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8
딱 봐도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녀석.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마력 절단 카드를 이용하면 상성 상 우위를 점할 수는 있겠지만 고작 그 정도로 섣불리 승리를 단정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저 녀석은 자타공인 1학년 최강자. 단순 개성뿐 아니라 마법적 센스와 순발력 등의 모든 재능을 타고난 천재였으니까.
“어디 한번 이것도 막아보시지!?”
놈은 이번에 전혀 다른 성질의 소환수를 꺼내 들었다.
아까의 상어와는 반대로 강력한 한 개체가 아닌 무수히 많은 무리로 이루어진 개체군.
부우웅!!
날갯짓 소리부터 굉장히 살벌한 말벌 떼였다.
저런 조그만 소환수는 일일이 카드로 베어 넘길 수 없다. 상대는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내 능력을 파훼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괜히 천재가 아니란 건가···.’
말벌 떼가 이쪽으로 맹렬히 날아왔다.
단 한 번만이라도 공격을 허용했다간 즉시 승패가 갈리고 말 것이다. 그만큼 그레인저의 소환수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준비해둔 카드가 막힌 시점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내 결단은 빠르고 신속했다.
새로운 카드 한 장을 꺼내 말벌 떼가 오는 경로의 바닥에 깔았다. 곧이어 카드에 구멍이 생기면서 말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맞춤 전략을 들고나온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대응해준다.
아까 상어처럼 강력한 단일 개체라면 끄떡도 하지 않았겠지만 말벌들은 개체 하나의 힘은 보잘것없다 보니 내 풍혈을 견디지 못하고 단체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하.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어쩌다 보니 대련 흐름이 얼마나 마법을 다양하게 활용하느냐로 결정되게 생겼다.
마력 소환수와 카드 마술.
과연 서로의 개성 마법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가.
사실 그건 마법 자체보다도 시전자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자신의 마법에 대해 이해도가 더 높은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흘러간다면 나로서도 충분히 할 만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술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잘 다룬다고 자신할 수 있으니까.
비록 전투 능력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상성만 따졌을 때는 내가 더 유리하다고 자신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어디 이것도 막아보던가!!”
하지만 녀석의 선택은 달랐다.
내 예상과는 달리 훨씬 과격하면서도 극단적인 방법을 꺼내 든 것이다.
소환수 하나로 뚫지 못한다면 두 마리를 동시에 꺼내 들면 된다.
아니 녀석은 둘이 아니라 한 번에 네 마리를 동시에 소환하는 통 큰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상어 하나와 말벌 떼 그리고 늑대 셋에 거대 황소까지.
“하하···.”
네 소환수가 이쪽을 노려보니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대체 마력량이 얼마나 터무니없으면 이런 짓이 가능한 걸까. 지금의 나로서는 아직 저 정도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레인저는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면서 소름 끼치게 말했다.
“이제 그냥 뒤져.”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환수들을 오로지 나를 죽이기 위한 일념으로 동시에 달려들었다.
내가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냉정한 판단을 거쳐 결론은 신속하게 내려졌다.
“아 기권하겠습니다.”
“대련 끝. 둘 다 수고했다.”
“···에?”
곧바로 망설임 없이 던진 기권 선언에 대련 시험은 종료되며 심사관은 저마다 채점을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 오히려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는 그레인저.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겨서 그런지 저러니까 괜히 귀여워 보이네.
성격만 좀 정상적이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참 여러모로 아쉽다.
“뭐 뭐야!?”
“뭐긴. 시험 끝난 거지.”
“지금 장난쳐?! 그렇게 해놓고 중간에 도망친다고!?”
아니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전략적인 기권 선언일 뿐이거든.
솔직히 막으려면 아예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100%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그랬다간 내가 괴도 레이븐이란 사실을 들킬 위험이 있다.
크로로 지낼 때는 웬만하면 카드 마술만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이전까지의 공방만으로도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엔 충분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가 전교 1등인데 나름 선방했으니 더더욱 평가는 올라가겠지.
그러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더 대련을 지속할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달까.
섬뜩한 삼백안으로 이쪽을 노려보면서 뭐라 중얼거리는데 상당히 무서웠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선이다.
“그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수고했어!”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그레인저는 순순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어이. 지금 장난치는 거냐?”
