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8
“있지. 나 고백할 게 있어.”
율리아의 덤덤한 고백 선언에 반사적으로 움찔 놀라고 말았다.
“사실 며칠 전에 레이븐을 직접 만났거든.”
“···아 그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겨우 맞장구쳐주었다.
그래. 당연히 그런 고백일 리가 없잖아.
애초에 저번에 그레이스 저택에서도 똑같이 당해놓고는 또 긴장해버렸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이 분위기나 말하는 뉘앙스가 솔직히 오해하기 쉽긴 했다.
[기대했던 거냐?]
‘걱정했던 것뿐이에요.’
[후후. 그렇다고 쳐주마.]
“잘 된 거 아니야? 전부터 괴도랑 만나보고 싶어 했었잖아.”
“응. 그런데 뭐랄까. 내가 생각했던 느낌이랑은 조금 달라서.”
“어떻게 달랐길래?”
그녀는 잠깐 멈칫하다 내 눈을 정확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익숙한 느낌이었거든.”
“···그래?”
“분명 처음 마주 보고 얘기하는 건데도. 친한 친구랑 떠드는 것처럼 하나도 안 어색하고 떨리지도 않았어.”
설마 내가 레이븐이란 사실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마도 거기까진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정도가 아닐까.
그 정도야 원래 율리아가 상당히 감이 예리한 캐릭터란 점을 고려하면 심각한 문제도 아니었다.
“혹시 그게 최근 고민하던 문제인 거야?”
“조금 달라. 거의 비슷하긴 하지만.”
“그럼 어떤 고민인지 말해줄 수 있어?”
만약 내가 똑같은 질문을 아까 전의 공원에서 했다면 율리아는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둘만의 추억이 깃든 이 공간에서 충분한 감정적 교감을 나눈 지금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기 시작했다.
“괴도 추종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
“그야···. 괴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야?”
이미 어제 그들의 모임에 참석해 실상을 파악했었지만 그런 사실은 고이 접어두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반적인 인식에 맞춰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마음이 같은 사람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모임에 가봤어.”
“그런데 생각과는 달랐던 거구나.”
“응. 정확해.”
율리아는 그날 자신이 갔던 모임을 떠올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대놓고 왕실과 귀족들을 욕했어. 부자들을 증오하고 레이븐을 영웅으로 떠받들었지.”
그 모습을 처음 목격했을 때 과연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부잣집 귀족 아가씨가 받아들이기엔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지금 율리아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표정으로 보아 그런 드레이크의 사상에 감화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들이었어. 단순한 개인의 원한이 아니라 자신과 반대편이란 이유만으로 해당 계층을 모두 혐오할 수 있다는 것도.”
만약 그녀가 괴도 추종자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면 해결법은 수월해진다.
그냥 앞으로 모임을 멀리하기만 한다면 율리아에게 피해가 끼칠 가능성은 없어지리라.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억지로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
“잘못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걸까?”
그러나 율리아는 속이 깊어서인지 그렇게 단순히 결론짓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는 거라면? 잘못된 건 오히려 우리일 수도 있는 거잖아.”
“알겠어. 그게 고민이었구나.”
“···바보 같지? 어차피 내가 뭔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고민에 휩싸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창 격변하는 시대이니 기존의 가치관은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문제는 그런 생각이 율리아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다. 특히 괴도 추종자들과 깊이 연관될수록 위험성은 더더욱 커져만 가겠지.
역시 쉽게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네.
지금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건 율리아의 확실한 생각이다. 먼저 그걸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갈지 분명하게 정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 그 사람들이 왜 우리를 미워하는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데 그랬다가 만약 가문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녀가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는 아마도 지난주 주말에 있던 그레이스 저택 사건 때문이겠지.
이미 가주가 낌새를 알아차려 버렸으니 더 활동하기가 두려운 탓이리라.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도 모르게 제대로 얽혀있네.
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을 거듭하다 율리아에게 제안했다.
“그럼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때?”
“···같이?”
“결국 지금 문제가 혼자 가긴 겁난다는 거잖아. 그럼 나랑 같이 가자. 만약 너희 집안에 들키더라도 내가 억지로 끌고 갔다고 둘러대면 되지.”
“하지만 그러면 네가···.”
