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04
왕실 측 사람들이 레비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확히 에스뮈에가 도착하고 이틀 뒤였다·
이티스엘 7세와 측근들 그리고 왕자와 왕녀까지 태운 채 도착한 장대한 행렬은 왕실 친위대를 비롯한 군대에 가까웠던 터라 회의실과 이어진 테라스에서도 육안으로 쉽게 확인이 가능할 정도였다· 사실 저 멀리서 수십 마리의 비룡들이 하늘을 배회하며 군대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으니 시력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모를 수가 없었다·
처음엔 왕이 직접 행차했으니 왕을 지키기 위해 수도에 남아 있는 에카프 경도 함께 오지 않았을까 싶어서 깔끔하게 단장을 마치고 각을 잡고 있는 셰릴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하게 부정했다·
“깃발을 보면 젊은 공작이 온 게 확실하니 수도를 지키고 계실 거다· 실력자 둘이 있으면 좋은 게 맞지만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지·”
“···그게 여기서도 적용 된다고?”
“지금의 레비엥은 대외적인 시선을 일부러 모은 연극의 장이니까· 타국의 주요 인사들도 나름의 호위를 끼고 온 마당에 집주인이 양손 가득 패를 움켜쥐고 나타나면 우스갯거리 밖에 안 될 테지·”
이전보다 월등하게 밀어버린 전선· 의도치 않게 왕국 연합군을 끌어다 쓰게 된 덕에 과잉 배치되어 철옹성이 따로 없게 느껴지는 감시 체계· 거기에 제국와 마신교라는 거대한 집단의 수장들이 대동한 호위에 더불어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는 레비엥 변경백과 용사까지·
이래 놓고도 마스터 급에 준하는 실력을 지닌 강자들을 바리바리 끌고 오면 속된 말로 가오가 안 산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에스뮈에와 벤데 후작이 참여했으니 격을 맞춘다는 핑계로 데려올 수 있었던 게 젊은 공작일 거라는 게 셰릴의 설명이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죽는 것보단 웃음벨 좀 울리는 게 나을 텐데 이 와중에도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는 건가· 왕이나 호위나 다들 고생이구만·
“사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편법이 들어가 있긴 하지· 우리가 이티스엘의 백성이지만 소속은 쪼개져 있는 것처럼·”
“허어 그게 또 그런 식으로 쓰이는군· 근데 나야 마신교라 쳐도 너는 어딘데?”
“에테의 용사 지크프리트 파티·”
“기가 차는군·”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젓는 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데오니 성녀님이었다·
“그냥 귀족들의 머리싸움에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보다 그 차림으로 회의에 참석하실 겁니까?”
남의 행색을 가지고 트집잡는 취미는 없지만 성녀님의 차림새가 워낙 예상과 달랐기에 어쩔 수 없이 물어봤다· 각국의 대표들을 만난다고 하기보다 전장으로 나간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완전 무장을 한 탓에 누가 봐도 성기사라고 착각할 법한 상태로 테라스에 선 성녀님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앞으로의 이권을 두고 심각한 토론을 해야 하는 자리이지 않습니까? 하늘하늘한 예복을 입을 처지가 아니지요· 용사님도 그렇잖습니까?”
나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방패까지 다 차고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거였지만 어차피 성녀님의 말은 진심이 아닌 농담에 가까웠기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이미 판은 다 짜여져 있다· 이번 회담은 왕국 연합이라는 허수아비 관객들을 둔 채 세상에 정식으로 기록을 남기기 위한 무대에 불과하다· 아마 먼 훗날 역사서에는 망명 정부와 다를 바 없는 상태의 마신교가 날을 세워가며 권리를 주장하며 이티스엘과 격론을 이어 나가는 동안 제국이 중재를 섰다는 식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성녀님께서 직접 싸울 일이 없도록 경비나 잘 서고 있어야겠군요·”
그래서 그냥 화제를 전환하여 농담이나 던졌다· 그러자 성녀님은 옅게 웃으며 미소로 화답해줬다·
마신교 내부에서는 내가 직접 참여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으나 복합적인 이유로 기각됐다· 왕국 연합들을 거하게 조진 덕에 괜히 끼었다간 이야기만 복잡해진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왕군을 대비하고자 각국에서 데려온 정예 병력들이 내 돌발 행동에 대비해서 회의실 안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그림이 그려진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각국의 전력들은 회의실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게 아니라 만약을 대비해서 외부 경계를 서야만 한다· 마왕군이 무슨 수작질을 부릴지 아무도 모르니까·
“아 그러고 보니 철혈 황녀와 레비엥 변경백의 심기가 묘하게 불편해 보이던데 혹시 아는 거 있으십니까?”
