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 59
이안은 요정들이 무슨 요술을 부리는지 지켜봤다·
그들의 계획은 단순명쾌했는데 바로 마법검에서 마법의 힘을 일정량 분리해내는 것이었다·
마법검의 힘은 약해지겠지만 검을 건네주지 않아도 요정들이 그토록 바라는 마법의 힘을 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력적이었다·
이안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 마법검의 힘을 100% 끌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고작 중세식 파이어스틱 정도로만 사용 가능한 물건인데 위력이 좀 약해진다 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그 대가로 값비싼 페어리 실크를 얻을 수 있으니 명백한 이득 거래가 맞았다·
다만 이안 본인은 그다지 이득이라는 생각을 못했다는 점이 문제긴 했다·
요정들이 이안에게 페어리 실크를 준다고 치자·
근데 그걸 가지고 이안이 뭘 함?
옷을 만드나? 대귀족들에게 갖다 파나?
그건 상인들이 할 일이지 마법사의 일이 아니었다·
이안은 돈과 권력이 다급한 하층민이 아니었다· 신비를 탐구하는 마법사다·
여행을 하며 겸사겸사 장사를 할 수도 있지만 이안은 아직 거기까지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마법검에 담긴 마법을 저희 마을의 룬석으로 옮겨 담을까 합니다만·”
요정 여왕이 이안의 마법검을 빌려달라며 말했다·
“그럼 나도 따라가죠·”
“··· 오셔도 할 일이 없을 겁니다·”
“내 검이니 내가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안의 설득에 요정 여왕이 넘어갔다·
“그런 이유라면야·”
이안은 요정 여왕과 동행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요정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삶을 살았다· 간혹 장난끼 넘치는 요정들이 인간들과 접촉하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의 일이었다·
이안 외의 인간들은 축객령이 내려졌다·
그 결정에 불만을 갖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었다·
“다녀와! 이안!”
“갖다올게·”
사실 인간들도 요정들을 두려워하긴 했다·
요정들은 유명한 요술쟁이들이다· 마법을 두려워하는 중세인들에게 요정들과 부딪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이안님·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맹세를 해주십쇼·”
“맹세?”
“네· 이안님이 탐구하는 모든 신비를 걸고 저희 요정들을 해하지 않겠다 맹세해주십쇼·”
“···”
요정 여왕이 말하자 주위의 크고 작은 신비들이 관심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요정은 마법을 타고난 종족이다· D&D식으로 말하면 카리스마로 마법을 부리는 종족이라고나 할까·
INT 법사인 이안과 달리 요정들은 딱히 마로니우스 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태생적으로 신비와 접촉하는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요정 여왕이 신비를 들먹이자 이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신비는 거짓말 하는 인간을 싫어한다·
세상 천지에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 게 있다면 이미 친구가 아닌 것이다·
이안이 신비에 대고 맹세를 한다면 그건 반드시 지킬 수밖에 없었다·
“맹세하죠·”
“정말입니까?”
“다만 어디까지나 절 손님으로 대우할 때의 일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요정들은 이안이 대자연과 소통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고 이안의 능력을 경계했다·
수리부엉이같은 끔찍한 야수를 부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말이다·
“여기가 요정들의 마을입니다·”
이안은 여왕이 안내한 요정의 마을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업적 달성!]
[당신은 새로운 신비를 목격했다!]
[보너스 스킬 포인트 : + 50]
[스킬 : 시공술(10/100) – 진행 중]
‘시공술?’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에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신비를 목격함과 동시에 시공술의 신비에 대한 진행도가 올라갔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시공술의 신비가 적용됐나요?”
이안이 묻자 요정 여왕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감으로?”
