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
# 53
탈리안 남작의 무덤은 어두웠다·
영화나 드라마같은 촬영물이야 조명을 빵빵하게 틀어두고 촬영을 하니 빛이 없는 곳의 어둠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안이 실제로 경험한 동굴의 어둠은 상상을 초월했다·
시력을 상실한 것만 같은 완벽한 어둠·
눈앞으로 뭐가 지나가도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순수한 암흑이 바로 자연의 암흑이다·
[이안! 우리 또 같이 놀까?]
[같이 놀자! 이안!]
어둠의 신비만 신이 나서 날뛴다·
이안은 에레디스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에레디스는 이안이 어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을 두고 신기해했다· 어둠은 수줍음이 많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남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
‘뭐? 낯을 가려? 수줍음이 많아?’
이안은 자기 주위를 빙빙 도는 어둠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럼 저 골댕이같은 애들은 다 뭐냐?
어둠은 수상할 정도로 이안을 좋아했다· 그것도 같이 놀자면서 앵겨온다·
이안은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도 같이 논 적이 없는데 뭘 같이 논다고 달라붙는 거지?
[이안! 평소처럼 땅에 누워봐!]
[그래! 드르렁거리는 소리도 내면서!]
[이안이 하는 대로 우리도 따라할게!]
“···”
어둠이 속삭이자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니들이 말하는 놀이가··· 밤에 잠자는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근데 얘기 들어보니 맞는 것 같다·
어둠은 이안이 잠든 동안 이안이 내는 소리를 따라하고 옆에 누워서 뒹굴 대는 등 재밌게 이안과 놀았(?)던 것이다·
무슨 홍철 없는 홍철팀도 아니고·
이안 없는 이안과 놀이냐?
즐겁게 이안 주위를 맴돌던 어둠은 벨렌카가 횃불을 켜자마자 도망쳤다·
[꺄아악! 빛이야!]
[싫어!!!]
어둠이 비명을 지르자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야· 벨렌카· 횃불 좀 살살 켤 수 없냐? 어둠이 도망치잖아·”
벨렌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도록· 대체 횃불을 어떻게 살살 켠단 말이냐?”
“그건···”
이안이 갸웃거리자 벨렌카는 고개를 저었다·
가끔씩 저 따위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이안· 넌 불을 켜지 않아도 되나?”
“어· 사실 횃불 없는 게 더 편해·”
사방이 어둠으로 꽉 막혀있지만 이안은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암흑 시야 스킬 덕분이었다·
그런 이안의 모습이 벨렌카는 꽤 신기했다·
“적습을 고려한다면 불을 끄고 이동하는 편이 낫겠지만···”
루시는 행여나 벨렌카가 횃불을 전부 꺼버리자고 말할까봐 다급히 외쳤다·
“그건 절대 안 돼!”
“어째서? 이안이 길잡이를 해주면 된다만?”
“그야 무섭잖아!”
적습은 적습이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무섭잖아!
무섭잖아! 무섭잖아! 무섭잖아···!
루시의 목소리가 길게 메아리쳤다·
그러자 루시가 기겁하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꺅! 이안!”
“···?”
이안은 갑자기 지-랄을 시작한 루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쟨 왜 또 저래?
“저 저 밑에 뭐가 있는 것 같아!”
“? 있겠지· 도굴꾼 놈들이·”
“도굴꾼 말고!”
루시가 창백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괴물 말이야!”
“???”
괴물 말이야!
괴물 말이야! 괴물 말이야···!
다시 한 번 메아리가 울리자 루시는 기겁하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저 소리 들었죠?”
“음· 듣긴 들었다·”
“저도 들었습니다· 남작님·”
중세인들이 숙덕숙덕 지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시작했다·
이안은 눈치껏 저들이 동굴의 메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정말? 정말로 메아리를 가지고 저렇게 진지하게 얘기를 한다고?
“괴물이야! 괴물이 틀림없어!”
루시가 루시 행동을 하며 말했다·
빡대가리 같았다는 뜻이었다·
“제 생각에는··· 악마가 아닐까 합니다만·”
“아 악마?!”
옆에서 사제 놈도 거하게 루시 – 행동을 했다·
쟤는 지식인 아니었나? 성서를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람이 왜?
