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97
틸레 이모의 방문 이후로 왕도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뿌리가 뽑혀버린 잔당 적은 인명 피해 발 빠른 대처 가장 먼저 공격받아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부터 챙기는 것처럼 비춰지는 왕실의 행보 등등 복합적인 이유가 함께한 결과였다· 거기에 덧붙여··· 내 입으로 말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전설로 남을 법한 전투를 직접 목격한 이들이 수천에 이르렀으니 일부러 민심을 유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런 분위기가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빠르다고 해서 모든 게 좋을 순 없는 법·
“마신을 향한 신앙은 국법으로 처벌 받지 않으나 악마 숭배는 이유불문 처형이니! 이를 잊지 말고···!”
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악마들에 대한 인식 변화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을 구조해줬다는 증언과 경험담이 터져 나오니 ‘사실 악마라는 존재들도 생각보다 괜찮은 거 아니야?’ 라는 발상을 하는 자들과 이를 적절하게 악용하려는 진짜 악마 숭배자들이 미묘한 혼란 속에서 뒤섞여 여러 문제들을 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이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카펫을 시켜서 이 혼란을 틈타 사람들과 계약하려고 하더나 등처먹으려고 하는 다른 파벌의 악마 새끼들을 역으로 털기 시작한 덕이다· 반응 없는 악마와 하지 말라는 포고령 그리고 걸려서 처형당하는 죄인들이 콤보로 터지자 거리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던 ‘사실 악마는 착하다’설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진짜 문제는 악마가 아니라 나였다·
“엘드미아 그는 사실 신이다!”
진짜 진짜 존나 심각한 문제였다
“투쟁의 화신 엘드미아께서는 라단을 구하고자···”
“선지자 캬루베로스를 따르라! 잊혀졌음에도 필멸자들을 긍휼이 여겨 직접 현신하여 거대한 재앙을 빛으로 멸하였···”
농담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파벌이 생기고 없던 교리가 생겨나며 누가 나를 엿 먹이려고 고의적인 수작질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져나갔다·
그나마 그 교리라는 게 사이비 종교스럽지 않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멀쩡한 사람을 대뜸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인 탓에 손님방에 처박혀 과일만 처먹으며 방관하기 힘들어 결국 이렇게 밖으로 나와 몰래 시찰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왜 심각한 문제냐고?
잘못된 믿음인데 내 신성력이 자꾸 올라가니까!
처음엔 그냥 고갈되었던 힘의 수복이라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회로와 신체의 수복은 한없이 더딘 와중에 이상하게 신성력만 1·5 배속으로 차오르는 기분이라서 감각을 열어 보니 근본을 알 수 없는 신성력이 모이고 있었다·
그냥 그런 사이비 종교가 생겼다하면 웃고 끝날 문제지만 진짜로 신성력이 공급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흔적을 따라 신분을 감추고 몰래 나오니 상당한 사람들이 모여서 목청껏 설파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악마 숭배에 대해서는 일절 예외를 두지 않는 경비들이지만 저들에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마치 ‘뭐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라는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너무 과열될 거 같으면 헛기침을 하거나 적당히 선을 그을 뿐·
“진짜 돌아버리겠네· 살면서 신 소리를 또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이비 종교의 탄생이 가져올 위협에 대해 안일하게 대응하는 그들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자 나와 함께 신분을 감추고 동행하신 대모님께서 고개를 헛웃음과 함께 입을 여셨다·
“오크들 머리통 좀 날렸다가 들은 적 있다고 했었지? 그땐 전쟁신인데 이젠 투쟁신이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럴 시간에 도시 재건이나 도울 것이지·”
감시보단 주로 안전을 위해 절대 홀로 외출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라단 왕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최고의 인선이었던 시뉴아 대모님의 마법 덕에 인식 저해 마법으로 편안한 암행이 가능한 것과 달리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사이비 종교가 탄생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 신성력은 유사 시한폭탄일 수도 있으니까· 죄 없는 사람들이 순수한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니었다면 내게 흘러 들어오는 신성력을 멈추기 위해 싹 다 엎어 놨을 거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고 말인즉슨 전혀 다른 형태로 골치가 아파졌다는 의미였다·
“소문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좀 사람 같은 면모를 보여 줘야 할 거 같은데 행사 준비는 아직 덜 됐습니까? 서둘러 끝내고 비공정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흠··· 연애나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없느냐? 염문艶聞 좀 퍼트리면 사람 냄새 좀 날 게 분명한···”
“그랬다간 사이비 종교같은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마주하게 될 겁니다· 절대 안 됩니다·”
토사구팽에도 정도가 있지 어찌 나라의 은인이자 죽마고우의 하나뿐인 혈육을 오체분시하려고 하시는 건지 원· 질색을 하며 고개를 내젓자 그런 내 반응에 적나라하게 깜짝 놀란 대모님이 되물었다·
“음? 이미 연인이 있다고? 그거참 여러모로··· 대단하구나· 바람직하기도 하고· 어떤 아가씨니? 동갑내기인가?”
