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 34
디히트리는 꿈을 꿨다·
찬란한 태양 아래 그는 구름 위 궁전에서 눈을 떴다· 평소 성서를 밥 먹듯이 읽던 디히트리는 이곳이 천신교의 사후세계 ‘천국’임을 눈치 챘다·
‘그렇군· 나는 죽은 건가·’
뿌듯하다·
역시 깨끗한 마음으로 신을 모신 보람이 있었다·
만티코어를 잡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또 형제들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천국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겠나?
이제 나팔 부는 천사들을 기다리면 되는데···
그때 누군가가 디히트리의 눈앞에 나타났다·
‘여인?’
눈부시다 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미인이다· 말 그대로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 압도적인 미(美)에 디히트리는 본능처럼 무릎을 꿇었다·
“나의 주인이시여·”
여인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디히트리는 정답을 맞혔다·
그녀는 천신교의 주인이었다·
“직접 보게 되어 반갑군요· 디히트리· 하지만 이곳은 아직 당신이 올 곳이 아니랍니다·”
“··· 네?”
여신의 말에 디히트리는 당황했다·
“주인님께서 절 부르지 않았습니까?”
“뭐래요· 만티코어 발톱에 배때지 구멍 나서 죽은 게 누군데· 그럼 내가 만티코어를 보내서 당신을 죽였단 말이에요?”
“???”
디히트리는 여신의 말을 100% 이해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이해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꿈결에 들은 듯 오랜 기억을 떠올린 듯 여신의 언어는 디히트리에게 온전히 와 닿지 못했다·
그녀는 우주 최대의 신비 그 자체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히트리는 짐짓 부적절하기까지 들리는 껄렁한 말투를 적절히 필터링해서 기억했다·
[아(我)는 그대를 거둔 적이 없노라]
[하지만 나의 주인이시여!]
[아직 그대의 시간이 닿지 않았노라· 나의 아이야· 네게는 아직 할 일이 많다·]
[할 일이라뇨?]
[나아가 나의 뜻을 널리 알리거라· 약자를 돕고 선행을 베풀거라· 그리고···]
여신이 초월적으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사도 이안을 힘껏 돕거라·]
[이안···? 마법사 이안 말씀입니까?]
[그래· 그것이 너의 여신이 바라는 바일지니·]
디히트리의 의식은 서서히 침잠했다·
···
그가 눈을 떴을 때·
“깨 깨어났어!”
“형제여! 정신이 드는가!”
수많은 기사단의 형제들이 그를 둘러싸고 기도와 오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땀으로 범벅이 된 젊은 마법사가 보람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다 살아나니까 기분이 어때요?”
‘이안···!’
디히트리는 이안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위대하신 하늘의 주인께서 마법사 이안을 보내어 자신을 살린 것이구나···!
덥석·
디히트리는 이안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난데없이 남자한테 손을 붙들린 이안은 기겁하며 놀랐다·
“아니 이런 지옥 갈 짓을···!”
하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디히트리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런 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이안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안이 행사한 기적을 목격한 뒤였으니까·
“마법사 이안! 그대가! 위대한 그분의 명으로 날 살렸군!”
이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뭐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이안이 신성술을 사용할 수 있던 이유는 천신교 여신이 힘을 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맞다고 했다·
“네· 그분이 그러더군요· 디히트리는 할 일이 많아서 살려야 한다고·”
“!!!”
디히트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안의 말이 여신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 것이다!
실은 이안이 대충 둘러댄 결과물이었지만 디히트리는 절대 믿지 않을 거다·
이건 명명백백한 신의 계시였다·
디히트리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으려 했다· 기껏 집어넣은 내장이 다시 튀어나올까 모두가 뜯어 말려서 겨우 멈춰 세우긴 했지만·
“마법사 이안! 당신은 신께서 보낸 사도입니다!”
“··· 네?”
“미천한 그분의 종이 사도님을 뵙습니다!”
이안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디히트리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난데없이 신의 사도라니?
이안이 놀라운 기적을 선보였단 사실은 모두가 알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이안을 신의 사도라 부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원래 신성술이 그랬다· 아니 마법 자체가 그랬다·
신비가 많은 힘을 빌려주면 뛰어난 결과물이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마법이고 신성술이다·
이안의 신성술은 분명 뛰어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치료 받는 대상이 디히트리여서일 가능성이 컸다·
신도 눈치는 있어서 자기 신도를 치료하는데 더 열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안의 신성술과 디히트리의 신앙심이 결합된 결과물에 가까웠다·
대단한 건 맞지만 디히트리처럼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아닌 듯한데···
‘사경을 헤매는 동안 헛것을 봤나보군·’
‘그럴 만하지요· 당분간 신경 써서 돌봐줍시다·’
사정을 이해한 기사단은 대충 디히트리의 눈치를 맞춰줬다·
디히트리는 계속 이안이 신의 사도라는 둥 헛소리를 해댔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도망친 만티코어의 뒤를 쫓는 일이 더 급했다·
“숨을 끊진 못했다고?”
