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 72
마법사가 마로니우스 어를 까먹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안도 6~7년간 마로니우스 어 하나만 죽어라 공부했다· 사이사이 신나는 에레디스 나무위키 타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집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로니우스 어를 못 알아듣는 마법사라니···
‘그러고 보니·’
한 번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자 새로운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화염술사라면서 불꽃놀이만 하던 것도 좀 이상했다·
이안도 화염술을 배웠으니 화염술이 얼마나 어려운 마법인지 잘 안다·
일단 불을 붙여야 화염술을 시작할 수 있는데 라이터도 파이어 스틸도 없는 이 세계에서는 즉석으로 불을 만들어낼 만한 기술이 없다시피 했다·
때문에 초보 화염술사는 불 곁을 떠나지 않거나 아니면 작은 불씨를 언제나 지참했다·
이안은 키라가 단순히 불을 피우기 어려워서 폭죽을 쏘는 줄 알았다·
폭죽도 불꽃이잖아?
부싯돌로 칙칙거리는 것보단 몇 배나 편한 화염술 시동 물품이었다·
그래서 폭죽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마로니우스 어도 모르면서 폭죽만 쏘고 다녔어?
이안의 의심은 불현 듯 확신이 되었다·
아·
저 애···
말로만 듣던 사기꾼이구나·
그제야 앞뒤가 맞아 떨어졌다·
마법사라고 소문을 내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혼자 힘으로 남작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다만 한 가지 의심은 오히려 증폭됐다·
‘··· 그럼 뱀파이어는 뭔데?’
마법도 못 쓰는 주제에 뱀파이어한테 깝친건가?
여러 가지 의미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여자다·
“세상에·”
“···”
키라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이안은 그런 키라를 보며 혀를 찼다· 용케도 마법사 코스프레를 하고 다녔구나· 운이 좋아서 걸리지 않았다 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 미안해·”
키라는 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황급히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
감시자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사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른 건 맞는데·’
이쯤 되자 이안은 오히려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기에 마법사 코스프레를 하다가 산적한테 붙잡혔대?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키라와 달리 이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키라는 자신이 죽을죄를 저지른 중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안의 입장에서 키라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키라가 사기를 치다 걸린 건 맞다· 근데 이안이 무슨 피해를 입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진짜 피해를 입은 귀족들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었을 소리였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이안은 법과 질서의 수호자가 아니다·
앞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안은 일단 키라를 다몬 남작에게서 빼내기로 결정했다·
다른 건 몰라도 키라가 들고 다니는 폭죽들이 신기하고 유용해보였다·
이대로 다몬 남작 손에 남아있다간 폭죽도 뺏기고 목숨까지 털리게 생겼으니 이안이 밖으로 빼내준 다음 폭죽이나 좀 받아갈 생각이었다·
될 수 있다면 화약 제조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었고·
“뭐·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빠져나가고 보자고·”
“어··· 응·”
키라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마법사 페르소나를 뒤집어쓰지 않으니 애가 좀 심약해 보인다·
에이·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인상만 그런 거겠지· 진짜 심약한 사람이 어떻게 목숨 걸고 마법사 사기를 쳐?
“야! 너희 잠깐 이리 와봐·”
“저희 말씀이십니까?”
“그럼 너희 말씀이지 니들 말고 딴 사람 있냐?”
이안은 살금살금 이야기를 엿들으려는 산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산적들은 즉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호· 저건 좀 신선한 반응·
이안은 확실히 깨달았다· 여기가 시골이긴 시골이구나·
마법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니들 표정이 왜 그러니?”
“아뇨· 그게···”
말투가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죠? 라고 대놓고 물어볼 수 없던 산적들은 억울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이안은 아주 살짝 억울했다·
아니· 마법사는 원래 이런 거라고·
니들이 이상한 거야!
“불만 있음 말로 하렴· 난 당근 온도 100도에 달하는 스윗 캐럿 가이란다·”
“···?”
이안이 떠들기 시작하자 벨렌카가 슬쩍 옆으로 따라붙었다·
“또 헛소리를 하는군· 너는 니가 똑똑하다는 사실도 까먹을 만큼 멍청한 건가?”
“뭔··· 헛소리는 지금 니가 하는 것 같은데?”
“제발 듣는 이의 수준에 맞는 어휘를 고르도록· 여기서 키라만 빼면 니 말 이해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이안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키라도 모를 것 같은데? 혹시 당근마켓 써보셨나?
하지만 키라는 놀라울 만큼 뛰어나게 표정을 관리했다·
1초만에 마법사 키라로 되돌아갔다·
“흥· 그냥 해묵은 관용구야· 신경 쓸 것 없어·”
관용구 아니다·
“오호· 넌 이안의 헛소리를 알아 듣나?”
