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0
# 80
캐서린은 양치기였다·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집안에 음식이 떨어지자 부잣집에 팔려가듯 일을 하러 떠나게 된 소녀였다·
부자는 캐서린을 양치기의 제자로 맡겨버렸고 양치기는 캐서린을 다음 양치기로 키운 뒤 부자의 양떼를 돌보는 일을 맡겼다·
이 시대의 양치기는 극한직업이었다·
작업의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다· 양들을 들판에 풀어두고 풀을 뜯게 하다가 풀이 다 떨어지면 다음 목초지로 이동하면 끝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모든 일들이 고되고 힘들었다·
넓은 들판에서 혼자서 먹고 자야 했다· 사람은 구경도 할 수 없고 주변에는 양과 개만이 전부였다·
늑대는 언제나 위협적이었고 도적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자칫 잘못해서 양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 손해는 전부 캐서린이 메꿔야 했다·
사람들은 캐서린을 더럽고 수상쩍은 여자라고 손가락질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캐서린에게 미래는 허무한 꿈과 같은 단어였다·
제대로 된 결혼을 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고· 도적에게 납치당해서 노리개로 소모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삶이었다·
‘잘 살고 싶다···’
양치기의 유일한 벗은 양과 별 뿐이다·
그녀는 밤하늘 가득히 떠오른 별들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부자와 결혼해서 떵떵거리며 살게 해주세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세요!’
이루어질 일이 없는 소원이었다·
그렇기에 공상의 영역이었고·
만일 이루어진다면 기적이라 불릴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어느 날 캐서린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가련하고 불쌍한 아이야· 너를 불쌍히 여겨 네게 기회를 주겠노라·’
‘누 누구세요?!’
‘나는 이름 없는 마법사이니라·’
백발에 하얀 눈·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외모의 마법사는 캐서린에게 알 수 없는 알약을 건네주며 말했다·
‘며칠 뒤 드보시 남작이 이 길을 지나갈 것이야· 남작에게 비약을 먹이고 그를 유혹하여라· 그러면 너는 그자의 부인이 될 수 있을 것이야·’
‘정말··· 요?’
캐서린의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의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저 마법사는 누구이고 이 약은 무엇이며 어째서 그녀에게 남작을 유혹하라고 지시하는지·
그러나 마법사는 어느 것 하나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싫다면 그만 두어라· 거절한다면 이건 네 운명이 아닌 것이겠지·’
‘운··· 명?’
‘네겐 두 가지 운명이 있다· 하나는 남작의 부인이 되어 살아가는 운명· 다른 하나는 도적에게 끌려가서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운명이다·’
캐서린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앞날에는 미래가 없다·
지금 이것이 그녀에게 찾아온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할게요! 하겠어요! 하게 해주세요!’
마법사는 웃으며 캐서린의 손에 약을 쥐어주었다·
‘가서 네 운명을 손에 넣어라·’
며칠 뒤 정말로 드보시 남작이 캐서린의 앞을 지나갔다·
심지어 그는 캐서린에게 우물물을 요구했다·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운명·’
캐서린은 마법사의 말에 따라 새로운 운명을 획득했다·
그녀는 남작의 부인이 되었으며 아들을 낳아 잘 길렀다·
비참한 과거는 어둠 속에 묻히고 눈부신 미래만이 찬란하게 빛났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만 느껴졌다·
··· 마법사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진·
‘오래간만이구나 캐서린·’
‘다 당신은!’
