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8
드랜하임 제국대학·
과거 에레디스와 헤어질 때 이안은 스승님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언젠가 드랜하임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조금 이르지만··· 미리 가서 기다릴까·’
이안이 드랜하임을 방문하려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로는 스승인 에레디스와의 약속 때문이다· 간만에 스승님의 얼굴도 보고 싶었고 말이다·
두 번째는 이안이 회수한 마법사들 때문이다·
풋내기 화염술사 키라· 강령술 꿈나무 마리아· 그리고··· 잉리언 교수·
잉리언은 아예 드랜하임의 교수였고 키라와 마리아는 대학에서 지식을 얻어야 하는 초보 마법사들이다·
대학에서 할 일이 많을 테니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국 남부의 사정이 생각보다 더 흉흉했다·
‘무슨 흑마법사들이 이렇게 돌아다니냐·’
이안은 정의의 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흑마법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중세의 경찰관이 되어 범죄자를 때려잡을 생각은 없었다·
이안은 신비를 탐구하고 보물을 수집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벌써 [황금률 연구회]라는 흑마법사 집단과 몇 번 충돌했으니·
귀찮은 일이 터지기 전에 제국 대학에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거기서 스승님도 만나고 마법 공부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흑마법사들도 잠잠해지리라·
“그런가· 제국대학인가·”
르샤흐 경은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간만에 만난 똑똑한 청년이다·
마법사로서의 능력도 뛰어나고 흑마법사를 상대로도 잘 싸우는 게 르샤흐 경을 도와준다면 분명 큰일을 해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안은 대놓고 제국 대학으로 도망치겠다고 선언했다·
르샤흐 경은 아쉽지만 손가락이나 빨아야 했다·
마법사가 제멋대로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엄청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자네의 활약은 교황님께 꼭 보고하겠네·”
“그래주시면 좋죠·”
천신교 세력과 친하게 지내두면 이안 입장에서는 무조건 좋았다·
제국을 지탱하는 커다란 두 기둥 중 하나가 바로 종교인데· 르샤흐 경은 종교의 최고 지도자에게 이안의 이름을 알려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아· 혹시나 호박 원석을 처리하고 싶다면 내 추천장을 써주겠네·”
“추천장이요?”
교황의 기사답게 르샤흐 경의 추천장은 굉장히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교단의 입김이 닿는 상회를 찾아가면 즉시 VVIP 대접을 받는 수준!
르샤흐 경은 즉시 이안을 위한 추천장을 작성해주었다·
대학물을 먹은 기사답게 르샤흐 경은 직접 양피지에 글자를 적었다·
까막눈이 대부분인 중세 기사 평균을 생각하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베르톨트의 뒤를 계속 쫓겠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일이다· 르샤흐 경은 처음부터 흑마법사를 사냥하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베르톨트와 같은 거물을 발견했는데 못 본 척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기왕이면 놈의 목을 베어버리면 좋겠군요·”
이안의 말에 르샤흐 경이 웃었다·
이안은 귀찮은 짐을 덜어서 좋고 르샤흐 경은 공을 세워서 좋다·
목 잘린 베르톨트 놈만 지옥에서 광광 울겠지만·
“하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지혜로운 마법사 이안·”
“태양과 달이 앞길을 비추기를· 르샤흐 경·”
르샤흐 경은 이안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길을 떠났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오전이었다·
#
이안은 빈센츠 남작의 영지로 르샤흐 경은 베르톨트의 뒤를 쫓아 움직였다·
그렇다면 베르톨트는 뭘 하고 있을까?
천법사 베르톨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빤스런을 쳤다·
‘대체 뭐야? 그 자식은?!’
만들어놓은 언데드를 흩뿌리고 몸만 달랑 빼내서 도주하는 베르톨트·
베르톨트가 추하고 더럽게 도망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안 때문이었다·
이안은 마법으로 일격에 베르톨트의 언데드를 해치웠다·
그래서 이안은 ‘베르톨트는 사실 허졉~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버렸다·
그 생각은 베르톨트에게 정확히 반대로 적용됐다·
‘··· 이 새끼 존나 쎈 거 아니야?!’
