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6
또 이 녀석인가?
이젠 지긋지긋할 정도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무조건 말을 걸면서 시비를 거는 녀석.
이름은 진 그레인저.
생긴 건 완전히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주제에 사실은 남자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다.
참고로 성격은 원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지 않다.
“설마 이번에도 무시할 생각은 아니겠지?”
“어? 그럴 리가. 당연히 인사는 받아줘야지. 하하.”
괜히 이놈 성질을 긁어봤자 나만 피곤해질 뿐이니 대충 맞춰주고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하.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지난번에 받았던 그 굴욕은 아직도 잊지 않았다고.”
“어···?”
네가 나한테 굴욕을 받았다고? 대체 언제?
미안한데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요새 워낙 많은 일이 있던지라 이 녀석과의 만남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뻘쭘하게 서 있자 녀석은 단단히 뿔이 났는지 삼백안을 치켜뜨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 멍청이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인데 벌써 잊었단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큰일이다. 제대로 성질을 긁어버렸어.
“촌스럽게 생긴 시골 촌뜨기 놈이랑 같이 나를 무시했었잖아!!”
“아. 레이어드 말이구나. 그래. 기억났어.”
녀석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맞아. 복도에서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땐 지금처럼 단둘이 아니라 레이어드도 같이 있었었지.
원작에서도 라이벌 관계인 둘은 자연스레 신경전을 벌였는데 문제는 그사이에 내가 껴버려서 매우 곤란했었다는 사실이다.
떠올리고 나니까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올 정도로 좋지 않은 추억이었다.
“그래.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네. 그럼 네 잘못을 인정하는 거지?”
“아니. 난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저절로 튀어나온 본심.
그럼에도 의외로 녀석은 별달리 흥분하지 않고 오히려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너 같은 뺀질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뺀질이?”
“그래. 항상 대충 웃으면서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뺀질이 녀석.”
내 얼굴에 대놓고 삿대질하며 친히 별명까지 하사해주는 그레인저.
아무래도 단단히 눈도장 찍힌 모양인데 내 바람과는 달리 이대로라면 만날 때마다 계속 귀찮게 할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다.
“음···. 사실 지금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셔서 말이야.”
“또 그렇게 은근슬쩍 핑계나 대면서 도망치려고?”
아니 이번에는 진짜거든?
물론 내가 여태껏 핑계를 대면서 도망친 건 맞는데 지금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교무실에 가는 길이었다고.
녀석은 깔보는 듯한 냉소적인 썩소와 함께 선전 포고를 날렸다.
“오늘은 특별히 그냥 보내줄게. 어차피 다음에는 피하고 싶어도 못 피할 테니까.”
“그래. 만나서 반가웠고 다음에 보자. 안녕.”
뭔 뜻인지는 몰라도 대충 대답해주면서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다음엔 피하고 싶어도 못 피할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그냥 중2병 발언이겠지.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레인저의 선전 포고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된 건 다음 날이었다.
***
기나긴 시험 주간도 어느덧 끝자락을 맞이했다.
고통스럽던 이론 과목이 모두 끝나고 이제 실전 과목만 남은 것이다.
총 3일간 진행됐던 이론 시험과 오늘부터 이틀 동안 진행되는 실기 시험.
아직 1학년이기 때문에 비중은 이론이 더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실전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무리 이론이 빠삭해 봐야 실전에서 무너지면 헛지식인 건 마법에서도 통용되는 진리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은 실전파에겐 바로 오늘부터가 진정한 시험의 시작인 셈이었다.
즉 이전 날에 망쳐버린 과목들은 깔끔하게 잊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실기 시험은 이론 시험을 치를 때와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전교생을 전부 평가해야 하는데 시험지를 나눠주고 풀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험관이 꼼꼼하게 하나하나 채점을 매겨야 하니 진행이 더딜 수밖에 없다.
그 문제점을 메꾸는 방법이 바로 시험관의 수를 대폭 늘리는 것이다.
교사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늘리냐고?
답은 간단하다. 외부 인력을 초청하는 거다. 아카데미는 시험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마탑에 지원을 요청해 전문 시험관을 파견시킨다.
참고로 이 중에는 취업과 연계될 수도 있는 전문 스카우트들도 섞여 있다.
