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7
당황하는 율리아를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그녀가 공부를 못했던 이유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괴도 추종자와 관련된 거겠지. 물론 그레이스 가문의 문제도 영향을 끼쳤을 거고.
하필 시험 직전에 여러 일이 한꺼번에 닥쳤으니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그냥 반응이나 보려고 툭 던졌던 건데 생각보다 너무 당황해버려 레이첼의 관심을 끌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조용히 있을걸.
일단 내가 저지른 일이니 더 곤란해지지 않도록 수습을 시도해보았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우리랑 어울려주느라 그런 거겠지.”
“뭐?”
“이번 시험 준비한다고 매일 다 같이 스터디 했잖아. 우리야 모르는 문제 생길 때마다 물어볼 수 있으니까 이득이겠지만 오히려 율리아는 우리 신경 써준다고 집중도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니야.”
내 얘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별다른 반박은 못 하는 레이첼과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손을 흔드는 율리아.
“그런 건 아니야! 나도 도움 많이 됐는걸!”
“괜찮아. 우리도 전부 이해하니까.”
“아 씨. 듣고 보니까 뭐라 할 말이 없네. 다음 기말시험 때는 진짜 빡공 간다.”
다행히 좋은 자극제가 되었는지 레이첼은 곧장 책을 펼쳐 다음 과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율리아. 해명은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처지에 답답해하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물론 나도 대충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댄 말에 불과했다. 원래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개념을 되새기는 식으로 공부할 수도 있으니 아마 그녀에게도 스터디가 아예 도움이 안 됐던 건 아니리라.
율리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레이첼이 듣지 못하도록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중에 둘이서 얘기하자.’
어떻게 뜻을 알아들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는 시험 시간.
시험지를 받아들고 나서야 어제저녁에 그냥 자버렸던 것을 막심이 후회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 중간시험은 망해버린 걸지도.
나도 레이첼처럼 다음 기말시험이나 준비해야 하는 건가.
시험을 치르며 실시간으로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됐다.
시험이 어려우면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진다.
분명 문제가 한참 남았는데도 눈 떠보니 어느새 분침이 훌쩍 지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 시험 문제가 아예 이해조차 안 되는 수준에 이르면 오히려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분명 지금쯤이면 끝날 타이밍일 줄 알았는데 막상 시계를 보니 5분도 흐르지 않은 상태.
그제야 나는 왜 시험 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이 생기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겐 시험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니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심각한 상황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문득 그런 속삭임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포기하면 편해.’
***
어찌어찌 둘째 날의 시험도 모두 끝났다.
성공적이냐고는 묻지 마라. 지금은 그냥 끝났다는 게 중요할 뿐이니까.
아무튼 그 뒤엔 아까 얘기했던 대로 율리아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일부러 다른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아카데미를 벗어나 근처의 인적 드문 공원까지 조용히 걸었다.
“날씨 좋네.”
“응. 그러게.”
그런데 왜 이렇게 아까부터 어색한 거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샤론이면 몰라도 율리아는 원래 성격 자체가 활달하고 외향적이다 보니 둘만 있더라도 아무 거리감 없이 얘기가 곧잘 이어졌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평소보다 조용하다고 해야 하나.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원인은 내가 아니라 율리아인 것 같았다.
내가 일부러 먼저 주제를 던져도 툭툭 끊기는 단답으로만 대답이 돌아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어색한 흐름이 사라지지도 않은 채 목적지인 공원에 도달했다.
“······.”
“크로. 그래서 할 얘기란 게 뭐야?”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상태로 얘기를 꺼내봤자 저번처럼 멋쩍게 웃으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도망칠 게 뻔했다.
이유는 전혀 모르겠다.
어쩌면 나를 경계하는 걸지도.
하지만 율리아를 돕기 위해선 반드시 그녀 본인의 협조가 필요했다.
아무리 내가 괴도 추종자 모임에 잠입해 열심히 개고생해도 율리아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 없는 헛수고에 불과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아예 판을 싹 엎어버리기로 했다.
이 적막한 공원은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기분 전환이나 하러 갈래?”
“응? 지금···?”
“너도 이번 시험 별로라면서. 같이 재충전하는 느낌으로 잠깐 어울려달란 거지.”
율리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딱히 상관은 없는데 어디를 가려고?”
“네가 좋아하는 곳.”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방향이 겹친 덕분에 완전 헛걸음은 아니었다는 거다.
