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러니까 진주를 가지려면 인어랑 결혼해야 한다는 거야?
“아니 저는···.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요.”
“그래. 물론 당혹스럽겠지. 하지만 이건 분명 너에게도 좋은 제안일 것이다.”
그걸 왜 당신 멋대로 정하는데.
나는 처음 보는 이종족 아가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척박한 육지가 아니라 생명이 가득한 이 낙원에서 메로우의 왕으로 바다를 지배하는 거다.”
자기 소속에 자부심을 가지는 거야 좋지만 육지도 그렇게 척박한 곳은 아닌데 말이지.
“보니까 여왕 폐하께서 잘 다스리고 계신 거 같은데 굳이 제가 뜬금없이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예언에선 천년 진주의 주인이 메로우를 다스릴 때 파라다이스는 최전성기를 맞이하며 태평성대 부국강병 부귀영화를 누리리라고 했으니까.”
그냥 온갖 좋은 말은 다 때려 박아 넣은 것뿐이잖아.
상식적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건 둘째치고 종족부터 다른 존재가 갑자기 통치자가 되어봤자 잘 다스릴 수 있겠냐고. 당장 수정 아가미가 없으면 바닷속에선 숨도 못 쉬는데.
제발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옆에 있던 아리엘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내 간절한 시선을 못 본 척 의도적으로 피해버렸다.
아까 방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긴 했어도 설마 이런 전개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투 신청을 각오했는데 수줍은 고백을 받은 느낌이랄까.
지금으로선 차라리 전자가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분위기를 보아선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흐름은 절대 아니었다. 내 결정이 느려지고 머뭇거릴수록 거절하기는 더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 아무리 좋은 보석이라 해도 고작 그거 하나를 얻기 위해 강제로 결혼해서 평생을 바닷속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천년 진주는 깔끔하게 포기하자. 인어를 만나고 이런 낭만적인 테마파크를 감상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그 진주의 주인이 아닌 것 같으니 이만 육지로 돌아가겠습니다.”
“흠···. 아쉽구나.”
“분명 저보다 훨씬 뛰어나고 지혜로운 진주의 주인이 나타나서 예언을 이뤄줄 겁니다.”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란다.”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착각을 정정해주는 인어 여왕.
“이제부터 사위가 될 그대와 한동안 불편하게 될까 아쉽다는 것일 뿐.”
“···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육지의 인간이여.”
뒤늦게 위험을 인지하고 알현실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내 주변을 둘러싸는 왕실 친위대 인어들.
고백 공격에서 한 번 더 꼬아서 사실은 결투 신청이었다고? 이럴 거면 처음부터 대놓고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다.
배신감을 느끼며 이를 짓씹던 것도 잠시 일단 침착하게 적들을 살피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얌전히 투항해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웃기시네. 정말 예언의 왕으로 생각한다면 당장 그 삼지창부터 거둬주지?”
“어쩔 수 없다. 이건 전부 메로우를 위해서니.”
적들 가운데서 가장 덩치가 큰 상어처럼 생긴 녀석이 그렇게 말하고는 적들은 동시에 덮쳐들었다.
물론 가만히 잡혀줄 생각은 없었다.
곧바로 준비해뒀던 마법을 이용해 수중에 연막을 흩뿌렸다.
“이건···!?”
“얄팍한 수를 쓰는구나!”
당황하던 적들 사이에서 인어 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자 그대로 연기를 전부 흡입해버렸다.
저건 또 뭔데. 한껏 부푼 몸을 보니까 설마 복어 출신인 건가?
이번에는 카드를 던졌다. 물 속이라 느릿느릿 날아가던 카드는 이내 푸른 빛의 마법 쇠사슬을 만들어내 적들을 단체로 속박시켰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리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건···.”
“뭣들 하느냐! 인간이 도망치게 놔둬선 안 된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수영을 쳐봐도 물속에서 지느러미를 장착한 인어를 따돌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순식간에 내게 달라붙어서 방해하는 친위대들.
마법으로 최대한 저항해보았으나 결국 한계에 직면하고 말았다. 게다가 친위대 대장으로 보이는 상어 인어가 너무 강했다. 삼지창을 휘두를 때마다 마법을 전부 튕겨내니까 헛웃음이 나올 지경.
결국 그대로 사로잡혀 포박되고 말았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소녀에게 간절히 외쳤다.
“아리엘! 도와줘!!”
“······.”
“이런 거였어? 처음부터 날 속일 생각이었냐고!”
애써 눈을 감고 무시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는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귀빈이시여.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마지막으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는 바닷속에서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귀빈?
웃기고 있네.
세상 어떤 국가가 귀빈을 이렇게 독방에 감금시켜놓겠냐고.
그래도 감방 안에 집어넣지 않아 준 걸 감사해야 하는 건가?