‘네가 남작 부인의 운명을 선택했으니· 너와 나의 운명이 겹치게 되었구나·’
마법사의 새하얀 눈동자가 희번뜩하게 빛났다·
‘잘 부탁한다· 아이야·’
마법사가 돌아온 그 순간·
캐서린은 마법사의 노예가 되었다·
#
‘캐서린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
이안은 캐서린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캐서린은 마법사의 고용주가 아니었다· 마법사에게 사로잡힌 노예였다·
그녀는 과거 마법사의 조언을 듣고 남작에게 마법약을 먹였다· 그 결과 남작은 캐서린을 부인으로 삼았으며 그녀는 남작의 부인이 되어 살아갔다·
캐서린은 지금껏 지나가던 마음씨 착한 마법사의 도움을 받은 줄 알았다· 순진한 양치기 소녀다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법 학파 하나를 떠올렸다·
‘··· 시공술사·’
시간과 공간의 신비를 다루는 시공술사들은 미래를 안다· 그들은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하기 위해 현실을 살며 어떻게든 미래를 자기네 입맛대로 고쳐보려고 암약하는 자들이다·
캐서린은 하얀 마법사와의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안이 보기에 그자는 시공술사였다·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긴 시간을 뛰어 넘어 캐서린 부인이 마법사의 노예가 되어버린 일도 전부 시공술사의 계획이라 부를만했다·
‘일부러 캐서린을 남작부인으로 만들고 남작을 병들게 했다···’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긴 했다·
하지만 운명의 실타래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오로지 시공술사만 안다·
“저 저는 그 마법사님이··· 절 가여워해서 남작님을 소개해주신 줄 알았어요·”
“··· 남작님한테 약을 먹일 때 아무 생각도 안 들었습니까?”
캐서린이 울먹이며 말했다·
“천벌 받을 짓이란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마법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면 전 비참하게 죽었을 거라고요!”
“진정하세요·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습니까·”
캐서린을 다시 찾은 마법사는 그녀를 협박하며 협력을 요구했다· 과거의 행적이 들킬까 두려웠던 그녀는 마법사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심지어 마법사는 캐서린의 아들을 영주로 만들어주겠다고 속삭였다·
“남작님이 돌아가신 뒤에 세레나 부인을 마녀로 몰아붙이면 작위가 넘어올 거라고 말했어요·”
“···? 그런데 왜 마법사가 부인의 아들을 영주로···”
또 시공술사의 신묘한 계략인가?
캐서린은 머뭇거리다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여자가··· 제 아들이랑 결혼하겠다고···”
억·
이안은 들끓는 기를 다스리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기가 막혀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 캐서린을 남작 부인으로 만들고· 십 수 년이 지난 뒤에 다시 나타나서 한다는 짓이 뭐?
캐서린의 아들이랑 결혼하겠다고???
시발 이게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야? 크루세이더 어쩌고 하는 중세 시뮬레이터를 즐기다 환생한 현대인 아니야?
이안은 마법사의 계획을 이해했다·
캐서린을 조종해서 세레나 부인과 드보시 남작을 쓱싹해버리고 본인은 캐서린의 아들과 결혼하여 다음 남작 부인이 된다···
그 순간 이안은 확신했다·
시공술사들은 전부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리고 하필 골라도 캐서린의 아들이라니? 그자는 이안도 몇 번 본적이 있다· 괜히 자존심만 강하고 다혈질에 휘둘리기 쉬운 성격 같았는데·
그런 덜떨어진 녀석을 뭐 하러 남편으로 삼는다는···
그때였다·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당장 비켜라!”
“진정하십쇼! 지금 마법사 이안이 남작님의 치료를 하는···”
“닥쳐라! 은밀히 어머니를 불러놓고 대체 무슨 치료를 한다는 말이냐!”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마법사 이안은 신실한 자입니다!”
“흥! 아버지의 병도 고치지 못해서 쩔쩔매는 반푼이들이 말이 많구나! 계속 길을 막으면 강제로 끌어내겠다!”
저 인간 양반은 못 되겠군·
이안은 저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바로 캐서린의 아들이다·
“들어가면 안 되는···!”
밖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남작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아들과 그를 가로 막는 성직자들의 다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안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려 했다·
하지만 적의 행동이 더 빨랐다·
“하악···! 흐윽···!”
“부인?”
“으으윽···!”
캐서린 부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얼굴이 새빨갛고 호흡이 가쁘다·
부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개 같은-”
이안은 강한 의지를 담아 부인에게 소리쳤다·
“정신 차리십쇼!”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아니 소환술 레벨이 부족한 건가? 이안은 드레이크와 우정을 나눴을 정도로 괜찮은 소환술사인데?
적절한 타이밍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벌레와 같은 지성이 없는 미물들은 본능을 이용해야만 통제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본능을 통제당할 일이 없다면 벌레 소환수는 아주 안전하다· 적에게 빼앗길 일이 없으니까!]