이제 왜 이론보다 실기가 훨씬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했는지 알겠는가?
시험을 잘 치르면 단순히 성적을 잘 받는 것 이상으로 외부에 눈도장도 찍을 수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특히 졸업반 학생이 어떻게든 실기 시험에 목숨을 거는 이유기도 했다.
“드디어 내 시간이 돌아왔군.”
레이첼의 자신만만한 중얼거림. 어제까지만 해도 시험 망쳤다면서 앓는 소리를 내던 녀석이 하루 만에 쌩쌩해졌다.
“다들 잘해보자! 파이팅!”
율리아야 평소와 다름없이 언제나처럼 천사 모드였고.
“샤론. 실기 잘 준비했어?”
“응.”
샤론도 마찬가지로 평소대로의 모습이었다.
오늘의 첫 실기 과목은 바로 중위 등급 마법진 연성.
말 그대로 제한 시간 내에 시험 문제로 나오는 중위 등급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마법진을 그려내면 된다.
당연히 어떤 마법일지는 시험 직전까지 불명.
그냥 단순 암기 시험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법진을 그린다는 자체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와 똑같기에 중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거나 다름없다.
참고로 모든 실기 시험은 외부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반이 아닌 운동장 땡볕에서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니 그런데 기다리는 건 반에서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안타깝게도 이렇게 기다리면서 다른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직관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카데미 문화인지라 투덜댈 수는 없었다.
“와···. 쟤는 시작하자마자 끝냈는데?”
레이첼의 감탄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얀 머리에 재수 없게 생긴 녀석이 붉은 마법진을 완성 시키고서 시큰둥하게 서 있었다.
진 그레인저. 또 그 녀석이다.
고등부 1학년에게 중위 마법은 절대 쉬운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마법을 시전해내지 못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정도.
이 시험도 얼마나 목표에 근접했느냐를 평가하지 단순하게 마법을 썼냐 못 썼느냐로 구분 지어 채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저놈은 완벽하게 만들어낸 걸로도 모자라 1초 만에 완성 시킨 뒤에 여유롭게 건들거리고 있으니. 보나 마나 만점 확정이었다.
‘만약 나였으면 가능했을까?’
글쎄. 일단 문제로 나온 마법에 대해선 알고 있지만 저걸 단박에 완벽한 마법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까진 잘 모르겠다. 일단 해봐야 알겠지만 저렇게 빠르게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더니 곧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 녀석.
“우욱···!”
“크로? 왜 그래?”
“아 아니야.”
뭔가 기분 나빠서 속이 메슥거려.
설마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나한테 저주를 건 건 아니겠지?
잠시 후 드디어 우리 반 차례가 돌아왔다.
서른 명 남짓의 학생을 심사하는데도 거의 10명에 가까운 심사관이 붙는다.
그만큼 철저하고 꼼꼼하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평가하겠다는 뜻이겠지.
괜히 사람을 긴장되게 만드네.
가장 앞에 있던 시험 과목 교사가 문제를 주었다.
“중급 마법인 스콜 애로우의 마법진을 만들어라.”
스콜 애로우.
쉽게 말하면 돌풍 화살.
전투 마법 중에서 높은 범용성으로 자주 이용되는 중급 마법 중 하나이다.
좋아. 일단 아는 마법이 나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머릿속으로 마법진의 형태를 그려나갔다.
어차피 이번 시험은 다른 학생의 마법진을 커닝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아니라 안에 담겨있는 마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먼저 바람 속성의 마법이 어떤 마나 규칙을 지녔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마법진에서부터 목표물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원거리 투사체의 흐름도 알고 있어야 하고.
이런 세세한 점은 모두 마법적인 지식 즉 이론에 바탕이 된 것이며 그것들이 하나로 모일 때 비로소 실전인 마법진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걸 전부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본능대로 그리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마법에는 정해진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얼마나 마나를 완벽히 이해하고 다루느냐.
그것은 계산이 아닌 교감에 가까웠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선명한 스콜 애로우의 마법진이 생겨나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며 채점해나가는 시험관.
슬쩍 보니까 다른 아이들도 전부 잘 해낸 듯했다.
일단 첫 시험은 무사히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음 시험은 뭐였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
잠깐만. 설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큰일이에용!!
설마가 사람을 잡아먹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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