“모순이야· 헛소리가 아니니 알아듣는 것뿐이지· 뭐 공부를 좀 열심히 한 사람만 이해하겠지만·”
당근 온도 100도가요?
이안은 감탄했다·
키라의 마법은 거짓일지 모르지만 허세력은 마법사 그 자체였다· 사기를 치고 다닐 만 한 실력은 있구나·
마법사와 기사가 떠들기 시작하자 산적들은 자연스럽게 조용해졌다·
높으신 분들이 하하호호 노가리를 까는데 어딜 천한 것들이 입을 놀리겠나?
이안은 아주 자연스럽게 산적과 이안의 신분 차이를 과시했다·
한 번 상대를 나보다 ‘높은 사람’으로 인식하면 행동은 당연히 조심스러워진다·
‘대충 됐나·’
상대가 쫄았다는 확신이 들자 이안은 명령조로 말했다·
“가서 남작 데려와·”
“남작님을··· 여기로요?”
“같은 말 반복하게 할래?”
이안이 쳐다보자 키라도 벨렌카도 지그시 산적을 쳐다본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싫은데요? 내가 님 부하임?’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산적이 산적 두목을 데려왔다·
다몬 남작이다·
“남작님·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얘기? 갑자기?”
남작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이안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는 부하를 물리고 이야기할만한 상황을 만들었다·
키라가 벌벌 떨며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뭘 어떻게 할 거야···? 역시 마법···?”
덜덜 떠는 키라를 보니 이안은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확신했다·
와· 얘 연기 진짜 잘하나보네·
맨얼굴을 드러낸 키라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했다·
전부터 보여줬던 오만한 모습이 전부 구라였다니· 이래서 연예인의 캐릭터 갭이 크면 실망하는 거구나·
“이 상황에서 무슨 마법을 쓰는데·”
“나야 모르지··· 정신을 조종한다거나···?”
오우· 최면어플·
근데 정신 조작을 할 줄 알면 이러고 살겠냐·
이안은 최면어플같은 이세계 치트 없이 순수 100% 실력만으로 살아남은 정정당당한 마법사다·
뭐· 거짓과 기만을 좀 부리긴 했지만·
“아니· 그런 거 없다·”
“그럼···?”
“그냥 보내달라고 할 건데?”
“???”
키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의 계획이 너무 무모해보였던 것·
하지만 그건 마법사가 아닌 사람의 생각이었다·
마법사 코스프레어였던 키라는 괴팍한 연기는 해도 미친 듯이 막나가는 짓은 못했는데 결국 중요한 순간에 행사할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키라와 달리 진짜 마법사다·
당당함(혹은 괴팍함)의 격이 다르다·
혼자 돌아온 남작에게 이안은 대놓고 말했다·
“다몬 남작· 키라한테 들었는데 요즘에 키라를 되게 아껴줬다면서?”
“그건···”
남작은 당황해서 키라를 쳐다봤다·
이야기 돌아가는 흐름을 대충 눈치 챈 것이다·
갑작스런 호명에 키라는 잠깐 당황했다·
한 1초 정도·
하지만 프로 사기꾼 겸 프로 광대인 그녀는 금세 마인드 컨트롤을 해냈다·
“아껴주긴 누가 아껴줬다고 그래?”
키라는 오만한 눈빛으로 남작을 쏘아보았다·
“애먼 사람 태워 죽이기 싫어서 맞춰주고 있었을 뿐이야·”
미치광이 방화광같은 소리였다·
사람이 개미야? 태워 죽이게?
다몬 남작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안은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런 느낌?
“이야· 잘 참았네· 사람을 태우면 안 되지· 암·”
“거의 지를 뻔 했지만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으니까·”
사악한 마법사 둘이서 입을 맞춰 사기를 치기 시작하자 선량한 일반인인 다몬 남작은 도저히 진실을 알 수 없었다·
키라가 대단한 마법사인 건 알았지만 지금까지 맞춰주고 있었다고?
심지어 몇 번이나 불을 지를 뻔했어???
이안이 바람을 잡자 키라가 기가 막히게 연기를 해냈다·
오늘 처음 같이 사기를 치는데 합이 짝짝 맞았다· 이대로 에펠탑 앞으로 직행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수준·
다몬 남작은 두 마법사의 혓바닥에서 펼쳐지는 릭트 쇼에 정신이 반쯤 나갔다·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남작· 출발하는 김에 키라도 같이 데려 가겠습니다·”
“··· 잠깐만·”
하지만 소속 조직원을 빼내려는 행동에는 느지막하게 반응했다·
폭력배 보스다운 반응이었다·
“뭐? 길동무가 생겨서 같이 떠나겠다는데 잠깐만이 왜 나와?”