[소환의 대가 데모나이트]
잉리언의 벌레 소환수가 그랬다·
이안은 새 떼를 부리는 것을 좋아해서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벌레 소환수는 너무너무 멍청해서 마로니우스 어로 꼬실 수가 없다·
말이 안 통하니 조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소환사를 직접 처리하는 수밖에·
덜컥!
방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아니?!”
이안의 앞에 쓰러진 남작부인·
십자궁을 들고 서 있는 벨렌카·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는 –
너무나 뻔했다·
당황과 분노로 가득한 눈동자가 이안을 바라본다·
“이게 무슨-”
이안은 집중력을 담아 캐서린의 아들의 눈을 자세히 관찰했다·
당황으로 줄어든 눈동자·
표정과 몸짓은 연기력으로 커버할 수 있지만 눈동자의 크기까진 조절하기 매우 어렵다· 그런 건 키라도 못할 것이다·
캐서린의 아들은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즉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벨렌카!”
“이안!”
이안과 벨렌카가 거의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마치 미리 짠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몸을 움직였다·
벨렌카는 십자궁을 내던지고 검을 뽑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아들과 호위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이안은 마법검 아노리실을 뽑아 캐서린의 아들을 향해 겨누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VIP를 확보했다·
“모두 물러나라!”
“벨렌카 경!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자 벨렌카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내 무고함을 증명하고 있다!”
이안은 벨렌카의 뻔뻔함에 속으로 박수를 쳤다·
저게 말로만 듣던 그 정정당당(물리)?
대체 어딜 봐서 저게 무고함의 증명인지 의심스럽지만 사실 중세는 이게 맞았다· 괜히 적에게 사로잡혀봤자 심문이라고 쓰고 고문이라 읽는 혹독한 인터뷰를 당할 게 뻔했다·
무식한 중세식 사법에 뭘 바라겠는가·
이안도 이제 중세인이니 나약한 현대인의 사법 개념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당신을 위해 일해줄 변호사도 믿을 만한 법정도 판사도 없다·
누군가한테 의심을 받고 있다고? 힘으로 해결해!
“마법사 이안!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계시오!”
“알고 있지요· 남작을 구하는 짓입니다·”
“그게 무슨···!”
“캐서린 부인의 아드님이 마법사와 결탁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요·”
이안은 사로잡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대범한 척 하고 있지만 덜덜 떨고 있었다·
“한 번 쥐어 짜보면 남작님을 해친 범인을 찾을 수 있는데· 해볼까요?”
이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행원들이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를 질렀다·
이안은 저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마법사를 찾기 위해 높으신 분을 쥐어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캐서린 아들을 놓아주면 마법사를 찾을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적을 꾀어내야 한다는 소리·
이안은 뒷일은 세레나 부인에게 맡기고 마법사를 유인하기로 결정했다·
마법사는 드보시 성에 많은 투자를 했다· 캐서린 아들을 버리진 못할 것이다·
“벨렌카· 수고 좀 해줘야겠다·”
이안은 살짝 염려스러웠다· 혹시라도 벨렌카가 협조해주지 않을까봐·
하지만 벨렌카는 특유의 무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간만에 큰 건수를 물었는데· 당연히 일해야지·”
프리랜서의 자세가 되어 있는 기사였다·
아무렴· 프리면 일 많을 때 개 같이 뛰어야지·
이안과 벨렌카는 캐서린 아들을 방패삼아 드보시 성을 빠져나갔다·
그것은 대담한 도발이었고·
“내 운명의 장애물이 나타날 줄은 알았지만··· 너는 꽤 미친놈이구나·”
마법사를 끌어낼 만큼 강렬했다·
“너냐? 내 방에 원숭이를 풀어놓은 년이?”
새하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이안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녀의 옷은 하녀복 차림이었다·
“그래· 나는 라라벨· 세상의 비밀을 탐구하는 마법사다·”
마법사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하나 둘씩 나타났다·
마법사 라라벨의 소환수 다이어 울프들이다·
“너와 나의 운명이 맞물렸으니· 하나는 살 것이고 하나는 죽을 것이다·”
라라벨의 의지가 휘몰아쳤다·
그 강렬한 의지를 느끼며 이안은 웃었다·
상대는 뛰어난 소환술사다·
하지만·
이안 역시 만만치 않은 소환술사였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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