“··· 죄송합니다· 엘더·”
“죄송할 게 뭐 있겠나· 내가 미안하네· 내가 함께 싸웠어야 했는데···”
만티코어는 상처를 입은 채 도주했다· 거대한 괴수가 작정하고 몸을 빼니 도저히 쫓아갈 수 없었다·
“클클클· 그럴 줄 알았다·”
마법사 마니가 아는 척을 했다·
그 모습은 심히 재수가 없었다·
원래 빡칠 때 옆에서 긁는 사람이 제일 얄밉지 않은가·
“마니! 당신이 마법을 부르지 않았다면···”
“이안이 위험했겠지·”
“···”
마니는 단 한 마디로 기사들을 닥치게 했다· 역시 이 시대 최고의 지성다운 모습이었다·
“너무 낙담하지 마라· 이럴 때를 대비해서 독을 바른 무기를 준비한 게 아니더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티코어를 단번에 처단했다면 좋았겠지만 일이 틀어졌으니 플랜 B를 꺼내야 했다·
그리고 마니가 준비한 식물 독의 마법은 만티코어의 체력을 착실하게 갉아먹을 것이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지·”
엘더가 말하자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다 잡은 놈을 놓아주자는 겁니까?”
하지만 이안만큼은 엘더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만티코어와 대화를 하며 소환술 도감의 항목이 생신됐기 때문이었다·
[육식성 괴수들은 상처를 입으면 인간을 사냥한다· 인간만큼 쉽고 많고 맛있는 먹잇감이 없기 때문이다· – 데모나이트]
“인육을 먹으러 가는 거군요·”
“···”
이안의 말에 기사들이 침묵했다·
만티코어의 행선지는 명확했다· 인간의 마을이 분명하다· 딱히 먹이를 구하러 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만티코어는 교활하고 잔인한 생물이기에 인간을 잡아먹으며 복수하려 들 게 뻔했다·
단지 기사들을 고통스럽게 할 목적으로· 보복성 살육을 저지르는 것이다·
“영감· 새들을 풀어서 만티코어를 쫓게 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자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네·”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만티코어가 혐오스러워질 대로 혐오스러워진 이안이었다·
그 새끼 숨통이 끊어지는 꼴을 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지경·
“보통 개새끼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 끝을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안의 대답에 기사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마법사와 친하지 않던 기사들이지만 이안만큼은 예외였다· 전우이자 성서를 함께 공부한 믿음의 형제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고맙네· 이안 군·”
“나도 함께하지!”
“콩만 과하게 심지 않는다면 그리 하셔도 됩니다·”
“뭐야?”
기사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만티코어에게 상처를 입혔고 디히트리의 목숨까지 구했으니 전투는 기사단의 승리였다· 긴장이 살짝 풀릴 만했다·
하지만 아직 괴수는 살아있다·
“오베론· 새들을 데리고 만티코어의 흔적을 쫓아라·”
[그렇게 할게용!]
마법사의 명령을 받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괴수의 흔적을 쫓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기사단은 다시금 무장을 점검하며 사냥을 재개했다·
#
엘더와 이안이 예상했듯 만티코어는 가까운 민가를 습격하러 떠났다·
이는 보복성 공격이었는데 ‘지금껏 잘 숨어 살던 이몸을 건드리다니! 후회하게 해주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토벌하지 않으면 심심할 때마다 인간을 사냥할 게 뻔한 괴수의 마인드는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만티코어가 얼마나 사악한지는 둘째 치고라도 민가가 희생당하는 일은 막는 편이 나았다·
“괴 괴물이다!”
해질 무렵·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농부들은 갑자기 숲에서 튀어나온 만티코어의 습격을 받았다·
만티코어는 농부들을 꼬리를 휘둘러 독침을 날렸다· 마비 성분이 포함된 독침은 맞는 즉시 신체 능력을 급격히 저하시키는 무서운 무기였다·
“히이익!”
독침에 당한 농부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젊은 농부 하나가 도망치다 말고 쓰러진 농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젊은 농부는 갈퀴를 손에 쥔 채 만티코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 우리 마을에서 나가! 이 괴물!”
청년은 일생일대의 용기를 끌어내어 괴물을 향해 일갈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용기였다· 저 대사는 상처를 입고 마을로 숨어든 주인공한테나 쓰는 대사가 아니었단 말인가!
만티코어도 청년의 반항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히죽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청년 주위를 슬슬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죽일 수야 있지만 만티코어는 천성이 개새끼인 사악한 마물이다·
즉 인간을 괴롭히는 일을 즐긴다···!
“크흐흐· 저 인간이 네 아비인가보군?”
“!”
“네게 좋은 제안을 하나 하지· 저 아비를 죽이고 내 앞으로 가져와라· 그럼 나머지 인간들은 모두 살려주겠다·”
청년은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판에 쓰러진 농부는 많았다· 그런데 아버지와 저 농부들의 목숨을 교환한다니···?