키라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다몬 남작은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안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똑똑한 사람은 겁이 많아서 쉽게 덤비지 않지만 무식한 사람은 아는 게 없어 일단 들이받고 본다·
남작의 머리가 어떻게 돼서 무력을 동원하면 상황이 골치 아파진다·
“키라· 네가 떠나면 영지가 위험해져!”
“뭐 어쩌라고? 그딴 소릴 나한테 왜 하는 거야?”
“지금껏 잘 해줬잖아! 그런데 힘도 빌려주지 않고 떠난다면 지금까지 투자한 나는 뭐가 되는데!”
이안은 남작이 키라한테 매달리는 이유를 이해했다·
화염술사의 힘으로 영지의 안정을 노리겠다는 건데···
딱 눈 앞 밖에 볼 줄 모르는 범부가 할 만한 발상이었다·
“누가 투자해달라고 했어?! 멋대로 날 동료로 삼겠다고 소리쳐놓고!”
“아니 지금 무슨···”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안은 적절한 타이밍에 중재에 나섰다·
“둘 다 그만!”
“···”
확실히 알겠다·
남작은 무식한 놈이다·
“남작· 아니 자칭 남작·”
“··· 뭐?”
“말은 똑바로 합시다· 입으로만 남작 나리라고 나불댄다고 해서 남작이 되는 게 아니야· 남작 나리· 그럼 진흙 남작도 남작이게?”
“누구요? 그건?”
“그런 도굴꾼 있어요· 근데 내가 봤을 때 둘 다 거기서 거기야·”
다몬 남작은 이안이 자신을 모욕한 줄 알고 항의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이 한 발 빨리 말했다·
“자칭 남작· 남작은 제국 땅이 누구 건지 아십니까?”
“그게 무슨···”
남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주의 것 아니오?”
“틀렸습니다· 제국의 주인은 황제입니다·”
“황제???”
남작은 ‘제국의 주인은 황제다!’라는 간단한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간단한 사실은 아니었다· 현대인들한테나 간단한 거지 중세인들한테는 좀 어려운 개념이었다·
우리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님은 세금도 걷고 재판도 하고 심심하면 징집도 해가고 그런다·
그럼··· 영주님이 주인님 아닌가?
제국 평민들의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제국의 땅은 황제의 것이다· 그걸 봉신들에게 ‘빌려준 것’뿐이다·
그런데 봉신들은 그 빌린 땅을 황제에게 돌려주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물려주고 물려주고··· 그걸 몇 백년간 하다 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내 땅’이 된 것이었다·
이안의 아노리실을 실사용하던 요정들이 아노리실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나 할까·
“내 땅에는 주인이 없는데 이게 황제 땅이라고???”
“주인이 왜 없습니까·”
“사람이 안 사는데 주인이 어딨어!”
“그러게요· 법이란 게 참 이상하긴 합니다·”
“···”
남작은 망치에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문서화된 부동산에 익숙해진 현대인들과 달리 중세인들은 사람이 실제로 살고 세금을 실제로 걷어가야 영지의 개념을 적용시켰다·
“당신은 불법 입주자입니다· 키라 같은 마법사가 100명 있어봤자 군대 쳐들어오면 못 막아요· 그런데 당신 영지는 누구나 건드리고 싶어 하는 땅이에요·”
“하지만 숙련된 궁수가 있고 화염술사가 버티고 있으면···!”
“적은 궁수 없고 마법사 없습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에휴· 이 무식한 인간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준담·
이안은 바닥에 지도를 대충 슥슥 그렸다·
“여기가 탈리안이고 저 위로 카티나· 그리고 이쪽으로는 드보시···”
“잉그마르도 있어·”
“아· 잉그마르···?”
이안은 잠시 키라를 쳐다봤다·
아· 저기서 한탕 해먹었구나···
이안은 친절하게도 자칭 남작에게 주변 권력자를 소개해주었다·
다행이도 대부분이 남작이 아는 인간이었다· 로컬 권력자는 줄줄이 꿰고 있는 남작이었다·
“가서 봉신 계약을 맺으세요·”
이안이 담담하게 직언했다·
이런 시골 마을과 같은 영지가 살아남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다몬 남작은 이안의 설명을 전부 이해했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었다·
“개 같은 귀족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 도망쳤거늘··· 이번에는 내 발로 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안은 남작의 어깨를 슬쩍 두드렸다·
“그런 세상 아니겠습니까·”
어느 세상이나 왕과 같은 존재는 존재한다·
이 시대에는 영주와 귀족들일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4·1·26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