“감이 굉장히 날카로우시군요·”
요정 여왕의 칭찬은 칭찬이지만 칭찬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안의 능력을 경계했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요정들의 마을에는 시공술의 신비가 적용되어 있었다·
보통 걸음으로는 들어올 수 없고 비틀린 공간의 허락을 받아야만 진입 가능한 일종의 이세계였다·
‘시공술이라···’
시공술은 이안에게 굉장히 유용한 마법이었다·
무려 공간이동 마법이 시공술에 속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공간을 비틀 수만 있다면 이안은 JRPG게임의 마법사 클래스가 하는 짓들을 대충이나마 흉내 낼 수 있다·
허공에서 돌조각을 불러낸다거나 몬스터를 소환한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그러나 이안은 에레디스의 경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시공술 입문에 도전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포기하렴·’
에레디스가 경고를 해준 이유는 바로 시공술의 두 번째 속성· 시간을 다루는 힘 때문이었다·
시공술사들은 미래를 예지할 줄 안다·
그것도 아주 밥 먹듯이 한다·
툭하면 미래를 예지하고 그 미래를 자기 입맛대로 고쳐보려고 암약하는 음흉한 마법사들이 바로 시공술사들이다·
만일 이안이 시공술에 입문하려 한다면 시공술사들은 당연히 그 사실을 미리 알게 된다·
시공술사들이 이안이 시공술사가 되는 미래를 원한다면 이안은 시공술사가 된다·
하지만 아니라면···
시공술사들은 기를 쓰고 이안이 시공술을 배우는 일을 막으려들 것이다·
심하면 이안의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에레디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시공술사를 극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지들이 무슨 신이라도 된 마냥 세상을 주무르려 드니까·
에레디스의 경고는 만일 시공술을 배우려는데 시공술사들이 방해를 한다면 곧바로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미래까지 미리 알고 있는 놈들이 작정하고 수작을 벌이기 시작하면 이안의 인생이 굉장히 피곤해질 테니까·
즉 시공술사들과 척질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
이안은 쌓인 스킬 포인트를 투자해서 시공술 레벨을 올려볼까 잠시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시공술은 편리한 마법이 맞았다·
하지만 이안이 시공술을 배운 것 가지고 시공술사들이 지랄을 할 수 있단 걸 생각해보니··· 당장 급하게 배울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미 에레디스는 이안에게 ‘시공술사들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마라’라고 얘기했다·
그럴 가치가 없는 놈들이라고·
이안이 움직이기 전에 반드시 먼저 움직일 놈들이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희 마을의 위치를 알릴 생각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요정 여왕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안을 쏘아보았다·
설마 이안이 마을에 적용된 시공술의 신비를 꿰뚫어볼 줄은 몰랐던 그녀다·
이안이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해지는 건 그녀다·
하지만 이안은 요정들을 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비에 맹세코 어떠한 정보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요정 여왕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인간과 달리 마법사 이안은 탐욕스럽지 않고 요정들을 존중해줄 줄 아는 인간이었다·
값비싼 페어리 실크를 노리고 요정 마을을 파괴하는 다른 인간들과는 달랐다·
어차피 이제 계약 관계로 묶인 사이가 될 테고 말이다·
“이안님· 검을·”
마을 중앙 광장에는 요정들이 룬석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저 룬석에 마법검의 마력을 옮겨 담는다는 것인데···
“뭘 어떻게 하는 거죠? 원리가 뭡니까?”
이안은 지극히 마법사다운 질문을 던졌다· 마법사가 마법을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정 여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술자를 불러왔다·
“제가 룬석 공사의 책임자입니다·”
기술자는 묘한 눈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명백한 ‘불신’의 눈빛이었다·
“설명이야 해드리겠습니다만··· 말한다고 이해할지 모르겠군요·”
“···”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 얼마나 신-묘한 기술을 쓰기에?
이안의 눈빛을 이해한 요정 기술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기초적인 테스트만 통과하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정말 기본중의 기본이니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면 뭘 어떻게 설명해도 모르실 겁니다·”
“서론이 더럽게 기네요· 빨리빨리 핵심만 말하면 안 됩니까?”
누가 기술자 아니랄까봐 지가 아는 건 더럽게 부심을 부린다·
그러나 요정 기술자는 여전히 이안을 무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녀석은··· 인간이니까!
미개한 인간따리가 위대한 요정의 기술을 이해할 리가 없다! 라는 것이 요정 기술자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멸시는 근거가 있는 멸시였다·
“테스트 나갑니다· 자· 인간 마법사님· 숫자는 셀 줄 아시죠?”
“··· 네·”
“2보다 작은 수를 한 가지만 대보세요·”
뭐지?
이쯤 되니 이안은 기분이 나쁘기보다 대체 저 기술자가 무슨 개소리를 할지 궁금해졌다·
2보다 작은 수야 당연히···
“1이지·”
이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술자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그럼 1보다 작은 수는요?”
“···?”
이안은 진심으로 저 기술자가 뭘 바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당혹스러운 케이스였다·
그리고 기술자는···
그런 이안의 당황을 무지에서 오는 당황이라고 이해했다···!
‘멍청한 인간 놈이 그렇지 뭐!’
요정들은 인간의 지식수준을 멸시했는데 인간들과 달리 요정들은 수학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수학에 능한 요정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저걸 드워프로 치환해보자·
그렇다·
수학에 능한 드워프기 인간의 수학을 무시하는 느낌과 같다!