가벼운 잡담을 끝마치고 다시 회의실로 향하던 성녀님은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무심코 던진 질문에 나는 마스터 급 정령술사의 방문을 핑계로 어떻게든 머릿속에서 미뤄두고 있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들은 바가 없습니다·”
···침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짜로 들은 게 없으니·
셰릴과의 대련을 끝마치고 돌아갔을 때 내가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삐졌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에스뮈에와 잔뜩 뚱해 있는 라그니스· 그리고 멋쩍게 웃어 보이는 아실리에의 반응 뿐이었다·
그나마 가장 온화한 반응인 아실리에에게 무릎 꿇고 설명을 부탁해도 일단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왔는걸···
“어쩌면 완벽한 연기를 위해 감정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배우들 중에서는 그런 부류들도 있다고 하던데·”
“과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저도 좀 더 준비를 해야겠군요· 역시 여쭤보길 잘했네요·”
감탄하며 안으로 사라지는 성녀님의 뒷모습에 묘하게 죄책감을 자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 둘 다 저랑 연인 관계인데 자꾸 여자가 꼬인다는 거 때문에 잠깐 문제가 생겼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입을 닫았다·
그렇게 궁색한 말로 상황을 모면한 줄 알았거늘 느닷없이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셰릴이 훅 치고 들어왔다·
“···너 철혈 황녀하고 무슨 관계야?”
“황녀가 납치당할 뻔한 걸 구해 준 은인이지·”
당황따윈 하지 않는다!
이런 질문을 들을 가능성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는지 아는가! 흔하디흔한 클리셰처럼 말을 더듬는다거나 사례에 들린다는 판에 박힌 헛짓거리를 하기엔 나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란 말씀!
이미 팩트에 의거한 알리바이를 입에 담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내려 바라보는 것까지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연기다!
“뭐가 미리 준비된 답변을 말하는 기분인데·”
···너 너무 완벽했나···?
순간 안면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숨기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어깨를 으쓱였지만 정작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맺히는 기분이다·
“그냥 그거 말곤 할 말이 없으니까· 아니면 뭐 바라는 대답이라도 있었어?”
사실 귀족원의 수장과 왕실이 몰래 손발을 맞추고 있었다는 국가 기밀따윈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지만 이건 별개다·
아무리 내가 뻔뻔하다고 하지만 세 여자와 연인 관계라는 말을 했을 때 싸늘하게 식은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는 셰릴과 그 속에서 실시간으로 나락갈 평가를 버티는 건 무리다· 무엇보다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상황 설명하는 데에만 한 세월일 텐데 이미 저 멀리 있던 왕가의 행렬이 어느새 레비엥 코앞까지 당도해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아주 잠깐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며 침묵이 오고 간 끝에 도끼눈을 뜨고 있던 셰릴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아니· 지금은 됐어·”
그러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몸을 돌려 왕가를 맞이하기 위해 테라스를 벗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왜 ‘지금은’인데? 왜 여지를 두는 건데? 라고 따져 물어보고 싶었으나 의심만 살 게 뻔하니 나도 그 뒤를 따라 그냥 조용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
한창 회의 준비로 분주하기 짝이 없는 성을 지나 밖으로 나온 우리가 대로를 따라 성문으로 향할 무렵엔 황실 사절단이나 성녀님이 도착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국왕 폐하 만세!”
“진정한 성군 이티스엘 7세 만세!”
“왕자님과 공주님께 축복이 있기를!”
엄청나게 시끄러운 환호성과 함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군대와 마차가 레비엥으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딱 보자마자 바람잡이를 심어서 분위기 좀 끌어 올렸구나 싶을 정도로 열기가 가득한 가운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던 셰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승전이라고 하고 돌아온 줄 알겠군· 왕가를 향한 칭송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이건 좀 과한 거 아닌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얜 이상하게 어려운 쪽에서는 머리가 좋고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더라·
그녀에게 바람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짧은 강의를 해주는 동안 수많은 인파들을 지나 대로를 가로 지르며 최선두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비룡 기사단이었다·
원래 기마병들이 해야 할 일을 일부 비룡들이 대신하고 있는 듯했는데 뒤뚱거리는 일 없이 두 발로만 멋들어지게 걷는 비룡들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엄청 훈련을 받아도 되는 놈들이 있고 안 되는 놈들이 있다던데 말이지·
하지만 놀랍게도 진짜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따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와 셰릴마저도 믿기 힘들다는 듯 서로를 바라볼 정도로 엄청난 퍼포먼스에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바람잡이가 아니라 저거 보고 환호하는 거 아닐까?”
“나도 지금 그 생각을 하긴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셰릴이 내뱉은 말에 나는 아무런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불의 거인 넷이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갑옷을 두른 채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광경은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에 충분한 임팩트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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