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1
# 41
“제까짓 것들이 잘 싸워 봤자지·”
예상보다 적들의 반항이 거셌음에도 백작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아니· 사실 여유 있는 척 할 뿐이지 백작은 속으로 쉬지 않고 무능한 용병 놈들을 욕했다·
‘이 쓸모없는 놈들! 니들이 받아 처먹은 은화가 몇 갠데!’
전략 – 시뮬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비싼 돈 주고 뽑은 유닛이 밥값을 못하면 욕이 튀어나오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백작의 감정은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요만큼도 영향을 줄 수 없다·
니가 기분 나쁘다고 뭘 할 수 있는데·
백작은 지휘관도 아니고 전사도 아니다· 그냥 물주 겸 사장님에 불과하다· 사장님 기분이 나쁘다고 선수들 기량이 떨어지겠냐·
가서 백작이 못 싸운다고 지랄하면 전투에 악영향을 줄 수 있지만 디케도 경이 호위를 맡고 있는 이상 그런 미친 짓은 벌어질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백작은 아예 화를 내지 않는 방향으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내가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 사실 오합지졸이었다는 사실에 일일이 화를 냈다간 성질 다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
억지로 화를 꾹 눌러 참는 백작과 달리 디케도 경은 어느 누구보다 진지한 태도로 전장을 관망했다· 경험 많은 기사만이 풍길 수 있는 노련미 짙은 모습이었다·
이안과 루시는 일찌감치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흥미로웠지만 워낙 난전이 벌어져 뭐가 뭔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숫자가 많으니 마냥 이기고 있으리라 정도로만 짐작했을 뿐·
“어떻습니까· 경·”
디케도 경이 워낙 진지한 표정을 짓자 이안은 나이 든 기사에게 그렇게 질문했다·
“··· 흑기사·”
“네?”
“저 검은 갑옷의 기사··· 동방의 백국 출신이 분명하네·”
흑기사?
이안은 다시 전장을 훑어보았다· 유달리 까만 갑옷을 입은 기사가 보이긴 했다·
디케도 경은 저 기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와· 뭐야?”
뒤늦게 흑기사를 발견한 이안은 뭔가에 홀린 듯 기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흑기사의 무용은 전쟁에 무지한 이안이 보기에도 뛰어났다·
흑기사는 날렵하게 검을 휘두르며 주위 병사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백작의 기사가 덤벼들었지만 10여 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해버렸다·
이안과 디케도 경이 주목하자 루시와 백작도 덩달아서 흑기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저 기사 너무 잘 싸우는데?
그레임의 군대는 딱 예상했던 것만큼의 전투력만을 보여주었다· 나름 잘 싸우지만 그래도 숫자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좌익과 우익의 병사들은 조금씩 포위당해 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기사가 활약 중인 중앙은 아니었다·
“혼자서 중앙을 거의 다 뚫은 것 같은데요?”
“··· 그래 보이는군·”
이안은 전투를 창작물로 배웠다·
아는 게 없다는 뜻이다·
유희생활 어플이라도 있었다면 지금껏 보고 즐긴 전쟁물에서 무언가 얻어가기라도 했겠지만 이안은 그냥··· 컴퓨터 앞에서 낄낄대기 좋아하는 공대생이었다·
그런 이안이 보기에도 전황은 기묘했다·
그렇다·
기묘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
좌익과 우익이 우위를 점하는 와중에 중앙이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다니?
이안의 상식(A·K·A 전쟁물)에서는 본 적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덥고 텁텁한 전장의 바람이 이안의 까만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했다·
이것은 명백히 전장의 열기였다·
이안은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디케도 경에게 질문했다·
“중앙이 돌파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
주위는 풀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저 멀리서 처절하게 들리는 비명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
죽음 그 자체가 내뱉는 단말마·
고작 힘껏 내달리면 도착할 만큼 가까운 곳은 이미 지옥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것은 중세의 전장이었다·
“다음은··· 우리일세·”
루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루시 뿐이 아니었다·
백작의 호위들· 백작을 보좌하려 남은 소수의 병력들 역시 저 멀리서 밀려오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하나 둘씩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중앙이 퇴각하면··· 적들은 도주하는 병력을 쫓지 않고 곧바로 백작 각하님께 달려들 걸세·”
“그렇겠죠· 아마도·”
이안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쾌한 진실·
놈들이 원하는 건 백작이다·
백작만 붙잡는다면 요술 램프를 문지른 것처럼 모든 일들이 다 해결된다·
“이··· 무능한 것들!”
