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6
일단 기세를 탄 마법사는 막을 수 없다·
이안이 보여준 퍼포먼스· 그리고 파이라의 태도·
두 가지 간단한 사실이 합쳐지자 이안은 붉은 곰 부족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발언권을 획득했다·
“흐룬달의 눈물을 찾는다라···”
“그렇습니다· 라그나르·”
이안은 파이라의 계획을 라그나르에게 전달했다·
파이라는 라그나르가 미끼를 물것이라 확신했고 어느 정도는 이안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듯 했다·
“아버지와 상의해보지· 그때까지 너희도 계획을 세워두어라·”
잠깐 짬이 났다·
이안은 능숙하게 동료들과 이야기를 짜맞췄다·
마법사로 굴러먹으면서 잔경험이 꽤 많이 쌓인 이안이다·
높으신 분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맞춰야 할지 정도는 눈 감고도 짜낼 수 있었다·
“벨렌카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키라는 평소대로 날 서포트 해줘·”
“알겠다·”
“물론이야· 이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의 타카리온·
“타카리온·”
이안은 타카리온을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주변이 워낙 조용해서 작은 목소리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당신을 흐룬달의 귀한 손님으로 만들었고 당신과 함께 하면 반드시 흐룬달의 눈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뒀습니다·”
“···”
타카리온은 숨을 후욱 후욱 들이쉬었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광신적인 수도사들과 달리 그냥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방구석 작가다·
지금까지 겪은 일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데 여기서 이안의 ‘마법사 행동’에 어울리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타카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천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세요· 영산의 출입을 흐룬달께 받았고 그분이 영약으로 당신을 인도할 거라고 말하면 됩니다·”
“하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잖아·”
이안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죠·”
오로지 신비학자들만 칠 수 있는 종류의 사기였다·
주술사와 마법사가 입을 모아서 타카리온을 띄워주는데 아무리 족장이라도 멋대로 손쓸 수 없다·
“나 나는···”
타카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 못 하겠어!”
“···”
“···”
벨렌카는 피곤하게 얼굴을 쓸어내렸고 키라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타카리온을 쳐다봤다·
수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존경 받는 복음서 작가였지만·
맨몸으로 북부에 내던져진 지금 타카리온은 그저 겁 많은 젊은 청년에 불과했다·
“그냥 난 여기 있을게! 너희들이 흐룬달의 눈물인지 뭔지를 가져 오면 되는 거잖아!”
“그게 되겠습니까? 수틀리면 도망쳐야 하는데 댁이 여기 남아 있으면 뭐 어쩌자는 겁니까?”
이안은 타카리온을 달래듯 말했다·
“자자· [황금 손가락의 타카리온]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성 마르쿠스의 용기에 대해서 써냈잖아요·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성 마르쿠스처럼 멋지게 이교도들에게 호통을 쳐보자고요!”
“···”
타카리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위대한 성 마르쿠스는 겁먹고 떠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이교도들에게 하늘의 이름으로 쩌렁쩌렁한 호통을 치던 성인이다·
타카리온은 성 마르쿠스의 용기에 대해 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 나는···”
타카리온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 마르쿠스님이 아니야··· 나한테 그런 용기는 없어···!”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벨렌카가 타카리온을 노려보며 한 마디 내뱉었다·
“저 따위 한심한 인간이 쓴 복음서를 수많은 제국인이 읽고 있는 건가? 정말이지 끔찍하군·”
“벨렌카···”
키라는 벨렌카의 손을 꼭 잡았다·
내버려뒀다간 타카리온에게 물리적으로 정정당당한 행동을 가르쳐줄 것만 같았다·
“여기는 이안한테 맡겨보자· 정 안 되겠으면 우리끼리 떠나면 되지·”
“··· 마음에 안 들어·”
벨렌카는 이안이 타카리온을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러고도 남았다·
저 멀리 제국에서 타카리온을 찾으러 이 차가운 북부까지 쫓아온 이안이다·
그런데 타카리온은··· 자꾸자꾸 유기 마려운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안은 타카리온을 응시하며 숨을 골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유기하고 떠나버리고 싶지만··· 지금까지 해놓은 수고가 아까웠다·
이젠 오기가 생길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타카리온을 제국으로 끌고 가리라·
“용기가 없지만 용기를 내볼 수는 있는 거 아닙니까? 당신은 신도들에게 성인의 말씀을 전해주는 수도사잖아요· 지금까지 앵무새처럼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떠들기만 한 겁니까? 정말로 성 마르쿠스님의 행동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나고요!”
이안의 목소리가 타카리온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타카리온은 서러웠다·
이안의 지적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 서러웠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기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딴 거 알 게 뭔데! 성 마르쿠스의 업적은 내가 다 지어낸 거야! 손가락에서 빛을 뿜어 악마를 무찌르는 것도! 이교도 앞에서 호통을 치는 장면도! 전부! 내가 상상해서 써낸 내용이라고!”
“···”
“나는··· 그냥 헛소리나 지껄이는 광인일 뿐이야··· 사제들의 말이 전부 맞아· 내 복음서는 읽을 가치가 없어···”
타카리온은 무릎을 털썩 꿇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우연히 수도사에게 거둬져 우연히 글쓰기의 재능을 뽐내던 타카리온이다·
막연히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지만 타카리온은 정말로 존경 받는 사람이 되기엔 지혜도 용기도 부족했다·
복음서의 성 마르쿠스는 어떤 위협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황금같은 자태로 악을 멸한다·
그러나 타카리온은 성 마르쿠스가 아니다·
그는 배 나온 찌질이 작가일 뿐이었다·
그 순간 이안이 지팡이로 타카리온의 머리를 후려쳤다·
“갈(喝)!”