“뭐 어때. 원래 친구 사이에 그 정도 민폐는 끼쳐도 되는 거야.”
율리아를 혼자 보내는 건 위험하다. 그랬다가 만약 정체라도 들키는 순간엔 진짜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옆에 붙어 다니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물론 지금은 무리고 시험이 전부 끝나면 한번 가보자.”
“···응. 고마워.”
다행히 그녀도 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렇게 한창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늦어버렸다.
다음 날 있을 시험 준비를 위해 슬슬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오늘 정말로 고마웠어.”
“나야말로. 덕분에 기분 전환 잘 됐거든.”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 앞으로도 무슨 고민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해줘.”
“응. 그럴게. 안녕!”
***
좋아.
이제 시험이 끝나면 율리아와 함께 지하 모임에 가서···.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여신님이 오랜만에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참 헌신적이구나.]
“네?”
[친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도와주다니. 너무 갸륵한 우정 아니더냐?]
“또 이상한 소리 하시려고요? 그냥 친구 사이거든요.”
[나도 안다. 너는 다른 아이를 위해서도 기꺼이 움직였었으니까.]
“갑자기 무슨 얘기에요?”
[너무 무리할 필요까진 없다는 뜻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이 전부 네 책임이라고 생각하진 않느냐?]
“그런 건···.”
그래.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이 세계에 빙의해 괴도로 활동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중에는 물론 좋은 결과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분명 존재했다.
특히 레이첼과 율리아는 모두 후자에 가까웠다.
나로 인해 라파노 저택에서 일하던 레이첼의 언니가 잘렸고 그 사건은 나비효과로 이어져 레이첼이 드라칸의 실험체가 되도록 만들었다.
율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였던 그림을 훔치면서 가치관이 변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해버렸다. 결국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가주의 심기를 거스른 것도 모자라 가문 내 문제아로 낙인찍힐 뻔했다.
전부 내 잘못이라고까진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나서서 수습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내 책임인 건 맞았다.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으니 내가 책임져야 했다.
[인간이란 왜 이리도 어리석은 것인지. 물론 그렇기에 더욱 귀여운 거겠지만.]
“네?”
[크로 모리스. 네 머릿속에 있는 ‘세상’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내가 기억하는 이 세상.
만화라는 창작물로 그려졌던 원작의 세계관.
[그럼 하나만 더 묻지. 그 원작에 내가 등장하느냐?]
“···아니요.”
그녀는 등장하지 않는다.
애초에 원작이 묘사한 세계는 철저하게 주인공인 레이어드에게 맞춰져 있다.
즉 아무리 강하고 중요한 존재일지라도 주인공과 관련되지 않으면 원작에선 엑스트라로 전락하거나 아예 존재하는지조차 언급되지 않고 넘어가게 된다.
[네가 어떤 경로로 이 세상에 대해 알게 됐건 그것은 단지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원작’의 흐름대로 맞추려 하는 행동이야말로 질서를 무너뜨리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여신님의 말뜻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친구들을 돕지 말라는 뜻인가요?”
[아니.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기억하라는 말이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잊지 말거라.]
가장 중요한 목표.
그게 뭐였지?
애초에 나한테 그런 게 있었던가?
문득 처음으로 되돌아가 내가 어째서 여신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괴도로 살아가게 됐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보석의 힘을 모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귀환을 간절히 바랐던 건 아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게 전부였다.
모처럼 내가 좋아하는 만화 세상에 떨어졌는데 엑스트라로 아무 존재감 없이 지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낭만이 넘치는 괴도가 되기로 했던 것뿐이다.
즉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살고 싶었다.
“······.”
거기까지 결론이 다다르고 나서야 여신님의 말뜻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후후. 오랜만이구나.]
“그렇네요.”
[역시 넌 그 모습이 제일 어울리는구나. 레이븐.]
조용한 마법 아카데미 학생도.
수상하게 돈이 많은 재단 이사도.
그 외의 다양한 모습도 물론 좋지만.
그래도 역시 내 진정한 모습은 낭만 넘치는 괴도였다.
그러고 보면 요즘 활동을 너무 오래 쉬긴 했지.
오랜만에 다시 한번 나서볼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괴도는 괴도답게 사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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