만약 인어들이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당장 뺨에 붙어있는 수정 아가미를 떼기만 하면 된다.
그 말은 즉 저들은 나를 죽일 생각까진 없다고 봐야겠지.
사실 여왕의 말만 되새겨봐도 인어들의 의도가 무엇일지는 뻔했다.
기어코 나를 메로우와 결혼시켜 예언의 주인으로 만들겠다는 거다.
이쯤 되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싶을 정도다.
단순히 부국강병을 누리기 때문이라기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신경 쓰는 느낌이었으니까.
나한테는 아무 상관 없는 얘기였지만.
내 처지를 돌이켜 보니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결국 목표로 했던 천년 진주는커녕 이런 해저 삼만리에 갇혀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방법도 없으니.
물론 이런 방 하나쯤이야 마술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이곳이 정확히 어디고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 혼자 육지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오만에 불과했다.
결국 이곳을 탈출하려면 좋든 싫든 인어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
아침 식사 시간인가? 그렇다면 이미 아카데미에 가긴 글렀다는 거겠군.
하지만 가만히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자 내가 먼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뭡니까.”
“레이븐님. 저예요.”
“···아리엘?”
예상 밖의 목소리에 살짝 놀랐으나 결국 그녀도 똑같은 한패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아리엘이야말로 내게 순수한 척 먼저 다가와서는 시원하게 뒤통수를 갈긴 주범이 아니던가? 청초한 미모에 홀려서 방심한 내가 멍청했지.
“할 얘기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잠깐 들어갈게요.”
“네?”
대답을 듣지도 않고서 멋대로 잠금을 풀고 안에 들어오는 아리엘.
이런 상황에서도 순간 넋을 놓을 만큼 예쁘긴 했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정말 죄송해요···.”
“지금 와서 사과해봤자 뭔 소용입니까. 자기만족일 뿐이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할 뿐인 사과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 게 아니에요···! 여기 찾아오기 전까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이번 일은 저희가 잘못한 게 맞아요. 그러니까 제가 대표로 사과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사과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여기서 나가게 해드릴게요.”
내 말을 끊고 훅 들어오는 아리엘의 당당한 선언.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아니면 이것도 단순히 미모에 홀린 것뿐인가?
“아마 저희가 왜 이렇게까지 예언에 매달려서 레이븐님을 붙잡는 건지 궁금하시겠죠.”
“당연히요. 말 나온 김에 대체 왜 그런 건지나 알려 주시죠.”
“이곳 파라다이스는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큰 위험에 처해 있어요.”
위험이라. 궁전을 돌아다닐 땐 딱히 눈치채지 못했는데.
사실 여기 오게 된 지 반나절도 안 됐으니 몰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바로 북쪽에서 온 괴물이에요.”
“음···. 이름만 들어도 꽤 큰 위험일 거 같네요.”
“맞아요. 그 거대한 괴물은 매우 흉포해서 저희 메로우를 보는 순간 해치려 들죠. 지금까지 어떻게든 녀석을 막아보기 위해 전사들이 최선을 다해 싸워봤지만··· 괴물은 지금도 계속해서 이곳 파라다이스를 향해 내려오고 있어요.”
그래. 대충 이해했다.
요컨대 예언의 주인을 그토록 애타게 찾던 이유도 결국.
“제가 괴물을 쓰러트리고 다시 평화를 가져오길 바랐다는 거군요.”
“맞아요. 저를 포함해 모두가 레이븐님에게 희망을 기대고 있어요.”
아니 그 마음이야 이해하겠는데 문제는 내가 그만큼 훌륭한 용사가 아니란 말이지.
“아까 봤어요. 레이븐님이 사용하시던 건 마법인 거죠?”
“어···. 마법이긴 하죠.”
“역시 그랬군요! 책에서 읽었어요! 땅에 사는 인간 중에는 신비한 힘인 마법을 다룰 줄 안다고!”
인어는 마법을 못 쓰는 건가? 방금 그 연기를 흡입한 복어 인어는 충분히 마법 급이던데.
아리엘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내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굉장히 부담스럽다. 미안하지만 나는 북쪽에서 온 거대 괴물을 물리칠 자신이 없단 말이야.
“괴물만 퇴치해주신다면 진주도 드리고 바로 집으로도 돌려 보내드릴게요···. 네?”
“음···.”
괜히 어쭙잖게 받아들여 헛된 희망을 심어줄 바에야 지금 확실하게 거절하는 편이 좋겠지.
나로서는 힘들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하려던 순간.
여태껏 조용히 있던 여신님이 얘기했다.
[받아들이거라.]
‘···네? 진심이세요?’
[물론. 그 괴물은 너로서도 손쉽게 무찌를 수 있는 녀석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과연 괴물의 정체는!?
모르겟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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