베르톨트는 이안이 뭐하는 마법사인지 전혀 모른다·
이안이라는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베르톨트다·
그런데 이안은 갑자기 맨손으로 번개를 소환하더니 베르톨트의 언데드를 튀김으로 만들어버렸다·
혼이 빠지게 깜짝 놀란 건 당연한 일이다·
베르톨트는 이안이 어떤 마법으로 그런 재주를 부렸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마법 천재!
‘일단 튀자!’
그래서 베르톨트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빤스런을 쳤다·
르샤흐 경과 이안이 동시에 덤벼들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베르톨트는 회의에서 부여받은 임무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인적 드문 산 속에 은신해야 했다·
“내 신세 좀 봐·”
베르톨트는 건량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투덜거렸다·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를 굳이 따지자면 중간에 마리아에게 작업을 걸었을 때부터였다·
그냥 얌전히 임무나 수행했다면 이안을 만날 일도 없었다·
회의에 민폐를 끼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 투덜거려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베르톨트는 삽질을 거하게 해버렸다·
베르톨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배낭에서 황동 거울을 꺼냈다·
이 황동 거울은 악마가 선물해준 물건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진 상대와도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황금률 연구회의 흑마법사들은 이 황동 거울로 서로 의견을 나누고는 했다·
“[나는 부름을 원한다·]”
마로니우스 어를 내뱉자 황동 거울이 일렁였다·
거울 너머로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 베르톨트· 여행은 잘 끝났나?]
노인은 베르톨트가 정기 보고를 올리고 있다고 착각했다·
베르톨트는 핼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목적지로 이동하던 도중에··· 르샤흐 경과 이상한 마법사를 만났습니다·”
베르톨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집정관님·”
긴 수염의 노인·
집정관 안티오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더 자세히 말해보게·]
베르톨트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안티오스에게 보고했다·
물론 MSG를 팍팍 뿌려서·
원래 보고의 기본은 내 잘못은 작게 남의 잘못은 크게가 아닌가!
[흐음·]
보고를 끝까지 들은 안티오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상황은 대충 이해가 가는데···
[르샤흐는 그렇다고 치고··· 마법사 이안이라고?]
“네· 집정관님·”
[맨손으로 번개를 만들어 그걸 내리쳤단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
안티오스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베르톨트 이 새끼· 이야기에 MSG를 너무 많이 뿌린 거 아닌가?
원래 전투에서 패배하면 상대를 칭송해주는 것이 국룰이었다·
상대의 뛰어난 무용을 칭찬하고 싶어서··· 가 아니라 내 잘못을 덮기 위함이었다·
내가 븅신이라 패배했다기 보다는 상대가 부캐라서 졌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괜히 왜군 장수들이 이순신을 괴물로 묘사한 게 아니다·
‘아니 그놈이 입에서 번개숨결을 뿜었다니까요!’정도는 말해줘야 다른 사람들도 ‘아! 정말 괴물같은 놈이었구나!’라고 인정해주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안티오스는 베르톨트가 ‘마법사 이안’을 괴물처럼 묘사해도 그러려니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정도가 좀 과한 거 아닌가?
[신비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마법을 썼다고?]
··· 그렇게 보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대기술사도 맨손으로 번개를 만지지는 못해· 신비의 힘을 빌려서 번개를 부를 뿐이야·]
“하지만 이안은 분명···”
[뭘 잘못 본 게 아닌가?]
“아니 정말로···!”
베르톨트는 조선시대 돌쇠마냥 ‘지가 똑똑히 봤슈!’를 연신 주장했지만 안티오스는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이안의 마법은 그만큼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실제로 상식을 벗어난 마법이 맞았다·
이안의 마법은 마로니우스 체계와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하지만 베르톨트가 일관된 피해자 진술을 계속하자 안티오스도 ‘어쩌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베르톨트가 무슨 다섯 살짜리 애도 아닌데· 아예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겠는가?
