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6
완전히 수복을 마친 레비엥에 생긴 게이트 덕분에 직접 확인해 보겠다는 확답과 함께 그림자 발을 돌려보낸 내가 레비엥에 도착하기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보안을 위해 두 번에 걸쳐 경유지를 만들어 놔서 조금 지체 된 걸 제외하면 실상 저택에서 게이트 구역까지 걸어가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이제는 몰라보겠구만·”
그렇게 펼쳐진 레비엥의 전경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참 많이도 바뀌어 있었다· 지금까지 게이트로 와본 적이 없다보니 낯선 장소에서 낯선 각도로 도시를 보게 된 것도 그런 느낌을 주는 이유 중 하나겠지만 그보다도 최전방 요충지라는 분위기 대신 대도시 특유의 번화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컸다·
게이트 구역을 벗어나자마자 들리는 게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노는 소리라니 기껏 해봤자 상인들의 호객 소리나 들릴 거라 믿고 있던 나에겐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충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같은 도시가 맞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체계적으로 구획이 나뉘며 길이 바뀌고 도로가 다져졌다· 처음엔 긴가민가 했었지만 10분 정도를 헤매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와 길을 모르겠네·”
미리 연락해서 안내해 줄 사람을 요청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달려온 건 내 머릿속에 얼추 레비엥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대충 여기로 가면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으니 새로 지어진 신전은 금방 발견하겠지·’ 같은 안일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의 대가는 내 마지막 기억보다 더 높은 3층 4층 건물들로 이루어진 장벽 속에서 길을 잃는 결말로 이어졌다·
심지어 그런 현실을 쓰게 삼키고 있는 내 모습을 멀뚱히 구경하는 애들까지 있다· 잘 놀고 있다가 갑자기 왜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슬쩍 시선을 주자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저들끼리 자지러지게 웃으며 멀리 도망친다·
알리샤 여사님의 보육원에 있는 잔망스러운 꼬맹이들이 떠오르는 와중에도 걸음을 옮기던 나는 머잖아 그런 시선을 보내는 게 애들 뿐만이 아니라는 걸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주로 도시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내 쪽으로 쏠린다· 그 안에 담긴 다양한 감정들을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의문 당혹 기대 놀라움 등등을 내비치며 몰래 쳐다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반응은 결국 혼자 길 찾기를 포기하고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묻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내가 잘생겨서 그렇다기엔 남녀노소를 구분짓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찜찜해지려는 찰나 목적지인 마신교 신전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옘병···”
예카트리나는 서부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을 봤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리라·
깔끔하고 장엄한 신전 입구에 에파가 님이라 짐작되는 신상 아래에서 검과 갑옷을 갖춰 입은 채 서 있는 내 동상이 있었다·
“돌겠네 진짜·”
초상권이 없는 세상이 낳은 폐해였다·
◈
마신 에파가께서 인도하신 끝에 악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마신교는 인족과 진정한 화합을 이루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새로운 신전을 세우게 됐다·
그런 기념비적인 신전을 장식할 위인이란 정해져 있는 법이다· 모두를 바른길로 이끈 정신적 지주인 성녀 데오니 비레와 혈혈단신으로 마족령까지 파고들어 신도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용사 엘드미아···
“엄밀히 따지면 혼자는 아니었는데요·”
초상권 침해 석상이 생기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던 성직자의 말을 끊으며 정정하자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 사도들의 모습도 새겨져 있습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신전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과 벽화를 설명해주던 젊은 성직자의 손이 아주 정중하게 가리킨 곳에는 대충 봐도 칼 칸시임이 분명한 수인이 적들을 도륙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아마도 라이토르에서 있었던 순간을 기록한 모양인데··· ‘들’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여기 어딘가에 에밋의 모습도 그려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신전에 당도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우르르 쏟아져 나온 성직자들이 에파가 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무릎을 꿇는 공개 처형과도 같은 행위를 일삼은 끝에 내부로 들어오고 나니 안쪽은 한층 더 심각했다· 렌기에 에파가시에라에서부터 이어진 여정 중 일어났던 큼직한 사건들은 죄다 벽화로 새겨 놓은 듯했는데 당연히 곳곳에 나로 짐작되는 인물이 큼직하게 그려져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 정신 공격은 지성소에서 기도 중이라는 성녀님과 만나게 되는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나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 하는 성녀님에게 반가움보다 야속함을 느낄 정도로 지독한 정신 공격이었다·
“용사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여기 오기 전까진 멀쩡했는데 오고 나니 이상이 생길 거 같습니다···”
대체 이게 다 뭐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마왕군에게서 벗어나고자 교단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렌기에 에파가시에라를 떠나 인족의 영토에 처음으로 지어진 마신교의 신전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거기에 드워프 장인들이 곁들여진 탓에 너무나도 섬세한 외형 묘사가 이루어져 많이 부끄러울 뿐이다·
대외적인 자리에서 뻔뻔하게 구는 거랑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건축물에 얼굴이 박제당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더라고· 그런 솔직한 감정을 토로하자 성녀님도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선대들께서도 얼굴을 남기는 일은 드물었는데 말이죠·”
덕분에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있었다·
시작은 말이다·
“도끼를 내어 달라구요···?”
