약을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특히 황녀가 매우 의심스러워요.’
그레이스는 마트라 제국의 황녀 다이애나를 떠올렸다. 소문이 매우 문란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보통 황족들은 안 좋은 소문을 덮기 마련인데 다 아는 걸 보면 그녀가 얼마나 남자를 밝히는지 알 수 있다.
그 마수가 시바르에게 뻗는다면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다이애나에게든 시바르에게든 말이다.
‘시바르 씨는 사람 보는 눈이 좋으니 거부할 수도 있지만…’
아직 그는 부족한 게 많다. 탁월한 재능으로 문명에 적응했다지만 문화는 아니다.
애당초 지역마다 문화가 다르고 그 문화 때문에 충돌하는 일이 많은데 국가는 오죽할까.
특히 아카데미에는 전세계의 인재들이 모이는 만큼 별의별 문화를 지켜볼 수 있다.
‘은어가 제일 중요하겠죠.’
그레이스는 각 국가의 은어부터 공부하기로 정했다. 은어 중에서도 ‘하룻밤’에 대한 은어다.
‘우리 제국은 홍차를 마시자는 제안을 했던가요?’
때아닌 은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레이스는 책을 보다 말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고개를 돌린 쪽에는 시바르를 공부시킬 겸 겸사겸사 구매한 동화들이 널려 있었다.
뒤이어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동화를 슬쩍 집었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니까요.’
그리 생각하면 책 페이지를 딱 넘기려던 찰나.
-덜컥!
“!!!”
느닷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책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책을 정리하는 척 책꽂이에 넣기 시작했다.
“정말 들어와도 돼요?”
“응.”
낯선 목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레이스는 그걸 인지하자마자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시바르 뒤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여자.
처음에는 제인이 온 건가 싶었다. 제인도 저 여자와 마찬가지로 푸른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머리카락 길이도 차이가 날뿐더러 제인의 머리카락은 훨씬 더 짙은 색이다.
지금 저 여자의 머리카락도 푸른색이긴 하나 은청발에 가깝다.
“그레이스. 나 왔어.”
“네. 그런데 뒤의 분은 누구…”
그레이스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시바르와 레이나를 번갈아봤다.
방금 전까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여자인 것부터 시작이다. 남자였다면 그냥 새로운 친구구나~ 라며 넘어갔겠지.
그러나 여자인 이상 의심부터 시작이다. 우선 시작은 탐색이었다.
‘푸른색 머리카락인 걸 보면 프로즌 쪽 출신인데… 응? 잠깐만.’
그레이스가 뉴페이스 레이나의 얼굴을 보며 조금씩 사람을 떠올릴 때였다.
“아 안녕하세요. 프로즌에서 온 레이나라고 합니다.”
“프로즌에서 온 레이나라고 소개했어.”
“아. 프로즌 공녀님?”
역시 예상했던 대로 프로즌에서 온 공녀 레이나가 맞았다. 그레이스의 의심이 한층 덜어졌다.
물론 전부 다 덜어진 건 아니다. 그녀는 의심보다는 의문이 먼저 앞서 나왔다.
“프로즌 공녀님께서 왜 시바르 씨와 같이…?”
“아. 그건…”
“내가 설명할게.”
시바르는 그레이스에게 여태까지 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과거 프로즌에 있을 때 레이나와 우연찮게 만난 적이 있고 거기서부터 인연이 닿았다.
원래라면 조교직으로 활동하고 끝이었으나 레이나에게 난독증이 있다는 걸 깨닫고 도움을 줬으면 한다.
“병원에서도 난독증이래. 도움 필요할 거 같아서.”
“그걸 왜 저희가…?”
“그레이스는 도움만 주면 돼. 내가 주도할 거야.”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진짜 사람이 너무 착하네…’
그레이스는 레이나와 대화하고 있는 시바르를 쳐다봤다. 사람이 착해도 너무 착하다.
그럼에도 본인만의 선은 확고하여 호구처럼 굴지는 않았다. 어쩜 이런 사람이 있을까.
물론 실상은 카라스가 반쯤 어거지로 떠넘긴 거에 가까웠지만 그레이스가 그걸 알 리가 만무하다.
시바르를 향한 그레이스의 마음이 점차 깊어지고 있을 때 시바르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가능할까?”
“히 힘들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힘들다면 거절해도 괜찮대.”
“아뇨. 그 정도야 가뿐하죠.”
그레이스는 머리를 우아하게 쓸어넘기며 시원하게 수락했다.
시바르가 데려온 사람이니 레이나의 됨됨이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치료 자체는 병원에서 하시는 거죠?”
“네.”
“많이 힘드셨겠네요. 난독증은 학업에 큰 차질을 빚게 할 텐데.”
“헤헤…”
레이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그레이스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보 같은 웃음을 보아하니 나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바르가 데려오지 않았을 터.
‘선을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구경할 생각은 없다. 최대한 견제할 필요가 있다.
특정 계기로 시바르에게 빠져든다면 차가운 현실을 알려줄 것이다.
‘아니면 그전에 과시하는 방법도 있죠.’
이에 그레이스는 자연스레 시바르의 팔을 잡아당겼다. 시바르도 조용히 그녀의 손길에 따라갔다.
이윽고 연인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끼기까지. 레이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레이스?”
“일단 시간이 시간이니 점심부터 해결할까요? 레이나 씨는 모르겠지만 시바르 씨가 요리를 엄청 잘하거든요.”
시바르는 그 말을 듣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슬슬 점심 시간이다.
그런데 굳이 팔짱까지 끼면서 말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아. 네…”
그리고 그걸 지켜본 레이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지만 뭐랄까. 대놓고 자랑하는 듯한 모양새라 기분이 이상했다.
언짢다? 불편하다? 짜증? 아직은 잘 모르겠다. 처음 느껴본 감정인지라 아직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 두 분께서 동거를 하신다고 하셨죠?”
“우리더러 동거하냐고 물었어.”
“네. 작년부터였나? 그때부터 동거를 시작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레이나는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런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알 건 다 아는 레이나였으니까.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본인조차 감지하지 못한 아주 약하디 약한 간질거림이었다.
‘잘 어울리는… 게 맞나?’
정말 모르겠다.
[신앙이 상승합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레이스: 골키퍼
레이나: 공격수로 포변 중
카오스: 팝콘 우적우적
님! 재미있게 보셨다면 선작 추천 댓글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