[알겠네· 이미 위치가 노출됐으니 어쩔 수 없군· 추격자를 잘 피하면서 숨어있게·]
베르톨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작물 속 악의 조직들은 실패자를 용서하지 않는 클리셰가 있었다· 실패자를 식인 대게가 들끓는 강으로 가라앉힌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황금률 연구회는 의외로 실패에 빡빡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조직의 규모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기 어려운데 저런 사소한 실패까지 모조리 처벌하려면 조직의 뿌리가 휘청거린다·
시공술사 회의와 마찬가지로 음지의 조직인 황금률 연구회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악의 조직의 가장 커다란 적은 다름 아닌 처참한 중세의 경제 수준이었다···
그 증거로 안티오스의 거처는 저택이 아닌 어느 산 속 동굴이었다·
[집정관]이라는 간지나는 호칭을 달고 있지만 살고 있는 집은 동굴이다·
안티오스는 ‘조직원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산에 산다고 주장하지만 그냥 발붙일 영지가 없어서 동굴에 사는 것이다·
“당분간 몸을 사리게· 이쪽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연락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티오스는 황동 거울을 자루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로 짠 돗자리 위로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으러렁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별 일 아니오· 신경 끄시오· 흑룡·”
동굴 안에는 안티오스만 머물고 있던 게 아니었다·
거대한 몸체가 짙은 어둠 너머에서 꿈틀대듯 움직인다·
세로로 갈라진 샛노란 동공이 안티오스를 응시한다·
[오호· 신경을 끄라고? 참으로 의심스럽구나· 너희 족속들이 내 뒤통수를 노리지 않을까 말이야···]
낼름거리는 혓바닥· 인간의 머리보다 커다란 눈동자·
‘흑룡 프레디우스·’
안티오스는 그 혐오스러운 생물을 경멸어린 눈길로 쳐다봤다·
흑룡 프레디우스는 황금률 연구회와 모종의 계약을 맺고 있다·
황금률 연구회가 보물을 제공하면 프레디우스는 무력을 빌려준다는 계약이었다·
하지만 이 계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프레디우스의 성격 때문이었다·
‘탐욕에 미친 드래곤···!’
프레디우스는 역겨울 정도로 탐욕스러운 존재였다·
모든 드래곤은 사악하고 탐욕스럽지만 프레디우스는 그 정도가 남달랐다·
[이런 상황은 계약에 없었을 텐데!]
흑룡이 거대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침에 젖은 이빨이 안티오스를 찢어버릴 듯 번뜩인다·
그 뿐만이 아니다·
프레디우스의 턱주가리에는 거대한 창이 꽂혀 있었다·
인간에게 당한 상처가 아니다·
프레디우스 본인이 자기 턱에 쑤셔 박은 창이었다·
저 창은 프레디우스가 가장 아끼는 보물로 너무나 아끼고 집착하는 나머지 아예 피어싱마냥 턱주가리를 관통시켜 몸에 연결해놓은 것이다·
덕분에 구멍 난 턱을 타고 24시간 침이 뚝뚝 떨어졌지만 프레디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보물을 훔쳐가게 둘 바엔 차라리 침 흘리는 짐승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사과의 의미로 호박석 한 수레를 주겠소·”
[그걸로는 부족해! 두 수레를 내놓거라!]
“두 수레· 두 수레를 드리지·”
프레디우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히죽 웃었다·
꿰뚫린 창을 타고 침이 뚝뚝 떨어지자 안티오스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드래곤과 계약을 맺은 건 안티오스 본인이지만 저 미친 드래곤은 안티오스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놈은 언젠가 제거해야 한다·’
때가 되면 황금률 연구회는 흑룡을 없애버릴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리라·
[계약을 잊지 말거라· 늙은 인간·]
“알고 있소· 조만간 습격할 영지를 알려주겠소·”
[그냥 영지가 아니다! 귀한 보물이 넘쳐나는 땅이다! 시시한 땅을 알려줬다간 네놈을 뼈 째 씹어 먹으리·]
“··· 알고 있소· 흑룡·”
안티오스는 드래곤을 풀어놓을만한 땅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떠올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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