비록 본론으로 들어가자마자 훈훈한 분위기가 빠른 속도로 식으며 성녀님의 눈이 게슴츠레 해졌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설명을 듣는 내내 딱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신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저택에 머물고 있는 세 여인들처럼 ‘결국 또 움직이는 건가· 이 정도면 신기록이긴 하지·’ 라는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합리적인 주장을 전부 듣고 고심하던 성녀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지성소로 들어가시더니 한쪽 어깨엔 카쿨라의 도끼를 한 손에는 성창 에스테를 들고 나오셨다·
“아니 성창은 그렇다 쳐도 도끼는 왜 거기서 나옵니까?”
“만에 하나 검이 완성되기 전에 움직이실 때를 대비해서 축복하고 있었습니다·”
덤덤한 대답과 함께 내밀어지는 도끼가 무슨 의미인지는 자명하다· 이에 감격하며 받아 가려는데··· 어째서인지 성녀님이 손을 놓지 않으신다· 거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 의문형 시선에 성녀님의 대답이 이어진다·
“대신 저도 따라갑니다·”
“예? 왜요?”
“허 지금 왜요라는 말이 나오십니까? 저도 왜요입니다· 안 됩니까?”
“아 아뇨· 당연히 안 될 건 없는데···”
순간 진심으로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 탓에 나도 모르게 쭈그러지자 그제야 도끼를 손에서 놓은 성녀님이 말을 이었다·
“마침 잘됐습니다· 본디 성녀는 용사를 보좌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말인즉슨 용사님께서 언급하신 ‘유사 성역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인 마왕과의 결전에 대한 대비에는 저도 포함된다는 뜻이죠· 지금까지 제 의무를 게을리 했으니 이제라도 성실히 임하려고 합니다·”
교단이 멀쩡했으면 진즉에 이랬어야 했지만 하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를 추스르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는 게 성녀님의 설명이었다·
신도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선두에 섰을 뿐 주교와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 모두가 멀쩡히 활동하고 있으니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성녀님을 옆에서 바라보는 당사자들의 시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했지만 이번만큼은 차마 그들을 대변하여 입을 열 수 없었다· 성녀님의 주장이 정론 그 자체이니 이번엔 그들이 힘쓸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대 ‘몰라 나도 무서워· 여러분도 성녀님 화나면 벽 들이받는 거 알잖아요· 불만은 직접 말하세요·’ 같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은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제국 신성회를 놓고 봐도 그렇다· 자폭 성녀가 그쪽 교단을 이끌고 있었다고 생각해 봐· 성광십자회의 꼬마 성녀님은 또 어떻고? 성녀가 다 할 거면 주교랑 추기경은 왜 있나?
“무엇보다 외부에서 치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지키는 역할을 하실 거라면 제가 있는 편이 무조건 낫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성녀님의 말대로다· 이번에 내가 취할 행동은 바깥에서부터 길을 뚫는 게 아니라 자가용을 통한 에어 드랍이었다· 유사 성역의 영향력이 하늘로도 뻗어 있어 그 위를 날아다니기가 쉽지 않다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좀 더 높이 날아서 떨어지면 되는 문제다·
바꿔 말하면 까마득한 높이에서 낙하산 없는 활강을 해야한다는 게 문제라는 소리다·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꽤 높이 날아야 하는데요·”
나는 그래도 나름 익숙해지기도 했고 바늘에 대한 신뢰도 있었지만 성녀님은 괜찮을까?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물어보자 성창을 고쳐쥔 성녀님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저 데오니 비레는 성녀이기 전에 교단 무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단 심판관이었습니다· 신의 뜻을 행하는 데에 있어 두려움은 없습니다·”
하필이면 심히 플래그스러운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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