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과제 발표는 다음 주.
즉 일주일 안에 자료를 조사해 발표 내용을 완성해야 했다.
“시간에 쫓기는 것보단 바로 하는 편이 좋을 거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조장 역할을 맡은 율리아가 먼저 제안을 꺼냈다.
물론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조별 과제의 악랄함을 생각하면 차라리 바로 해치워버리는 편이 조금이라도 나을 테니까.
“나는 좋다고 생각해.”
내가 먼저 동의 표를 던지자 자연스레 남은 두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여태껏 쭉 조용히 있던 샤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참 짧은 대답이구나.
그래도 아예 입을 다무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이제 남은 건 한 명인가?
레이첼은 귀를 후비면서 시큰둥한 태도로 답했다.
“굳이? 귀찮은데 천천히 해도 되잖아.”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저런 태도가 가장 위험하다. 아마 이번 조별 과제에서 빌런 역할을 하나만 꼽자면 누가 뭐래도 레이첼이 맡을 것이 뻔했다.
저렇게 귀찮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미루다가 발표 당일이 되어서야 무책임하게 말하는 거다.
자료 조사 깜빡했다며. 그 순간에 피어오르는 분노는 직접 겪어야지만 이해할 수 있다.
[쌓인 울분이 많은가 보구나.]
흠흠. 잠시 흥분해버렸네.
아무튼 이런 전개는 좋지 않았다.
조금 세게 나가서 밀어붙여도 될 텐데 심성이 고운 율리아는 조원의 의견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어느 시간이 제일 괜찮아?”
“굳이 모일 필요까지 있나? 그냥 자기가 맡은 분량만 신경 써서 대충 발표하면 끝이잖아.”
“음···.”
결국 내가 나서서 모여야 하는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렇게 각자 진행하면 소통이 제대로 안 돼서 훨씬 번거롭고 비효율적일 거야. 차라리 한번 제대로 모여서 바로 진행한 다음에 개인 역할은 추가로 하는 게 어때?”
레이첼은 표정을 구기며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귀찮아. 그리고 찐따 너.”
갑자기 나를 삿대질하더니 괴상한 의심을 펼친다.
“사실은 이상한 마음 품은 거 아니야?”
“···어?”
“여자 셋에 남자 하나.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해? 조 결성될 때 보니까 아주 좋아 죽던데.”
어이. 어디서 사실을 왜곡하는 거냐.
내가 좋아했던 건 율리아가 같이 조 하자고 제안했을 때뿐이다. 남은 인원이 너희 둘로 채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오히려 절망했다고.
[쳇. 들켰나?]
‘뭔 소리예요!’
당신이 왜 거기에 순순히 수긍하는 건데!?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내 취향은 하렘이 아니라 순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순애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다.
아마도.
“레이첼. 이유도 없이 추측만으로 몰아가면 안 돼. 게다가 크로는 그럴 애가 아닌걸?”
율리아가 나를 두둔해주다니. 살짝 감동해버렸다.
“재미없긴. 나도 농담한 거야. 야 찐따. 맞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며 억지 공감을 강요하는 레이첼.
평화로운 조별 과제를 위해 꾹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하하. 물론이지.”
“그러면 같이 모여서 과제 하는 거지? 레이첼. 괜찮지?”
“···그래. 알았으니까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좀 마.”
오오. 생각보다 순순히 의견을 굽히는 레이첼의 모습은 다소 의외였다.
설마 저런 쪽에 약한 건가? 순수한 미소에 허물어지는 상성 구도인 건가?
“이왕 말 나온 김에 오늘 바로 하는 건 어떨까? 다들 괜찮아?”
나랑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론은 어때?”
“괜찮아.”
그렇게 우리 8조는 오늘 수업이 마치자마자 모여서 조별 과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아직도 남아있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장소는 어떻게 하지?”
“그냥 카페에서 하면 안 되나.”
내 제안에 율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얘기했다.
“카페보단 집이 좋을 거 같아. 카페에서 과제 얘기로 떠들면 민폐일 수도 있잖아?”
“음. 그렇긴 하지.”
“오케이. 그러면 다 정해졌네.”
응? 다 정해졌다고?
레이첼의 미소가 어째선지 굉장히 불길했다.
***
다 정해졌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수업을 끝마친 뒤 나는 아카데미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3명의 여학생과 함께.
“오. 찐따. 생각보다 집 좋잖아?”
“크로. 하루만 실례할게.”
레이첼이 아까처럼 불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루는 무슨. 발표할 때까지 일주일 내내 실례해야지.”
잠깐! 그런 얘기는 없었잖아!
