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1
이안의 계획은 간단했다·
라그나르와 주술사 사이에 틈이 있어 보이니 그 빈틈을 파고들어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는 것이다·
어차피 부족의 인간들은 신비가 무엇인지 마법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안이 말하면 ‘아·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인터넷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는 정보의 편향이 일어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지만·
세상은 원래부터 정보가 불균형하고 편향되게 퍼져 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이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뒤바꾸는 것·
그것이 마법사가 가진 힘이었다·
“이 이안?!”
우리에 갇혀 있던 타카리온은 이안을 발견하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만인들이 뭐 잔인하고 끔찍한 놈들이라 타카리온을 짐승 우리에 가둔 건 아니다·
그냥 가둘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그랬다·
북부인들은 감옥을 짓지 않고 죄를 지은 자는 추방 아니면 사형을 때려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을 차치해도 타카리온은 진짜 처량하고 불쌍해보였다·
사람이 짐승 우리에 갇혀 있는데 측은지심이 들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여어· 타카리온· 살아있었군요·”
“하늘님 맙소사! 네 네가 왜 여기에···!”
“일단은 구하러 왔습니다·”
이안이 씩 웃자·
타카리온은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오열했다·
“흐 흐어어어어어엉!”
이안은 그런 타카리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이 반쪽이 됐긴 한데· 워낙에 몸뚱이가 후덕한 탓에 반쪽이 되어도 일반인 한 명 정도는 됐다·
하지만 확실히 다이어트를 하고 나니 인물이 달라 보이긴 하다·
“살 빠지니까 보기 좋네요·”
한참을 울던 타카리온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서··· 난 언제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어째서 이안이 열쇠를 들고 나타나지 않았느냐~ 라고 돌려 까는 말이었다·
기왕 구해줄 거면 멋지게 열쇠를 짠 하고 들고 나타나면 어디가 덧나나!
이안은 타카리온이 얼마나 다급하고 간절한지를 알았기에 굳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글쎄요· 힘을 써봐야 알겠지만···”
“힘을 쓴다고···? 나 날 빼낼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뭐 걱정하지 마세요· 되는 데까지는 해볼 테니까요·”
이안은 타카리온을 보며 씩 웃었다·
“대신 타카리온도 수고를 좀 해주셔야 합니다·”
“수 수고라니···?”
“저명하신 수도사잖아요· 솔직히 저도 성 마르쿠스 복음서 개재밌게 읽었습니다· 내 마음 속 인생픽 1위에요· 축하합니다· 타카리온·”
“그게 무슨···”
타카리온은 현란하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안의 화술에 홀려 정신이 반쯤 나갔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이안이 타카리온을 위해 노력할 것임은 확실했다·
“일단은··· 저 녀석부터 어떻게 해야겠군요·”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본업은 마법사인 주제에 선동 사기 다단계 등등 기타 경범죄만 잔뜩 숙달되고 있는 이안은 또 다시 ‘마법사 행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안은 이런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어디 그걸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법사는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허한 존재다·
이안은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라그나르으으으!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사내가 목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만 들어보면 어디 마당놀이 배우 출신이라고 우겨도 믿을 정도였다·
“아· 파이라· 왔나?”
라그나르는 건성으로 손을 들며 곧바로 이안에게 말했다·
“바로 저 자야· 주술사 파이라·”
라그나르는 노골적으로 이안에게 무언가를 원한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답을 맞히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주술사 파이라·
주술사인 만큼 부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간일 것이다· 부족의 권력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벌할 수 없을 만큼·
라그나르는 파이라를 공격할 수 없다·
하지만··· 이안이라면?
같은 주술사(아님)라면 파이라의 무능함을 지적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결국 라그나르가 바라는 것은 이안을 이용해서 파이라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
이안에게 기회가 굴러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이라가 무너진다면 타카리온의 처분은 이안의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내 경고했지 않나! 저 제국인은 재앙을 가져올 거야! 당장 쫓아내야 해!”
“흠· 이미 했던 얘기군·”
라그나르는 노골적으로 파이라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그러자 파이라는 기가 막혔다·
지금 차기 족장이라는 인간이··· 부족의 주술사보다 외부에서 온 근본 없는 하늘쟁이 편을 들어주고 있는 건가?!
‘빌어먹을 똥고집 하고는!’
대수렵제의 실패를 예언하지 못했을 때부터 라그나르가 파이라를 싫어한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엿을 먹이려 들 줄이야!
파이라는 이안이 듣지 못하게 라그나르의 앞에서 속삭이듯 소리쳤다·
남 듣기 쪽팔린 이야기라서 그렇다·
“라그나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저 제국인을 내쫓게! 당장!”