백작은 기어코 참았던 노성을 터뜨렸다·
귀족의 분노는 충분히 카리스마 있고 무거웠으며 주위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곳은 전장이었다·
카리스마가 아닌 무력이 지배하는 곳·
“싸워라! 겁쟁이! 머저리들아! 싸우란 말이다! 고작 적들에게 개죽음 당하려고 이 먼 땅까지 찾아온 거냐! 천하의 멍청이들아!”
“각하! 고정하십쇼!”
이안은 백작의 희번뜩한 눈동자를 쳐다보며 살짝 소름이 돋았다·
저 인간··· 맛이 좀 갔는데?
분노에 사로잡힌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디케도 경! 그대가 출전하시오! 나가서 저 간악한 동방의 흑기사를 쓰러뜨리시오!”
“··· 예! 각하!”
백작의 명령을 받은 디케도 경은 즉시 검을 뽑았다·
비록 젊은 기사들에 밀려 백작의 호위를 맡게 된 디케도 경이었으나 지금까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카티나 백작을 섬겼다·
오갈 데 없던 자유 기사를 등용하여 소중히 출전시키던 백작이었다·
다른 계약 기사들과 달리 그는 이미 백작가문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충실한 가신이다·
백작 각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린 지금 디케도 경은 그것이 어떤 명령이라도 따를 작정이었다·
“용병들이여! 내 뒤를 따르라! 백작 각하께서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신다!”
디케도 경이 말에 오르자 보다 못한 이안이 뛰쳐나갔다·
“경!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백작 각하의 명에 따라 적들을 막을 걸세·”
“혼자서요? 저렇게 미친놈처럼 밀고 내려오는 놈들을?”
디케도 경은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각하의 부름을 받았고 기사의 서약에 따라 행동해야 하네·”
행동? 행동을 해야 한다고?
이안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중앙은 붕괴의 조짐을 넘어 서서 그 다음 단계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즉···
이미 개박살이 났다는 뜻이다·
“살려줘어어!”
“이 이 괴물! 이 전장에서 꺼져··· 커억!”
“도망쳐라! 일단 도망쳐!”
“백작을 미끼로 던져! 우린 쫓지 않을 거야!”
비록 패배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도망친 용병들은 대부분 목숨을 건졌다·
그 이유는··· 바로 백작을 미끼로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용병들도 알고 있었다· 고작 킬수 1따리인 자기 목숨과 승패가 통째로 걸린 백작의 몸뚱이 중 어느 쪽이 훨씬 가치 있는지·
수많은 적들·
그것도 기세가 잔뜩 오른 적들이 백작의 진형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입속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댄다·
이안은 생각했다·
··· 지금 저걸 막아세우자고?
백작이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디케도 경!”
이안은 디케도 경의 곁에 바짝 붙어서 말했다·
생양아치나 다름없는 껄렁껄렁한 기사들과 달리 디케도 경은 기사의 도리를 아는 인격자였다·
행군 중에도 종종 이안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이안의 마법을 보며 ‘저 놈이 사술을 부린다! 목을 메달아라!’라고 지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런 기사가···
어째서 엉뚱한 놈이 싸질러놓은 개짓거리의 뒷수습에 나서야 하는가!
그것도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미친 난이도의 임무로!
“백작님을 데리고 퇴각합시다!”
“각하가 퇴각하면 나머지 병사들은?”
“뭘 다른 병사를 찾고 있어요! 눈이 있으면 보십쇼! 우리 중앙은 이미 기사들 그 개 밥버러지같은 새끼들이 다 말아 처먹었잖습니까!”
“자네! 퇴각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서 하는 소린가!”
이안은 소리쳤다·
“알아요! 내가 마법사라도 그 정도는 압니다! 져서 도망치는 거잖아요! 패주한다는 뜻이겠죠! 근데 보시라고요! 디케도 경!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 같습니까!”
“···”
디케도 경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아니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이안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상황이 이렇게 꼬이게 될 줄은 이안은 상상도 못했다·
기사들? 그 새끼들이 아니꼽긴 했지만 이안이 직접 나서서 조질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안은 백작의 신하도 탈리안 남작의 신하도 아니다·
이건 남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비켜섰다·
아니 애초에 일이 꼬일 것이라고 의심할만한 상황조차 아니었다·
숫자가 2배나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이걸 질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승리]는 당연한 거고 [전공 배분]을 양보한 거다·
그런데···
그 당연할 거라 생각했던 승리를 기사 새끼들이 찢어먹었다···
“디케도 경!”
그때 멀리서 백작의 기사가 달려왔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어이가 없어졌다·
저기 당신 우리 군대 중앙에 배치된 기사님 아니셨을까요?
그런데 왜 씨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걸까요?
“부끄럽지만 패배했소! 저 검은 갑주의 기사를 조심하시오! 아주 괴물 같은 놈이오!”