“여긴 엄연히 지하세계· 그렇다면 땅 속의 악마들이 나타난다 한들 이상할 게 없습니다·”
사제는 재빠르게 성호를 그리며 말했다·
“하늘의 눈이 닿지 않으니 모두 조심하십쇼·”
··· 성서 때문이었구나·
사제들은 성서와 연관됐다 싶은 일은 전부 성서에 적힌 대로 해석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이곳은 지하세계이니 당연히 악마의 소행이라고 해석한 것·
일종의 지식의 저주였다·
이안은 고작 메아리가지고 중세인들이 호들갑을 떨어대자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아· 괴물이니 악마니 하는 미신적 해석 말고 이성과 합리로 무장된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을 갖춘 참된 지식인은 없는 것인가!
그때 벨렌카가 앞으로 나섰다·
무식한 제국 놈들과 달리 동방의 백국에서 온 기사라면 뭔가 다를지도···!
“다들 동굴은 처음이라 당황했나보군·”
“베 벨렌카? 너 저게 뭔지 알아?”
“전에 들어본 적 있다· 저건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다·”
“그럼···?”
벨렌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요정이다·”
“요정?”
“그래· 동굴 속에 살며 사람을 골리길 좋아하는 요정이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중세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요정이었구나~”
“어쩐지! 그리 사납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정이라··· 악마보단 낫지요· 저희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 것 아닙니까·”
하하하하하!
수상한 목소리는 바로 요정이라네~
“···”
요정 아니라고· 미친놈들아·
이안이 뭐라고 설명할 틈도 없었다·
중세인들은 이미 동굴 속에서 울리는 수수께끼의 목소리를 두고 ‘요정의 소행’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였다·
아아· 그것은 끔찍한 괴물도 사악한 악마도 아니다·
귀여운 요정이었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이안만 빼면 말이다·
이안은 생각했다·
저기다 대고··· ‘사실 요정 같은 건 없음! 소리의 파동이 굴곡진 벽면을 타고 반사되는 과학적 현상일 뿐임!’이라고 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이안아?
라는 따가운 눈빛만 돌아오지 않을까?
인싸 특) 대화의 흐름을 파악할 줄 앎·
찐따 특) 팩트에 집착함·
이안이 인간관계가 원만한 인싸였다면 여기서 함께 웃으면서 ‘하하하! 고것 참 장난꾸러기 요정이구나~’라고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안은 전생에 공대생이었다·
과학에 진심이었다는 뜻이다·
메아리를 두고 요정이라니!
으아아! 못 참겠어요!
중세인들의 무지몽매한 상식 수준을 근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이안은 이 한 몸 희생해서라도 기꺼이 찐따가 되리라 다짐했다·
“사실···”
이안이 입을 열자 모두가 이안에게 주목했다·
바로 그때였다·
[키득키득]
[역시 장난은 재밌어!]
“···?”
이안의 귓가에 마로니우스로 키득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도 익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바람의 목소리·
[누가 또 소리 안 질러주나?]
[우리가 퍼뜨릴 수 있는데!]
이안은 입을 헤 벌렸다·
잠깐 상식·
소리는 파동이며 공기를 매질로 퍼져나간다·
중학교 1학년 과학 교과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게 바람의 목소리라면?’
소리를 메아리로 퍼뜨리는 장본인이··· 바람의 신비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엄청난 충격이 이안의 머리를 강타했다·
현대인의 상식이 조각조각 갈라지는 듯한 충격·
그래· 여긴 판타지 세계이지 현대의 대한민국이 아니잖아?
현대의 과학지식에 집착하면 안 되지·
“이안? 갑자기 왜 그래?”
“저 이상한 울림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이안은 깨달았다·
소리는 단지 진동이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는 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 중세 판타지 세계에서는 [바람의 신비]가 소리를 퍼뜨리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저 목소리는 요정이 아니라···”
이안이 중얼대듯 말했다·
“바람의 신비가 불러일으킨 현상입니다·”
“오···”
“바람의 신비?”
[새로운 스킬 획득!]
[대기술 – 소리 다루기]
[공기의 떨림을 통제해 소리를 조종하는 기술이다·]
이안은 곧바로 바람의 신비에게 말을 걸었다·
“[바람이여· 목소리 전달 없음!]”
[네 목소리를 퍼뜨리지 말라고?]
[우리가 왜?]
“[재미!]”
[앗! 우리랑 장난치자는 거지?]
[뭔진 모르겠지만 재밌겠다! 해보자! 우리!]
바람의 신비를 통제하여 소리가 퍼지는 것을 막은 이안은 곧바로 큰 소리로 외쳤다·
“무-야호!”
“···”
“···”
루시를 비롯한 중세인들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메아리가··· 전혀 울리지 않았던 것!
“와··· 진짜네?”
“바람의 신비 짓이 맞았군?”