“셈도 못하는 머저리는 아니겠지? 열 명의 인간과 단 한 명의 인간· 어느 쪽을 살리겠느냐?”
만티코어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다·
청년이 무슨 선택을 하든 농부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애초에 살려줄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그저 인간들이 발악하고 고통 받고 발광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들은 판단력을 상실하고 갈팡질팡했다·
“··· 뭐 뭐하는 거야! 존! 괴물이 시키는 대로 해!”
“입 닥쳐! 병신 새끼가! 괴물 말을 믿냐?”
“누가 병신이라는 거야! 그럼 다 같이 여기서 뒤지자고?”
인간들끼리 목소리를 높이고 다툰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며 상처 입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만티코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폭소했다·
그렇다· 만티코어는 원래 분탕종자였다· 혼돈의 화신이자 분장 없는 조커이며 할머니를 사랑하는 자다·
기사단에게 두들겨 맞던 스트레스가 확 풀린 만티코어는 기분이 좋아졌다·
“··· 저 적의 말을 귀담아 들을 것 같으냐!”
그래서 웬 병신 같은 청년이 갈퀴를 휘둘렀을 때도 기분이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
청년이 진짜로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면 기뻤겠지만 생각보다 똑똑한 놈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 그럼 죽어라!”
만티코어는 웃으며 앞발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휙!
“크아아아앙!”
숲에서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만티코어의 눈을 관통했다·
활을 내던지며 뛰쳐나온 엘더가 롱소드로 만티코어의 앞발을 후려쳤다·
“성 산티아고 기사단! 전투 준비!”
기사들이 순식간에 만티코어를 포위했다·
그제야 만티코어는 자신이 너무 여유를 부렸음을 깨달았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죽고 싶은 게냐!”
만티코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성을 터뜨렸다· 적을 쫄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믿음과 신념으로 똘똘 뭉친 전투 집단이다·
“하늘의 이름으로! 너를 단죄하러 왔다! 사악한 괴물아!”
“네 목을 베어서 찬란한 태양 아래 바치리라!”
“크아아아! 저리 꺼져라!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기사단은 끈질기게 포위망을 유지했다· 만티코어와 가까운 쪽은 물러나고 먼 쪽은 다가오는 식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괴수를 사냥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기사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합을 맞췄다·
그 사이 이안은 멀리서 주둥이를 나불대며 만티코어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병신· 입만 나불나불대면 뭐가 달라지겠냐?”
“닥쳐라! 마법사!”
사실···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전부였다· 원래 입 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게 마법사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상대의 감정을 조종했으니 이것도 마?법? 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꺼지라고 위협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내 반드시 네 머리를 잘근잘근 씹어서···!”
“응· 못 씹죠? 포위도 못 풀죠? 넌 여기서 죽을 운명이죠?”
“크아아악!”
이안이 만티코어의 주위를 끌고 기사단이 행동을 유도하자··· 그들이 계획했던 일이 벌어졌다·
기사들은 만티코어를 밀밭으로 데려갔다(부인이 기다리는 곳은 아니다)· 밀밭에는 이제 파종을 시작한 밀알들이 새싹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에는 노련한 초목술사가 있다·
“[초록의 아이들아! 자라나라!]”
마니가 주문을 영창하자 새싹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며 만티코어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이 따위 잔재주를!”
만티코어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쉬이 자연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풀은 원래 질기다· 살아있는 풀은 더더욱 질기다· 그래서 군인들은 새록새록 자라나는 잡초를 가리켜 녹색 괴물이라 불렀다·
“흥!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이 괴물아!”
마니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녀의 확신처럼 만티코어는 밀 줄기로 이루어진 그물을 끊어내지 못했다· 마니의 식물 독이 만티코어의 체력을 많이 갉아 먹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형선고였다·
“지금이다! 형제들이여!”
기사단은 품에서 표주박을 꺼내 투척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작물이 등장하는 이유는 마니가 씨앗 수집가이기 때문이다·) 표주박 안에는 마니가 나누어준 나무 수액이 들어 있었다·
바로 불화살의 재료가 되는 수액이었다·
“이안 에레디스! 네 차례다!”
화염술사로 유명한 에레디스는 제자에게 화염의 신비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원래 화염술은 입문하기가 더럽게 어려운 걸로 유명한데 어떤 의미에서 이안은 그 부분을 날로 먹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안은 만티코어를 향해 손가락을 탁 튕겼다· 화염술사의 국룰이랄까·
오늘은 날씨가 청명하고 화염의 신비가 들판을 즐겁게 뛰어 놀았다·
화염술을 쓰기 좋은 날씨란 뜻이다·
“[불꽃이여! 타올라라!]”
발화점이 낮은 나무 수액이 확 타올랐다·
끈적한 나무 수액을 뒤집어 쓴 만티코어는 녹색 그물에 갇힌 채 활활 타올랐다·
화형· 인간을 해하는 마물에게 어울리는 형벌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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