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6
일단 오늘은 무리하지 않을 생각이다.
괜히 성급하게 움직여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낼 수도 있으니. 당장 며칠 이내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만큼 급박한 문제도 아니고.
차라리 좀 시간을 들여서라도 확실하게 뿌리부터 뽑아내는 편이 좋겠지.
이 무리에 천천히 섞여들어 입지를 다지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그나저나 율리아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직 그렇게 깊이 빠진 건 아닌 모양인데 단순히 괴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만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만약 전부 알면서도 받아들인 거라면 그때부턴 좀 골치가 아파진다.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직계 혈통의 아가씨가 신분제 철폐를 부르짖는 단체에 속한다니.
만에 하나라도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엄청난 파장이 펼쳐질 것이다. 내가 저지른 특종 기사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겠지.
이 사실을 평생 비밀에 부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가 이 단체에 깊이 연관될수록 정체가 밝혀질 위험성은 올라간다.
만약 급진적 사상을 지닌 드레이크가 율리아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당연히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망설임 없이 이용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그녀에게 돌아가게 되리라.
그런 최악의 결말을 피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더 늦기 전에 율리아가 여기서 나오도록 유도하거나 그게 안 된다면 이 집단 자체를 위험하지 않게 바꿔버리거나.
아무리 호응이 좋다고 한들 결국 아직은 드레이크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혁명이란 무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계속 저런 연설을 듣고 얘기를 나누며 뜻을 같이하다 보면 서서히 드레이크의 가치관과 사상에 녹아들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내가 개입해서 막아야 하는 건가.
벌써부터 상당히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이 될 것임을 깨닫고 머리가 아파졌다.
역시 안 되겠다. 슬슬 집에 가서 쉬지 않으면.
자세한 계획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기로 했다.
드레이크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어수선해진 지하 공간 속에서 조용히 뒤돌아 입구로 걸어가던 찰나.
또다시 그녀가 나를 붙잡아 세우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벌써 가려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인데.”
“원래 오늘은 잠깐만 있다 가려고 했거든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어땠어?”
다소 포괄적인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신선하네요. 조금 충격적이기도 하고요.”
“잘못됐다고 생각해?”
“그 정도는 아니지만요. 솔직히 이런 자리인 줄은 몰랐거든요.”
내 대답에 블랑카는 피식 웃었다.
“맞아. 대부분 처음엔 비슷한 반응이지. 모두가 당황한 채 집으로 돌아가. 그다음에 곰곰이 생각해보는 거야. 그리고는 또 오거나 아니면 영영 오지 않거나.”
“블랑카 씨도 그랬었나요?”
“아마? 그런데 사실 지금도 막 와닿지는 않아. 드레이크의 말 자체는 공감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느낌이지. 원래 그런 게 이 세상이니까.”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와 달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현대적인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니.
지금처럼 귀족이 있고 왕이 다스리고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가 당연한 베이스인 것이다.
반면 드레이크가 주장하는 세상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이다.
왕과 귀족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계라니. 아무리 말로 실컷 떠들어도 와닿지 않을 수밖에.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 점에 관해 무언가 강력하게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흐름이 유지되면 나는 물론 율리아에게도 피해가 닥치리란 사실이 문제일 뿐.
“그래서 다음에도 올 생각?”
“아마도요. 분위기 자체는 꽤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럼 잘 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블랑카.
[너한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설마요. 그냥 원래 성격이 저런 거겠죠.’
애초에 오늘 처음 만나서 대화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인데 호감이 생길 근거가 있나?
[둔감한 녀석. 원래 이성에게 끌릴 때 특별한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은 법이거늘.]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 무의미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블랑카와 친해진다면 드레이크에게 접근할 기회도 자연스레 생기겠지.
[여자의 마음을 이용하다니. 나쁜 남자로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웃고 계신 건데요.’
오히려 그녀야말로 진정한 악질적 성격이었다. 뭐든 간에 조금만 자극적이다 싶으면 유희로 여기면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건 초월적 존재의 고유한 특성인 건가?
그렇게 여신님과 유치한 말다툼을 이어가며 집으로 복귀했다.
***
“으윽···.”
워낙 시끄러운 곳에 있다 돌아와서 그런지 상당히 피곤했지만 지금 바로 침대에 누워버리면 내일 후회할 게 분명해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시도했다.