··· 답은 간단했다·
패주하고 도주 중인 기사였다·
“부끄럽지만 패배? 시발 뻔뻔하기가 뻔데기보다 더 해요· 나중에 환생하면 국회의원 하시면 잘 하시겠어·”
“··· ?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건방진 놈!”
놀랍게도 기사는 이안이 뭐라고 궁시렁거렸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럴만한 단어로만 골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뉘앙스는 느껴졌기에 기사는 이안이 마법사들만 사용하는 우아한 고대어 욕설을 내뱉었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급하지 않았다면 네놈의 혓바닥을 도려냈을 것이야!”
“뭐? 시발 진짜 미친 새끼네? 저거? 도려낼 거면 도려내 봐! 한 번! 지금 당장!”
“그만! 둘 다 그만!”
디케도 경이 소리쳤다·
“시르그 경! 병사들을 달래어 모으시오! 한 시가 급하오!”
“디케도 경은?”
“나는 각하의 명을 받았소· 저 검은 갑주의 기사를 쓰러뜨릴 것이오·”
디케도 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가 디케도 경을 비웃었다·
“아· 그렇군· 잘 해보시오·”
“시르그 경· 그대도 나와 함께···!”
“나는 백작 각하와 함께 퇴각하겠소·”
“···!”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일단 살아야 다음 기회가 있을 것 아니오?”
디케도 경이 채 말릴 새도 없이 시르그 경이 사라졌다·
한 마디로 빤스런·
이안조차 감탄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속옷 달리기 솜씨였다·
“저래도 됩니까?”
“뭐가 말인가·”
“패전 기사의 책임을··· 아니· 옘병· 나중에 말합시다!”
중세 귀족의 신분 계급도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기사는 평민과 귀족의 중간 신분이다·
귀족의 절반 수준 정도는 지 꼴리는 대로 행동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전장을 아주 이탈한 게 아니라 백작과 함께 도망간다면··· 문책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법사 이안· 그대도 돌아가 백작 각하와 탈리안 남작을 지키게·”
“하지만···”
디케도 경이 깡통 투구를 눌러 썼다·
흠잡을 데 없는 기사의 모습이었다·
“나는 여기서 시간을 벌어보지·”
“디케도 경·”
“뭐 하는 겐가? 서둘러 움직이지 않고·”
때마침 루시가 이안을 데리러 왔다·
“이안! 거기서 뭐해! 백작님이 퇴각하기로 결정하셨어! 빨리 와!”
“···”
디케도 경과 소수의 부하들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모두 백작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충성스러운 자들이다·
그 순간·
마법사 이안이 말 위로 몸을 던졌다·
“이안?!”
깜짝 놀란 루시가 소리쳤다·
“루시! 넌 가서 시르그인지 뭔지 하는 생양아치랑 같이 도망쳐! 아씨· 양아치랑 같이 가라고 말하니까 좀 그렇네!”
“이안 너는!”
마법사 이안은·
“난 디케도 경이랑 같이 퇴각할게!”
“뭐?!”
충동적으로 디케도 경과의 동행을 선택했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친하게 지내던 기사의 죽음을 방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이안은 확신했다·
이대로 디케도 경을 혼자 보낸다면 100% 확률로 패배하겠지만·
마법사가 약간의 [잔재주]를 부린다면···
저 가혹한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옛 이야기의 기사를 돕는 마법사처럼 말이다·
“이안!”
루시가 소리쳤다·
그녀는 보았다·
마법사 이안의 눈빛이 얼마나 진지한지·
얼마나 진심인지·
그녀는 이안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를 계속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안은 루시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가신도 약혼자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이안의 행운을 빌어줄 뿐이었다·
부디 무사히 다시 만나길·
“무시해야해! 이안!”
“그래! 너도! 루시!”
이안은 말의 귓가에 마도 언어를 속삭이며 바람처럼 말을 몰았다·
“디케도 경!”
이안이 함께 말을 몰자 디케도 경은 깜짝 놀랐다·
“이안? 자네가 왜?”
“왜요? 엉덩이 무거운 마법사님이 직접 돕겠다는데 불만 있습니까!”
“위험한 일이네·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그건 댁이 신경 쓸 일 아니고요! 난 마법사라고요! 내 몸 하나 빼낼 잔재주는 있어!”
무신경 무책임한 이안의 말투에 디케도 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을 잘 모르는 디케도 경이 봐도 이안은 심히 괴팍했다·
아! 저런 미친 정신머리라니!
진짜 야무진 마법사겠구나!
“아무렴! 마법사님의 말씀이니 여부가 있겠나!”
기사와 마법사는 쏘아진 화살처럼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그 화살촉 끝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검은 갑주를 두른 흑기사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3·12·23
23·12·28 –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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