“저자는 전사 시그르의 손님이야· 아무 이유 없이 내쫓는다면 전사들의 반발을 살 거다·”
“족장을 위한 약을 만들지 말라는 뜻인가? 지금?”
파이라가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자 라그나르는 곧바로 으르렁대듯 속삭였다·
“만들 생각이었으면 진작 만들었어야지!”
“이 답답한 인간을 진짜···! 그때는! 점괘가! 나쁘게 나왔다고! 말했지 않나!”
라그나르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닥쳐라! 무능한 주술사! 내가 영원히 네놈에게 휘둘리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휘두른 게 아니라 점괘가···!”
파이라는 라그나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했다·
파이라가 점괘를 핑계 삼아 라그나르와 부족민들을 조종하려 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파이라는 솔직히 할 말이 없긴 했다·
아주 가끔씩 점괘를 자기 유리한 식으로 해석해서 사기를 쳐먹은 적이 몇 번 있었으니까·
파이라도 사람이다·
남을 쉽게 속여먹을 기술이 있는데 1년 365일 내내 정직하기만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말이 안 통하는군·’
파이라는 시선을 돌려 검은 머리의 제국인을 바라보았다·
결국 저 자가 원인이다·
본인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파이라는 나름 실력 있는 주술사· 다른 부족의 주술사들도 실력을 인정하는 꽤 괜찮은 주술사가 바로 파이라다·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파이라는 제국에서 찾아온 저 불순물을 본인의 실력으로 직접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모두에게 파이라의 실력을 보여주고 저 제국인의 무능함을 증명한다면·
주술사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되살아나게 될 터·
그럼 라그나르는 군소리 없이 파이라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리라·
동시에 파이라는 직감했다·
차분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저 청년···
분명 100% 파이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입니까? 사람 심장으로 약을 만든다는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인간이·”
검은 머리의 제국인 마법사 이안이 입을 열자·
주변의 모든 야만인들이 경악했다·
뭐? 심장으로 약을 만드는 게··· 헛소리라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심장이 몸에 좋은 보약이라는 사실은 [상식]이잖아?!
야만인들의 세상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인 시선으로 주술사 파이라를 바라보았다·
지금 [야만인 유니버스]를 수호할 수 있는 영웅은 주술사 파이라 뿐이다!
“하! [생명의 비약]을 무시하다니· 무식해도 저런 일자무식이 따로 없군!”
“오오!”
탕!
파이라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북부의 신비가 주술사의 의지에 화답하듯 솟구쳤다 사라졌다·
마법이란 자신의 의지를 신비에게 전달하는 과정·
신비를 다루는 자는 의지를 전달하는데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파이라가 확고한 믿음을 품자 주변의 야만인들도 파이라의 생각에 감화된 듯 결연한 눈빛을 빛냈다·
“들어라! 이 무식한 제국인아! 자고로 심장이란 생명의 그릇! 생명의 상징! 생명의 비약은 그 그릇에 고인 생명력으로 만든 약이니! 어찌 효과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옳다!”
“도끼를 가져와! 저 하늘쟁이의 가슴팍을 쪼개고 심장을 끄집어내자!”
파이라의 의지에 감화된 북부인들이 참으로 야만인스러운 발언을 마구 쏟아냈다·
이안은 그런 파이라를 보며 살짝 놀랐다·
마법은 발전된 학문이나 주술은 신앙과 마법 사이의 어중간한 무언가다· 이는 수도사 이실라가 몸소 보여준 사실·
마법이 주술에 비해 신비를 다루기 편하다· 이건 팩트다·
솔직히 주술사 별 거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파이라에게서 느껴지는 의지는 꽤나 만만치 않았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하지만 이안 역시 경범죄로 단련된 능숙한 사기꾼이다·
뻔뻔하기로는 이미 프로의 레벨!
“한 가지만 물어보죠· 어째서 심장이 생명의 그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 모르시는구나· 그럼 제가 대신 설명해도 괜찮죠?”
이안의 도발에 파이라는 냉큼 소리쳤다·
이안에게 조금도 템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심장은 피를 만들어내는 신성한 장기! 당연히 생명의 그릇이 아니더냐!”
“음· 사실 피는 뼈에서 만들어지긴 합니다만···”
“???”
파이라는 순간 눈을 찌푸렸다·
피가 뼈에서 만들어진다고? 무슨 그딴 헛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이는 거지?
심장이 피를 뿜어낸다는 건 상식 아닌가!
당연히 심장에서 피가 만들어지지!
