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0
그멜린 백작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마법사들이 실력 행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빈센츠 남작령이 무슨 꼬라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았다면 훨씬 일찍 출발했겠지만·
열악하기 짝이 없는 중세의 정보통은 이웃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남작 대리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카렌네가 사람들을 입막음 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그멜린 백작은 빈센츠 남작령의 소식을 듣자마자 수염이 빠지도록 서둘러 달려왔다·
‘마법사라니! 그런 골치 아픈!’
마법사를 두려워하는 건 평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귀족들 역시 마법사를 꺼림칙하고 두려운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분명 유용하지만 괴팍해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존재!
그멜린 백작이 마법사의 소식을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백작님! 빈센츠 남작령에서 수상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수상한 소문이라니?’
‘어느 성난 마법사가 성벽을 향해 바윗돌을 날려 보냈다는···’
‘???’
그멜린 백작은 테오에게서 온 편지가 있나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상식적으로 영지에서 무슨 일이 터졌다면 백작에게 연락을 보냈을 테니까·
하지만 빈센츠 남작령으로부터 온 편지는 한 통도 없었다·
그것은 둘 중 하나였다·
마법사가 항의를 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퍼지고 있거나···
아니면 테오 그 녀석이 사고를 쳐놓고 모르는 척을 하고 있거나!
‘설마 그 바보같은 녀석이?’
그멜린 백작은 그렇게 추측했다·
테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법사와 시비가 붙었고 그 결과 마법사의 항의를 받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보나마나 젊고 어리석은 귀족이 범하기 쉬운 실수일 테고!
백작은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로 테오가 용서 못할 잘못을 저질렀다면 전쟁 비슷한 게 터지고도 남았을 테니까·
사과를 하고 선물을 주면 용서받을만한 실수였을 테니 마법사들도 무력시위에서 멈추지 않았겠나?
하지만 시간을 낭비해서 좋을 건 없었기에 백작은 즉시 여정을 준비했다·
‘말을 준비해라! 내가 직접 테오에게 가보겠다!’
‘옛! 각하!’
백작의 깃발을 든 기수와 충성스러운 기사 다섯 명이 백작의 여정에 동참했다·
그멜린 백작은 무사히 빈센츠 남작령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게 대체 무슨 난리냐!”
난장판이 된 남작령을 보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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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게 마법사 부르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백작은 즉시 잉리언을 만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테오가··· 내 아들이··· 납치를 당했다고?”
백작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테오가 첩으로 삼은 여자가 사실은 변장한 흑마법사였고··· 심지어 테오를 납치해서 도망쳐버렸다니!
“그렇게 됐습니다· 백작·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잉리언은 나름대로 상심한 백작을 위로했다·
그러나 마법사 특유의 싸가지 없는 말투가 거슬렸는지 백작의 기사들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유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평소에는 잘도 꺼드럭대더니 이번에는 눈 뜨고 도련님을 빼앗겨? 그러고도 네놈들이 마법사인가!”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안은 기가 막혔다·
주둥이만 나불대는 건 쉽지·
적어도 악마와 흑마법사를 내쫓아버린 이안이 들을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마침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던(···) 크리서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눈치·
이안은 크리서스와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준비됐어? 크?
아아· 물론이지· 이·
“지금 남작 대리 말하는 거 맞죠? 근데 도련님 소릴 들을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애초에 남작 대리가 흑마법사한테 놀아난 걸 가지고 왜 저희한테 따지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안과 크리서스는 기사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렇게 도련님이 소중하다면 백작의 성에 감금해서 키우지 뭐 하러 밖에 내놨냐부터·
흑마법사들이 함정을 판 걸 가지고 왜 우리한테 따지냐 등등·
“그럼 목숨을 걸고 쫓아갔어야지!”
“??? 우리가요? 왜요?”
이안은 기사의 사고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뇌가 기사도에 절여졌나·
이안이 무슨 사가(saga)의 주인공도 아니고· 납치당한 귀족을 구하기 위해 악의 소굴로 쳐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우린 남작 대리의 신하가 아닐뿐더러 손님도 아닙니다·”
“??? 성에 머물고 있는데 손님이 아니야?”
이안은 무식한 기사와의 대화에 그만 질려버렸다···
아무리 기사가 칼싸움만 잘 하면 장땡이라고 해도 저건 좀 심하지 않나·
“그만· 경들· 그만 하시오·”
“이안· 크리서스· 자네들도 그만 하게나·”
잉리언과 백작이 동시에 말했다·
저들이 듣기에도 기사의 말은 별 가치가 없었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대책을 생각해봐야지·”
백작이 말했다·
의외로 합리적인 반응에 이안은 살짝 놀랐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놈들의 뒤를 쫓는다·”
이곳은 현대처럼 전산망과 도로가 발달한 사회가 아니었다·
기초적인 사회 시스템이 겉모습만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는 동네가 바로 중세 판타지 세계였다·
백작의 아들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이걸 해결하려면 아무리 백작이라도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귀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남의 영지의 일에 무관심할뿐더러 역으로 백작의 약점을 잡아 이용하려는 불순한 놈들이 나타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흑마법사들이 어디로 도망쳤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드넓은 제국의 벽지를 누비고 다니는 고행길이 훤히 열려버렸다는 것·
참으로 [낭만]이 넘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행운을 비오· 백작·”
잉리언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백작은 그냥 순수한 피해자였다·
나쁜 건 흑마법사들이지 백작이 아니었다·
잉리언은 백작에게 일종의 내적 동질감을 느꼈다·
잉리언 역시 흑마법사의 계략에 빠져 거하게 엿을 먹었으니까·
“나의 아들을 구할 용감한 자는 어디 없는가!”