“어··· 그게···”
어중간하게 말했다간 존나 쓰레기 취급 받기 딱 좋고 대놓고 다 말했다간 국가 기밀 급 스캔들이 터지며 숨기고 일부만 말하자니 당사자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비밀입니다·”
“비밀이라니?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너의 대모를 자처하겠느냐· 덩치도 산만한 녀석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정도는 말해 보거라· 어차피 확인도 끝냈고 왕궁에서 저들을 해산시킬 병력이 따로 오기 전가지는 할 일도 없잖느냐·”
“아무튼 지금은 안 됩니다· 나중에 제대로 말씀드릴 기회가 오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상대가 네 나이를 고려해도 너무 심각하게 어리거나 많은···”
“그으으으으런 문제까지느으으은···”
외모가 어려 보이거나 실제로 많긴 해서 확답을 포기하고 두리뭉실하게 둘러대고 딴청을 부린다·
대모님을 신뢰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떠나서 그녀는 결국 라단 왕실을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은 존재다· 단순히 쥐고 있는 권력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충의가 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굳이 스캔들이나 다름없는 정보를 쥐어 줘서 국가를 위해 정보를 제공할지 아니면 아버지의 아들인 나를 위해 입을 다물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아예 정보를 안 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허 묘한 곳에서 또래 애들이 보일 법한 반응을 보여주는구나·”
다행히 대모님은 더 케묻지 않으셨다·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집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의 등장과 함께 해산됐다· 되도 않는 신앙을 퍼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미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민폐를 끼친 것이긴 한데 웃기게도 그것만 제외하면 참으로 고분고분해서 출동한 기사단조차 당황했을 정도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 뒤로는 큰 문제 없이 무탈하게 흘러 갔다·
굉장히 무리한 탓에 몸의 회복이 조금 더디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 갔다· 에스테와 바늘들도 문제없이 회수할 수 있었고 루할 시나가 최후의 발악으로 만들었던 힘의 파편들 역시 빠짐없이 회수하여 파괴 했다·
옆에 붙은 캬루베로스가 매우 아까워하는 기색을 내비쳐서 뒤통수를 때려주는 것 외에는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더 지난 끝에 열린 공식 행사에서 라단왕의 감사와 보상을 받고 나서야 나는 라단에서의 일들이 마무리되기 시작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 길어진 여정이었다·
그만큼 얻은 것도 많지만 재기 불능 수준으로 박살 난 에스테처럼 잃은 것도 있다· 돌아가자마자 용장들에게 부탁하여 해결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아첨하지 않았으면 매일 같이 쏟아지는 에스테의 잔소리에 고막도 잃었을 터이니 이 정도면 굉장히 양호했다·
그래도 주력 무기를 잃은 상태로 오래 있을 수는 없었기에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이젠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귀국이라니 좀 더 쉬지 그러나· 자네가 부탁한 정보도 확인해야지·”
그리 결정하고 넌지시 눈을 띄우자 라단왕은 굉장히 의외라는 듯 추가적인 휴식을 권한다· 솔직히 의외의 반응이었다· 누구보다도 유진이 보고 싶을 사람이 연기 같은 거 없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으니까· 그 마음은 고마웠으나 나도 내 몸 상태는 얼추 파악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폐하의 성은 덕분에 건강은 회복했습니다· 이제 다시 할 일을 해야죠· 문서는 어차피 제 지식으로는 온전히 파악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 그건 차후 다른 성직자분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틸레 이모의 강력한 주장 덕분에 설득은 순조로웠지만 넓은 땅덩어리만큼 엮인 종교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다고 마냥 드러누워서 시간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제대로 분석하고 확인할 정도의 지식을 갖춘 건 정규 성직자들일 터이니 이티스엘로 돌아가 데오니 성녀님께 미리 도움을 요청해 두는 편이 나았다·
“음··· 자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계획들까지 얼추 이야기하고 나니 라단왕도 굳이 억지로 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얼마 있지도 않은 짐을 싸고 정리를 마치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비공정에 오를 수 있었다·
“인족들은 정말 별의별 물건들을 다 만드네요·”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에서 여전히 몸종 연기를 하고 있는 캬루베로스와 함께 말이다·
“······?”
당연히 만마전으로 가서 따로 부르기 전까지는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돌아와서 사람 흉내를 내고 있으니 순간 내가 따로 명령해 놓고 까먹고 있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다·
“···시끄럽게 굴면 바다 위에서 던져버린다·”
“헤헤헤 여부가 있겠습니까·”
순간 뒤통수를 쥐어박고 돌려보낼까 싶기도 했지만 보는 눈도 많아서 일단 두기로 했다·
지금은 외국인 최초로 비공정에 탑승하게 되었다는 즐거움만 만끽하련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