이 중세 판타지의 요정은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 종족이다·
인간 장인들이 수학을 모르는 것과 달리 이곳 요정들은 무려 기술과 수학을 접목시킬 줄 아는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종족이었다·
요정들이 아는 인간들의 지적 수준은 딱 이 정도였다·
인간은··· 1보다 작은 수가 뭔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팩트였다·
중세인들은 1보다 작은 게 뭔지 모른다·
엥? 1이 제일 작은 숫자 아닌가용?
맞긴 하다· 범위가 자연수일 때는 그렇다·
멍청한 인간들과 달리 요정들은 무려 ‘0’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보다 작은 수는··· 바로 0이다·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고대 황금 제국인들도 0의 존재를 몰랐는데 이들은 ‘없음’이 숫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다며! 그게 왜 숫자인데!
제국의 수학 수준이 그 모양이었으니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인 현재의 중세인들이 0을 알 리가 없었다·
나무 막대를 앞에 두고 1이 한 개· 1이 두 개··· 이러고 있는 게 중세인들이었다·
마법사라고 다를 게 없었다·
이 중세 판타지의 마법사는··· 이과가 아닌 문과다·
유사 한자인 상형문자를 달달 외우고 마로니우스 어로 입을 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 요정 기술자는 당연히 이안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
때문에 난데없이 이안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자 요정은 당황했다·
“그러니까 자연수 이하의 1보다 작은 숫자를 말하라는 거죠?”
“자연··· 뭐요?”
“셀 수 있는 숫자요· 자연수 아래라면 당연히 0인데· 아니면 뭐· 음수를 말하는 거예요? 뭐예요?”
“???”
요정은 이안이 갑자기 외계어를 쏟아내기 시작하자 당황했다·
음수? 음탕한 숫자의 줄임말인가?
요정은 이안의 제국어를 요정어로 번역해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오히려 요정이 질문했다·
“어··· 음· 죄송한데 음수가 뭔가요?”
“마이너스요· -1 같은 거요·”
“··· 네?”
마이너스? 그게 뭔데 씹덕아?
요정 기술자는 이안이 툭툭 내뱉는 개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이안이 막대기를 들고 바닥에 그래프를 쓱쓱 그렸다·
“아무것도 없는 게 0이죠? 음수는 그것보다 작은 수에요·”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없는 것보다 작은 게 있습니까?”
“아씨· 혹시 방정식은 아세요?”
무슨 중학교 수학선생님도 아니고·
이안은 그래프에 기호를 적어 넣으며 즉석 수학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음수라는 건 기본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인데···”
“방정식에서만 존재하는 기호라는 건가요?!”
“네· 일단 이항에 적용되는 개념이죠· 그러니까 여기 등호의 좌변을 우변으로 옮기면 그게 이항이 된다고 보는데···”
이안이 슥슥 방정식을 적었다 지우자 요정 기술자는 눈이 튀어나오게 놀랐다·
이안이 보여주는 수학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요정의 수학은 인간에 비해 월등히 발전했지만 아직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안이 ‘없는 것보다 작은 수’라는 개초딩스러운 개념을 제시하자 뇌정지가 온 것·
‘크큭··· 음수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 그게 먼데? 대체?’
반면 한때 수학과 진학까지 생각하던 계산덕후 이안은 간만의 수학 노가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중학교 1학년 수준의 수학이었지만 말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코즈믹 호러를 목격한 필멸자마냥 패닉에 빠진 기술자는 그러려니 하자·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원래 수학에 관심이 없던 여왕은 기술자와 이안이 무슨 얘길 나눴는지 몰랐다·
“아· 네· 대충은요·”
“그럼 룬석을 세우러 가시죠·”
그래· 이게 본론이었지·
이안과 여왕이 룬석으로 다가가자 기술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소리쳤다·
“마 마법사님!”
“네?”
“마법사님이 직접 룬석의 계산식을 계산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 이안은 솔깃했다·
간만에 숫자를 가지고 노는 것도 재밌을지도?
이안은 요정 기술자들과 룬석의 계산식이란 수학 문제를 가지고 놀았다·
몇몇 요정들은 이안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현대 수학의 묘리를 목도하고 경악하여 주화입마에 빠졌지만·
그러한 앙증맞고 사소한 찐빠를 제외하면 요정들은 마법검에서 마법의 힘을 정확히 33·333···% 분리해내는데 성공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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