쉽지 않네. 책에 적힌 글자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하기야 방금까지 클럽에서 신나게 놀다 집에 돌아와서 공부하려는 격인데 잘 되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어쩔 수 없다. 그냥 필기한 노트 한번 쓱 훑고 복습만 해야겠다.
레이첼이 말한 대로 어차피 지금 와서 공부한다며 난리 쳐봐야 달라질 건 없으니까.
“아.”
내일 치는 과목은 필기를 건너뛰었었네.
과거의 내가 왜 그랬나 곰곰이 생각을 돌이켜보니 딱히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그냥 넋 놓고 멍하니 있다 한번 수업 내용을 놓치니 그대로 집어치웠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이래서 수시 성적을 잘 받으려면 처음부터 꾸준하게 진도를 따라갔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 정신 차리고 공부하려 해도 이미 떠나간 버스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좋아. 한 과목은 그냥 깔끔하게 놓아주자. 괜히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아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만큼 선택과 집중으로 다른 과목에서 메꾸면 되는 거잖아.
특히 나는 이론보다 실전에 강한 타입이니 그쪽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참 치졸한 변명이구나.]
“···크흠.”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 머쓱하게 헛기침만 내뱉었다.
솔직히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한심한 자기 합리화긴 했다.
그런데 어쩌겠어. 이미 버스를 놓쳐서 따라잡을 방법이 없는데.
끊임없이 자책하면서 네거티브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엔 차라리 이번엔 어쩔 수 없었으니 다음에 잘하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낫지.
그러면서 또 스스로 세뇌하듯 합리화를 반복했다.
세상에 이런 악순환이 있나.
결국 그런 생각의 흐름이 다다른 끝은 침대에 누워 편해지는 것이었다.
뭐? 시험?
그건 내일의 내가 신경 쓸 문제이고.
오늘의 나는 피곤하니까 좀 쉬어야겠어.
분명 어설프게 공부하는 것보단 이렇게 컨디션과 멘탈을 관리하는 편이 성적 향상에도 도움이 될 거야.
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레이첼의 제안이나 받아들일 걸 그랬나.
괜히 혼자 버려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은 채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반은 평소와 달리 상당히 조용했다.
어제도 그랬지만 참 적응 안 된단 말이지.
하긴 따지고 보면 이게 정상이긴 하다.
마법의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중에서도 재능을 싹틔워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학생은 더 극소수다.
그런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치열하게 경쟁해 무사히 졸업하고 마법사로서 성공하는 사람은?
그쯤 되면 사실상 과장 보태서 이름을 일일이 나열할 수 있을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한 절대다수는 마법이란 신비의 존재에 막연한 동경과 질투심 등만을 느끼며 중간에 포기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는 더 줄어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동시에 신비의 퇴보를 의미했으니. 날이 갈수록 마법사란 존재는 옛 전설에나 나오는 다가가기 꺼림칙한 존재로 인식되는 중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아카데미에선 나 같은 학생이 돌연변이란 거다.
참고로 내 옆에 있는 짝도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겠지.
“응? 뭘 보냐?”
“어제 공부는 잘했어?”
“아니. 하나도 안 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당당하게 선언하는 모습은 평온함을 넘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턱을 괴고서 하품까지 하는 레이첼.
그녀의 입 안에서 반짝거리는 조그만 송곳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와중 시선을 느낀 녀석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뭐 보는데?”
“송곳니.”
“하?”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간 얻어맞을 것 같았기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때마침 율리아가 이쪽으로 다가와 준 덕분에 다행히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다.
“둘 다 좋은 아침!”
“참 상쾌해 보이네. 우등생이라 성적 걱정 없다는 거지?”
레이첼의 빈정거림에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누가 봐도 가장 걱정 없어 보이는 장본인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그럴 리가. 나도 이번 시험은 망했는걸.”
“그 정도면 겸손이 아니라 기만이야.”
“진짜야! 이번에는 다른 일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못했거든···.”
그 얘기를 듣던 내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 다른 일이 뭐길래?”
“어···?”
그러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율리아.
“뭐냐? 불장난하다 걸린 꼬맹이처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험 전날에 노는게 제일 재밌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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