수상한 목소리는 바로 바람의 신비였다네~
파동이 어쩌니 공기의 매질이 어쩌니 하는 설명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다·
“요정의 짓이란 설명도 아주 틀리지는 않습니다· 바람은 장난꾸러기 요정으로 묘사되기도 하니까요·”
이안이 상큼하게 웃으며 설명하자 중세인들은 그윽한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중세인들한테는 이게 맞아·
어느 새 중세인 – 눈높이 설명을 할 줄 알게 된 이안이었다·
#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지만 꿋꿋이 이안을 따라 들어온 새가 한 마리 있었다·
바로 오베론이다·
“까악! 주인님!”
[제가 이상한 벌레를 잡았아용!]
오베론이 자랑스럽게 벌레 한 마리를 내밀었다· 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벌레였다·
하지만 그게 지하 묘지 한복판에서 발견된 건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풀이 없는 곳에 웬 풀벌레?
“마법사가 풀어둔 것 같은데·”
이안은 단번에 벌레의 주인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다들 조심하세요· 적이 가까이 있습니다·”
이안은 동료들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누군가 이안 일행을 향해 마도 언어로 주문을 외친 것이었다!
“[대지여! 요동쳐라!]”
‘마로니우스 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마도 언어 마로니우스 어였다·
육성으로 마로니우스 어를 외칠 존재는 단 하나·
마법사뿐이다·
적의 주문을 들은 즉시 이안은 반격에 나섰다·
“[대지여! 요동치지 마라!]”
이안이 소리치자 막 흔들리려던 땅이 다시 잠잠해졌다·
“[대지여! 요동쳐라!]”
“[대지여! 요동치지 마라!]”
마법사가 소리치자 이안은 즉시 마법의 발동을 막았다·
그짓을 한 두 번 하자 대지가 빡돌았다·
[그만! 뭐하자는 짓이냐! 한심한 인간들아! 움직이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이안이 웃으며 우아하게 사과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집어 치워라! 다툴 거면 니들끼리 다퉈라! 난 갈 거다!]
대지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
이제 한동안은 이곳에서 대지의 신비를 불러낼 수 없다· 다른 의미로 적의 대지술을 막아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곧 마법사를 비롯한 도굴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그는 굉장히 떫은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법을 다루는 솜씨가 아주 능숙하군· 대지술사인가?”
“대지술을 배운 적은 있는데··· 근데 그쪽은 누굽니까?”
그러자 노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잉리언 케이트· 드렌하임에서 머물던 마법사일세·”
잉리언?
이안은 당연히 잉리언이 누군지 몰랐다·
“너는?”
“이안 에레디스· 레이븐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죠·”
“에레디스?”
잉리언이 깜짝 놀랐다·
“설마 화염술사 에레디스 말이냐?”
“제 스승님의 특기가 화염술이냐고 묻는다면· 예· 맞습니다·”
잉리언은 진지하게 이안을 바라보았다·
에레디스가 제자를 두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그때 진흙 남작이 잉리언의 등을 쿡쿡 찔렀다·
“영감· 이제 와서 발 뺄 생각은 아니죠?”
“···”
사실 뺄 생각이 조금 있었다·
잉리언이야 마법검이나 구경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자길 잡으러 온 사람이 아는 사람의 제자이니 그냥 배신을 때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진흙 남작은 사정이 달랐다·
이안이 지켜줄 수 있는 잉리언과 달리 그는 잡히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진흙 남작이 빤히 보는 상황에서 배신을 때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잉리언이 소리쳤다·
“에레디스의 제자 이안! 미안하지만 탈리안 남작의 보물은 우리가 가져가겠다!”
이안은 루시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는데? 루시?”
루시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잉리언은 저 소녀가 탈리안 남작임을 눈치 챘다·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잉리언은 이안 일행을 제압하기 위해 마도 언어를 외쳤다·
“[바람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
이번에는 이안이 방해할 수 없도록 고차원적인 언어로 바람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할 이안이 아니었다·
“벨렌카!”
이안이 외치자마자 검은 갑주의 여기사가 화살처럼 잉리언을 향해 돌진했다·
“물어!”
자고로 메이지는 근접 전사가 물어줘야(?) 제맛·
도굴꾼들이 잉리언을 지키려 뛰쳐나왔지만 고작 사람 몇 명을 돌파 못할 벨렌카가 아니었다·
“으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 적의 전위를 돌파하는 벨렌카를 보며 이안은 씩 웃었다·
보아하니 저 노인 괜찮은 마법사 같지만···
아무리 잘난 마법사라도 마법을 쓸 시간을 주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본인이 마법사이기에 마법사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이안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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