“꾸웩!”
타카리온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번에는 아파서였다·
이안이 타카리온의 머리를 존나 쎄게 때린 것이다!
“듣자듣자하니까 아주 3절 4절까지 지껄이지! 타카리온!”
“이 이안?!”
“책이 잘 팔리니까 아주 배가 처 불렀어! 너는! 그걸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명작병이야! 명작병!”
“···?”
무슨 병?
타카리온은 이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열심히 쓴 글이 안 읽혀서 온몸 비틀고 있는 수많은 작가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뭐 뭐가 미안한데?!”
이안은 다시 한 번 타카리온의 머리를 내려쳤다·
“꾸웩!”
타카리온은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을 굴렀다·
이안이 소리쳤다·
“네가 쓴 [성 마르쿠스 복음서]에는 힘이 있다! 타카리온! 절망에 빠진 자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두려움에 빠진 자에게 다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네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거라고! 타카리온!”
“하 하지만···! 그건 거짓말···!”
“그딴 건 상관없어! 타카리온! [성 마르쿠스 복음서]의 마르쿠스는 네 마음속에 분명 존재한다! 존재하니까 네가 꺼내 쓸 수 있지!”
“···!”
타카리온은 번개에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안의 힘이 담긴 목소리는 타카리온의 영혼 깊은 곳의 닫힌 문을 활짝 열었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타카리온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타카리온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슈퍼 히어로가 나타나 그를 구원해주기를!
[성 마르쿠스 복음서]의 마르쿠스는 그런 타카리온의 염원이 담긴 캐릭터다·
비록 타카리온이 지어낸 이야기로 가득한 복음서지만···
복음서에 담은 소망만큼은 너무나도 진실했다·
“후· 됐습니다· 남고 싶으면 남으세요· 성 마르쿠스 복음서의 작가는 순교했다고 전해두죠· 그 편이 신도들한테도 좋을 테니까·”
“아 아니야···!”
타카리온이 벌떡 일어섰다·
“나도! 나도 데려가줘! 이안!”
이안은 고개만 슬쩍 돌려서 말했다·
“왜요· 따뜻한 털가죽이나 덮고 뒹굴대고 있죠? 그냥·”
타카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마르쿠스 복음서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마르쿠스님은 분명 내 안에 계셔· 그분이 날 보셨다면 분명 호통을 치셨을 거야!”
타카리온이 소리쳤다·
“바보처럼 굴지 말고! 나아가라고!”
이안은 피식 웃으며 지팡이로 타카리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야 좀 수도사같네요· 타카리온·”
“··· 이안·”
“그 믿음 잃지 마시죠·”
#
이안 일행은 붉은 곰 부족의 족장을 만났다·
라그나르 파이라· 거기에 시그르까지 함께 하는 자리였다·
“··· 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파이라가 엄숙한 목소리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그는 족장과 라그나르 앞에서 손가락이 잘린 손을 흔들었다·
“위대하신 흐룬달께서 제게 신비로운 그림으로 속삭이셨습니다· 파이라 너는 생명의 비약을 완성할 수 없을 거라고!”
광기 어린 파이라의 목소리 앞에 족장은 물론 라그나르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저것이 바로 북부의 주술사였다·
“[전사들이 데려온 천신교의 성직자는 나의 손님이니! 나의 사절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거라! 파이라여!]”
파이라가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서리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와 닮았고 카랑카랑하게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와도 닮았다·
“그러나 저는 어리석게도 그분의 뜻을 읽지 못하고 손님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침내 눈을 떴습니다!”
파이라가 이안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까마귀를 가리켰다·
“여길 보십쇼! 이 늠름한 까마귀를! 마법사 이안이 흐룬달님의 사절이라는 증거입니다!”
“까악! 까악!”
이안이 오베론의 목을 살살 긁었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전사들은 작게 감탄했다·
까마귀를 부리는 걸 보니 흐룬달님의 총애를 얻은 주술사겠구나!
이어서 이안이 일어나 소리쳤다·
“저는 위대하신 흐룬달님께 그분의 선물을 찾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여기 있는 타카리온과 함께라면 반드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이안은 품에서 아르카나 카드를 꺼내서 치켜 들었다·
“오오· 저것은···!”
“흐룬달님의 그림이 분명하다!”
이안은 카드를 집어넣으며 타카리온을 쳐다봤다·
이제 수도사의 차례다·
마지막으로 타카리온이 일어나 말했다·
“저 저는··· 성 마르쿠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 마르쿠스?”
“아! 성 마르쿠스가 누군지 모르시겠군요! 성 마르쿠스가 누구냐면 그분은 고대 황금 제국에서 활동하신 성인으로 그분의 이명은···”
쿨럭· 족장이 기침을 했다·
라그나르가 칼같이 타카리온의 말을 끊었다·
“그만! 궁금하지 않다!”
타카리온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오타쿠는 자기가 아는 내용을 떠들 때 제일 행복한 법이다·
“아무튼··· 네· 전 그분께 하늘을 대표하여 북부신을 만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계시···”
족장이 파이라를 가까이 불렀다·
“저 말이 사실이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파이라는 맑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대답했다·
단 한 치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주술사 마법사 그리고 성직자가 입을 모아 한 가지 사실만을 얘기하자·
족장은 파이라의 이야기를 믿어주었다·
“좋다· 영산으로 가라·”
이안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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