백작은 흑마법사를 수색할 자들을 뽑았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오오! 헤르먼드 경!”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전공에 목마른 기사들이 앞 다투어 나섰다·
사악한 마법사에게 납치당한 주군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의로운 기사들이라···
‘멋지긴 하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나도 따라가 볼까?’
이안은 잠깐 고민했다·
기사들과 함께한다면 위험도 많이 덜어낼 수 있고· 백작의 아들을 구해낸다면 받아낼 보상이 제법 짭짤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보상은 얻겠지만 역시나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슨 업적에 미친 전투광도 아니고·
이안은 마법사이지 학살자가 아니다·
전투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이안도 나름 할 일이 있었다·
동료들과 잉리언을 대학에 데려다주어야 했고 공부를 하며 휴식을 취하는 것도 괜찮았다·
그런데 의외로 헤르타가 백작을 돕겠다고 나섰다·
“백작님· 저는 보잘 것 없는 마법사이지만 기사들의 여정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오! 환영하오! 마법사!”
이안은 헤르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돈이 궁하나?
헤르타가 물질적 보상 때문에 백작을 돕는 줄 알았던 이안은 헤르타와 대화를 해보고 나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테오가 납치당한 이유는··· 제가 카렌네를 놓쳤기 때문이지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이안은 헤르타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마법사는 유능하지만 본인 전공 범위 내에서만 유능했다·
국어국문과 교수가 전기 공학에 능하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헤르타는 대기술사고 카렌네는 변형술사다· 서로의 마법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헤르타가 책임감을 느낄만한 일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는 위험한 존재에요· 이안· 싹을 틔웠을 때 뽑지 않으면 순식간에 번져나갈 거예요·”
“··· 그건 동의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안은 더 이상 헤르타를 말리지 않았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아뇨 아뇨! 이안의 도움은 충분히 받았어요!”
헤르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후배님한테 못난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지요·”
“헤르타 누나···”
“흑마법사 추격은 저한테 맡기세요· 이안은 교수님을 모시고 대학으로 올라가세요·”
결국 헤르타는 흑마법사 추격을 위해 기사들과 합류했다·
“나도 따라간다·”
헤르타가 합류하니 안톤도 자동으로 합류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 해주었다·
“··· 나도 같이 가지·”
“카를도요?”
“너희한테는 빚진 게 있으니·”
카를까지 원정에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크리서스까지 고민 끝에 마법사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제 냉기술이라도 쓸모가 있다면···”
“어머· 무슨 말이에요· 크리서스· 크리서스의 마법은 멋있답니다·”
“헤르타 선배님···!”
결국 이안을 제외한 네 명의 마법사들은 [잉리언 구출 팀]에서 [테오 그멜린 구출 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프로페셔널한 중세의 전문가 집단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원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멜린 백작이 감동의 눈물을 쫙쫙 뽑아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법사가 넷이라니! 참으로 든든하도다!”
백작의 기사 넷과 마법사 넷·
총 여덟 명의 추격팀은 여행 준비가 끝나자마자 빈센츠 남작령을 빠져나갔다·
“이안! 저흰 가볼게요!”
이안은 마법사들을 끝까지 배웅해줬다·
“혹시 길에서 르샤흐 경이라는 분을 만나면 마법사 이안이 안부를 묻는다고 전해주시겠어요?”
“르샤흐 경이요?”
“교황의 기사인데· 여러모로 괜찮은 분이거든요·”
르샤흐 경은 전문적인 흑마법사 사냥꾼이다·
그렇지 않아도 천법사 베르톨트의 뒤를 쫓고 있으니 마주친다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네! 그럴게요!”
헤르타가 몸을 돌렸다·
과묵한 카를은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한 마디 한 게 전부였고 안톤도 ‘나중에 또 보자 꼬마야’하고 성의 없는 작별인사를 던졌다·
물론 이안은 큰 소리로 ‘헤르타 누나를 잘 챙겨주세요~!’라고 소리쳐서 안톤을 새빨갛게 만들었지만·
“나도 가볼게· 이안·”
“몸조심하세요· 선배·”
크리서스가 제일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재능 있는 냉기술사고 마법 실력은 점점 더 올라갈 것이다·
“이안·”
“네?”
“··· 워·”
“뭐라고요?”
크리서스는 혼자서 몸을 배배 꼬더니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빼액 소리쳤다·
“고맙다구! 내 마법을 도와줘서 고맙고! 빅터 선배님을 잠재워줘서 고마워!”
그녀는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선배인데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구! 다음에 만날 때는 진짜! 잘 해줄 테니까···!”
이안은 그런 크리서스가 조금 신기했다·
크리서스는 자존심이 강한 편이라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한 구석이 있었다·
“선배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이안이 그렇게 말하자 크리서스는 괴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으윽···! 쪽팔렷! 이안! 이거 가지고 나 놀리면···!”
“감사합니다·”
“··· 응?”
크리서스가 눈을 끔뻑 떴다·
“안 놀리는 거야?”
“아니· 절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재수 없는 천재 후배·”
이안과 크리서스는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고마웠고 다음에 또 보자!”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배·”
이안은 원정대가 숲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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