“일단은 대충 심장에서 만들어진다 치고요· 북부인들은 그렇게 생겨 먹었나보죠· 뭐·”
“그렇게 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씁· 이과생 자존심 긁지 마세요·”
전생에 흔한 이과생 중 한 명이던 이안은 비 논리적이고 비 과학적인 사실을 보면 반박을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이안은 의대생도 아니었고 수학과를 희망하던 숫자 괴인 중 하나였지만 여느 이과생들처럼 ‘과학적’ 이 한 마디에 과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으윽··· 전자파 차단 스티커는··· 무용지물이다···
제발··· 식물한테 칭찬하고··· 뿌듯한 표정 짓지 마···
하지만 이세계 마법사가 된 이후로 집착을 많이 내려놓았다·
[피는 심장에서 만들어진다] 라는 소리를 들어도 반박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심장을 먹으면 건강해진다고 했죠?”
“그렇다!”
“그럼 눈을 먹으면 눈이 좋아지겠네요?”
“···?”
파이라가 입을 헤 벌렸다·
이안의 논리가 심히 개초딩스러웠기 때문이다!
“팔을 먹으면 팔이 튼튼해지고 다리를 먹으면 다리가 튼튼해지고···”
“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파이라는 이안의 논리를 ‘헛소리’로 일축했다·
눈을 먹으면 눈이 좋아진다·
이건 대한민국에서도 ‘물고기 눈은 눈 건강에 좋다~’라는 식으로 알려진 유사 과학이었다·
놀랍게도 이것의 출처는 한의학이었는데 동기상구의 원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북부인들이 한의학을 알 리가 없으니 영혼과 신비의 관점에서 접근했지만·
과학적으로 볼 땐 근거 없는 헛소리다·
물고기 눈을 백날천날 먹어봐야 시력 개선에는 딱히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도 잘 아네요· 헛소리죠· 심장을 처먹으면 몸이 건강해진다? 그게 되면 병원은 왜 있고 의사는 왜 있습니까? 아프면 옆 사람 가슴 뚜껑 따고 뜨-끈한 심장 한 그릇 하면 되지·”
“···”
“제국에서는 당신이 하는 짓을 ‘야만인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효과도 입증되지 않은 의술을 무분별하게 펼쳐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해내는 행동 말입니다!”
오베론이 이안의 어깨 위로 날아와 앉았다·
그 모습에 북부인들이 깜짝 놀랐다·
“까마귀다!”
“흐룬달님의 전령이야!”
이안은 잘 몰랐지만 북부인들은 까마귀를 신성한 새라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 할 뿐 신성한 능력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베론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까마귀는 머리가 좋고 유용하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안다면 더더욱 유용하다·
“까악! 헛소리다! 헛소리!”
오베론이 사람 말로 ‘헛소리’를 외치자 북부인들은 더더욱 깜짝 놀랐다·
까마귀에게 사람 말을 가르치다니···
저 주술사 실력이 대단한가보다!
이안이 소리쳤다·
“보십쇼! 지나가던 제국 까마귀도 헛소리라는 걸 알지 않습니까!”
“까악! 헛소리!”
“··· 까마귀가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심장 효과 없는 거 아니야?”
북부인들은 이안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파이라는 패닉에 빠졌다·
그는 직관과 암시로 신비와 접촉하는 주술사다·
지금 이 상황에서 흐룬달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분께서 싸움을 그만 두고 물러나라는 경고를 보내고 계신 건 아닐까?
‘··· 아니· 그럴 리 없어·’
파이라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북부의 신께서 제국인 애송이의 편을 들어주실 리가 없다·
파이라는 주술사로서의 직감을 무시했다·
신비를 다루는 자로서 절대 범해선 안 될 금기를 범한 것이다·
신비는 언제나 인간에게 신호를 보낸다·
단지 인간이 그 신호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신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국인이···! 감히 나 파이라 앞에서 주술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냐!”
벼락같은 외침과 동시에 파이라가 아르카나 카드를 뽑았다·
[탑] 카드였다·
“보아라! 애송이! 흐룬달께서 네놈의 몰락을 원하신다!”
파이라의 주위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가 넘실댔다·
북부인들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주술사가 신비를 다루는 모습을 경외감을 담아 올려다보았다·
“오오!”
“흐룬달이시여!”
바로 그 순간·
이안은 넘실대는 신비 사이로 기괴하고 끔찍한 목소리를 들었다·
천 개의 망치와 모루가 불협화음을 내는 듯한 경이로운 소음이었다·
[나를··· 부르는 녀석이 누구냐···?]
‘시발·’
이안은 코피를 한 방울 흘렸다·
파이라가 아르카나 카드로 소환한 신비의 정체를 이안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절대로 인간에게 우호적인 신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술사· 지금 부르는 신비 당장 돌려보내요·”
“뭐?”
이안이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말했다·
“우리가 감당할 신비가 아니니까··· 당장 돌려보내라고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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