“크로도 쉬어야 하잖아. 매일 우리가 오면 불편할 거야.”
“불편은 개뿔. 이렇게 예쁜 미녀들이 매일 집에 찾아와준다는데 감사해야지. 안 그래?”
“······.”
“야 찐따. 표정 풀어. 나는 농담도 못 하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필 내 집이 모임 장소로 뽑히게 돼버리다니.
그런데 막상 다른 집은 전부 그럴듯한 사정이 있어서 뭐라 불평할 수도 없었다.
아카데미와 가까운 거리의 자취방.
사실 아지트가 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이 또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평소에도 꼼꼼히 신경 써서 정리하는 편이라 괴도 레이븐에 관한 정보가 나올 염려는 없다는 것 정도.
겉으로 보기엔 그냥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의 자취방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냅다 침대에 누워버리는 레이첼.
“오. 푹신푹신하네.”
“···너는 내가 자던 침대에 막 누워도 괜찮아?”
“응? 그게 뭔 소리일까. 설마 지금 막 이상한 상상하는 거 아니지?”
아니 상식적으로 보통은 안 그러잖아.
하물며 같은 동성 친구 집에서도 침대엔 함부로 안 누울 텐데 이성 친구의 집에서 저렇게 침대에 마구 누워버린다니.
“미안한데 누나는 너 같은 찐따랑 사귈 마음은 없거든? 그러니까 꿈 깨셔.”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망상으로 고백을 거절하는 레이첼.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관대한 아량을 지닌 내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슬슬 과제 시작하자. 레이첼도 내려와서 여기 앉아줘.”
“네. 네. 우리 조장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죠.”
스르륵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는 레이첼.
그나저나 샤론은 어디 있지? 딱히 크지도 않은 집에서 보여야 할 소녀가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꼭꼭 숨어버렸다.
혹시 화장실에 갔나?
굳게 닫혀있는 화장실 문.
나는 조심스레 노크하며 안에 샤론이 있는지 확인했다.
“샤론. 안에 있어?”
“응. 잠시만.”
아 화장실에 있었구나.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샤론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어라. 저건···?
“크로. 이건 뭐야?”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에 든 것을 들어 올리는 샤론.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 손수건이야.”
붉은 손수건. 내 마술용품 중 하나이다.
어젯밤 하수도에서 탈출을 위해 손수건 하나를 썼던 탓에 예비용을 꺼내놨는데 화장실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깜빡했던 모양이다.
“흠···.”
손수건을 지긋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샤론.
뭐지? 설마 들킨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저 손수건에 딱히 표시해놓은 건 전혀 없으니 저것만 보고서 내가 괴도 레이븐이라 추측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술용 소품이지?”
“응? 아···. 그런 셈이지.”
“그렇구나. 너는 마술사였지.”
내 개성 마법을 기억하는 건가. 조금 의외였으나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지난번 레이어드와의 대련이 아이들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됐으니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샤론의 초록색 눈동자가 잠시 나를 훑고 지나갔다.
손수건을 돌려주면서 방으로 먼저 들어가는 얼음 공주.
나는 손에 쥔 새빨간 손수건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
“발표 주제를 정해야 해.”
“과제 내용이 뭐였더라?”
“유명한 마법사를 조사하는 거야. 누가 좋을까?”
방에 4명이 한자리에 모여 과제를 주제로 토의를 시작했다.
사실 유명한 마법사야 셀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신비가 시작된 역사 속에서 마법을 다루는 자는 언제나 이어져 왔으니까.
그중에는 현실의 신화나 전설 속 인물이 원작 세계관에선 실존했던 마법사로 그려지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멀린이라던지.
원작의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가장 유명한 마법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다.
“대충 멀린으로 하자.”
역시 바로 후보로 거론되었다. 과제를 후딱 끝내고 싶은 마음뿐인 레이첼의 입에서 가장 무난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음···. 그건 너무 평범하지 않을까? 다른 조랑 겹칠지도 모르고.”
율리아는 멀린이란 선택지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조장님이 골라주시죠.”
“굳이 옛날 마법사보단 현재 활동하는 마법사는 어때?”
“누구? 아드리아스?”
이번에는 원작에서 꽤 비중 있는 캐릭터의 이름이 나왔다.
원작 캐릭터 입에서 나오는 원작 캐릭터라니. 이렇게 들으니까 색다른 느낌이네.
“글쎄. 누가 좋을까.”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에 잠기는 율리아.
나도 마땅히 이거다 싶은 이름은 떠오르지 않아서 얌전히 입 다물고 있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인 샤론이 의견을 제시했다.
“레이븐은 어때?”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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