“···장난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녀석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중간에 지켜보던 시험관이 칼같이 제지에 나섰다.
“거기 학생. 대련 시간이 아닌데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면 부정행위로 간주 될 수 있다.”
“쳇···!”
제아무리 그레인저라 하더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놓고 시험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빡빡한 아카데미답게 시험 중에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즉시 이번 시험의 응시 자격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제적 처리된다. 1차 경고 같은 것도 없이 단 한 번만 걸리더라도 예외는 없다.
따라서 꼴등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커닝과 같은 부정행위는 꿈도 꾸지 않는 편이 좋다.
물론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시도할 수야 있겠지만 그리 추천할 방법은 아니었다.
콧대 높은 녀석도 결국 아카데미의 학생인 이상 시험관의 권위에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금방 달려들 듯 으르렁거리던 놈이 시험관의 경고 한마디에 쥐 죽은 듯 얌전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레인저는 살벌한 눈빛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몸과 일부러 부딪치면서 나한테만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린 한마디.
“새끼야. 이따 기대하라고.”
“······.”
어라. 설마 나···.
지금 얘한테 찍힌 건가?
설마 학교 폭력을 당해버리는 거야?
아니 내가 뭐 그리 심한 잘못을 했다고. 내 잘못이라 해봤자 그냥 열심히 대련에 임한 것밖에 없는데.
대련장을 떠나는 놈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나도 반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뭐랄까. 아까부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게 뭔가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이거 주인공이 하던 짓이랑 똑같잖아?’
레이어드 녀석도 대련에서 봐줬느니 뭐니 하면서 처음에 똑같이 굴었었지.
역시 라이벌을 닮는다는 걸까. 그레인저도 판박이로 똑같이 따라 하는군.
“음···.”
곧장 반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어차피 가봤자 당장 할 것도 없으니 대련이나 좀 구경하다 가기로 했다.
역시 웬만한 애들은 나보다 못했다.
자만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괴도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며 어느새인가 내 마법 실력은 상당히 뛰어나 졌다.
이제 막 고등부에 진학한 풋내기들과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보다 더 강한 그레인저는 규격 외의 천재니까 제외하고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최상위권이라 할 만한 레이첼이나 율리아와도 충분히 비벼볼 만하니까.
실제로 지난번 대련 때 레이첼을 이기지 않았던가.
허점을 노린 거라곤 하지만 그것도 엄연히 실력 일부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오. 저건 좀 볼만 하겠는데.”
저쪽에서 막 시작되려는 대련자들의 얼굴을 보고 기대감을 가졌다.
다름 아닌 원작의 주인공 레이어드의 차례였다.
저 녀석도 엄청난 천재이긴 하지만 그레인저와는 달리 성장형 천재에 가까웠다.
작중 초반부인 지금으로선 1학년 내에서도 최상위권이라 부르기엔 살짝 애매한 수준.
저 녀석은 시간이 지나며 작중 사건들을 겪어야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레이어드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웬만한 놈들은 주인공의 까다로운 전투 스타일에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
마법이 주 소재인 판타지 배경에서 검을 주력으로 다루는 낭만 검사.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개성과 매력이지 않은가?
근처에서 녀석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상대도 종합 능력 평가 상위권의 꽤 강한 학생인 듯했으나 역시 큰 이변 없이 주인공이 무난하게 1승을 거두었다.
검을 슥슥 휘두르며 베어 넘기는 모습이 상당히 멋있긴 했다.
나도 검이나 사용해 볼까?
시답잖은 상상에 잠긴 채 대련장을 벗어나는 순간.
바깥에서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이코 녀석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드디어 기어 나왔네. 내가 이따 보자 했지?”
진짜 거머리처럼 끈질기네. 이렇게 기다리면서까지 본인이 던진 말을 지키다니. 참 대단도 하시다.
“대련은 이미 끝났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
“또 뺀질거리면서 은근슬쩍 도망치려고? 내가 보내줄 거 같아?”
아니 대체 내가 언제 뺀질거렸다는 건데.
한숨을 푹 내쉬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와 끼어들었다.
“크로. ···그리고 재수 없는 놈.”
“하. 뺀질이에 이어서 촌뜨기도 나타났네.”
레이어드와 그레인저.
원작의 라이벌인 두 녀석이 또다시 맞붙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칭 피해자인 두 사람(대련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고 주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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