우리는 그대로 공원을 가로질러 도심 속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렇게 잠시 후 도착한 장소에 율리아는 걸음을 멈춰 서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여기 기억하고 있었구나.”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이제 한 달쯤 흘렀나?
그때는 아직 밤이 꽤 쌀쌀했던 초봄이었다. 그래서 늦은 밤에 만났던 그녀는 평상시의 교복이 아니라 검은 코트를 동여매고 있었지.
처음 그녀를 봤을 땐 얼마나 놀랐었는지.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미리 조사할 명목으로 미술관에 방문했던 건데 거기서 떡하니 마주쳐버렸으니.
그 당시엔 괴도 일에 익숙해지기도 전이라 혹시 들키는 건 아닐까 걱정도 많이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날 율리아와 만나 단둘이 얘기를 나눈 시점 이후로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기껏해야 같은 반에 우연히 같은 조로 묶인 애매한 사이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거의 매일 붙어 다니는 절친 같은 느낌이랄까.
“···오랜만이네.”
그녀도 나랑 비슷한 추억을 되새기는지 아련한 눈빛으로 미술관을 쳐다보았다.
“가끔 생각이 복잡해질 때 온다고 했었잖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막상 그렇게 말해놓고선 그 뒤로 한 번도 못 왔지만.”
애써 웃는 미소 속에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가자.”
“응.”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부 풍경.
안에 들어오니까 여기서 쌓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특히 조각상 위에 올라타 있다가 셜록과 가젯 앞에서 깜짝 등장했을 때라던가.
미술관이라는 장소에 어울리는 추억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내가 훔쳤던 그림이 있던 자리는 텅텅 비어있었다.
하긴 그림을 훔치고 딱히 돌려주지를 않았으니까 똑같이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다른 작품으로 대체하기보단 그냥 빈 상태로 놔둔 모양이다.
우리는 지난번과 똑같이 그 앞에 나란히 섰다.
비록 함께 감상했던 폭풍우 치는 바다 위 등대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 걸려있던 그림말이야. 우리가 그림 보고 같이 얘기했던 그 날 괴도가 훔쳐버렸대. 신기하지?”
“진짜? 신기한 우연이네.”
음. 그게 사실 우연이 아니긴 해.
우리는 새하얀 벽지만을 응시하며 서로 얘기를 나눴다.
“여기서 네 고민에 관해 얘기했었잖아.”
“···응.”
“그래서 와봤어. 그때랑 똑같아 보여서.”
“그 정도로 티 많이 났어?”
“살짝?”
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숨기려 해봤는데 왜 그렇게 예리한 거야.”
“네가 자꾸 신경 쓰이게 하질 말던가.”
“···바보.”
다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으나 이번엔 아까와 달리 분위기가 달랐다.
마치 단둘이서 한 달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아까 말했지. 우리가 그림을 본 그날 바로 레이븐이 훔쳐 갔다고.”
“응.”
“사실 그 그림이 내가 이 미술관에 오던 이유였거든.”
“···진짜?”
잠깐만.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난 그런 사실 전혀 몰랐다고. 원작에 나오지도 않았던 내용이란 말이야.
설마 이번에도 망할 나비효과인 건가?
“계속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역시 그게 결정적인 거 같아.”
“무슨 이유?”
“내가 괴도를 좋아하는 이유.”
대화의 맥락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괴도가 훔쳤다. 그래서 괴도가 좋아졌다?
“그 그림을 좋아한 건 아니야. 우중충하잖아. 바다도 시꺼멓고. 혼자 빛나는 등대는 외로워 보이고.”
굳이 내가 뭔가를 말할 타이밍은 아닌 듯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냥 조용히 들어주는 것뿐이지 않을까.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까 그 등대가 약간 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우울할 때마다 여기 와서 멍하게 바라보게 되는 거 있지.”
“응.”
“그런데 그 그림이 사라진 뒤부터는 뭔가 달라진 거 같았어. 물론 진짜 이유는 진짜 친구들을 사귄 덕분이었지만. 왜인지 그게 괴도가 선물해진 것처럼 느꼈다고 해야 하나?”
이제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별다른 접점도 없던 율리아가 왜 괴도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지.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일지도 몰라. 항상 내 그림이었던 등대를 가만히 바라보던 같은 반 친구한테 관심이 간 것도.”
···어?
“있지. 나 고백할 게 있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제 너무 피곤해서 글을 쓰다 도중에 잠들어버렸어용…
죄송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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